211화. 선언
케로즈가 중견 길드로 올라선 뒤 박중섭은 어딜 가더라도 귀빈 대우를 받았다.
길드장으로서 그만한 명예와 지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대놓고 무시당하는 건 실로 몇 년 만의 일.
‘유지한. 네가 감히 널 키워준 케로즈를 공격해?’
유지한 파티의 영화 <아제시아 2>에서는 김현태 파티가 등장했다.
기본적으로 영웅들이 현장에서 촬영한 영상에는 초상권을 따질 수 없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반대로 김현태 파티 또한 유지한의 의사를 묻지 않고 그의 얼굴을 영화에 담을 수 있었다.
그런데…….
——네 말이 사실이라는 걸 어떻게 믿지?
——쯧! 유지한, 쓸데없이 재촉하지 마.
——다치기 싫으면 너희 전부 꺼져!
——나한테 명령하지 말라고 했어.
영화에서 유독 고집불통처럼 나오는 김현태의 태도는.
보는 이로 하여금 매우 좋지 못한 인상을 남겼다.
평소 언론에 알려진 그의 이미지와는 상반된 행동이 보여진 것이다.
“후우우……. 현태가 현장에서 조금만 침착했어도 좋았을 텐데.”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당장 각종 수단을 동원하여 꿀잼에게 반격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다가 자칫 잘못하면 케로즈에게 더 큰 피해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에 참아야만 했다.
어차피 유지한의 계약서를 비롯해 세간에 둘러댈 합리적인 핑계는 많았기에.
박중섭은 분노를 가라앉히며 책상 위에 올려둔 서류를 살폈다.
“쯧!”
그것은 탈퇴한 이미아를 대체할 영웅들의 리스트.
길드 내에서 김현태 파티에 합류를 원하는 이들은 그만큼 많았다.
후보들이 많이 모였으니 이미아의 공백은 그녀보다 훨씬 협조적인 영웅으로 메꿀 수 있을 터.
“그래, 너희가 언제까지 발버둥 치는지 보자.”
유지한이 이름을 날리고 이미아가 그와 동맹을 맺건 뭘 하건.
하나같이 케로즈를 떠난 멍청이들의 발버둥일 뿐이다.
언젠가 한국 최고의 영웅이 될 김현태가 케로즈에 있으니.
결국 마지막 승자는 자신이 되리라고, 박중섭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
[영웅 유지한과 케로즈의 계약서 전격 분석.]
[신인들을 향한 길드의 갑질, 과연 어디까지 왔는가?]
[허술하기 짝이 없는 영웅 계약. 제도적 절차 마련해야…….]
…….
…….
유지한이 자신의 계약서를 공개한 직후, 그와 관련된 많은 의혹과 정보들이 쏟아졌다.
청렴하고도 깨끗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케로즈에 오점이 생겨난 것이었다.
다만 케로즈는 평소 갖고 있던 홍보력을 총동원하여 반박 기사들을 쏟아냈다.
그뿐만 아니라 유지한에게 부정적인 여론을 형성하기도 했다.
[익명13 : 계약을 한 당사자 책임이 더 큰 거 아닌가?]
[익명24 : 내가 봐도 유지한 잘못임. 김현태 파티의 입지를 생각해보면 사실상 함께할 기회를 준 거잖아.]
[익명15 : 조건이 싫었으면 계약을 하지 말았어야지.]
[익명55 : 이제 와서 저러는 거 찌질하다.]
인터넷에서 누군가 의혹을 제기할 때마다 몇 분 안에 수두룩하게 달리는 댓글들.
눈치가 빠른 이들은 그것이 케로즈에게 고용된 사람들임을 알아보았다.
그들이 아무리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해도 케로즈를 너무 감싸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익명10 : 케로즈에서 뻘짓하네.]
[익명32 : 박중섭 길드장 진짜 한심하다.]
[익명18 : 영화에서 김현태가 하는 행동 봤냐? 진짜 개답답함.]
[익명11 : 김현태 데뷔했을 때부터 팬이었는데……. 오늘부터 손절한다.]
유지한을 지지하는 세력과 김현태를 지지하는 세력.
두 그룹으로 나뉜 사람들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서로 옥신각신하며 싸워댔다.
실제로도 두 사람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은데.
그들의 팬들끼리도 다툼을 벌이는 것이었다.
“김현태가 이렇게나 욕먹는 건 처음 보네.”
그런 광경을 지켜보는 유지한으로서는 조금 낯선 기분이 들었다.
얼굴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내 아군을 자청하며 다른 세력과 맞서 싸워준다는 것은.
좀처럼 겪어보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시후의 이미지는 나쁘지 않은듯해.’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종족을 공개한 김시후.
그는 자신에게 들어올 비난이나 욕설 따위를 예상했었지만.
걱정은 기우였던 것인지, 그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심지어 한국의 이종족들은 이번 일로 하프 엘프인 김시후를 크게 주목하고 있었다.
이세계인으로 인해 이종족들의 인식이 더 악화되는 가운데.
새롭게 등장한 김시후가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이었다.
어느 드워프가 설립한 회사에서는 꿀잼에 투자하고 싶다고 먼저 메일을 보내올 정도였다.
‘다만……. 지금 문제는 그런 게 아니지.’
유지한과 케로즈 사이의 관계.
꽁꽁 감췄던 종족을 드러낸 김시후의 존재.
모두 하나같이 중요한 사안임이 분명하지만.
[익명19 : 님들아. 지금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님.]
[익명44 : 칠라가 말을 한다잖아!]
칠라의 의사소통 능력과 관련된 이슈는 상상 이상으로 주목받고 있었다.
칠라가 말을 하는 영상이 뷰튜브를 통해 퍼져나간 직후.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의 많은 연구자들이 칠라에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형! 미국에서 또 메일 들어왔어요.”
“아까는 일본에서 왔다며?”
“그랬죠.”
칠라를 탐내는 이들은 모두 길드의 공식 메일을 통해 연락해왔다.
받는 쪽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인지, 번역기를 거치지 않으면 읽을 수 없는 것들도 많았다.
칠라의 주인인 민유리는 조금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
“거금을 줄 테니 자기한테 칠라를 팔아달라던 사람도 있었어요.”
“찍찍! 왜 다들 나한테 관심이 많은 거냐?”
“네가 귀여워서 그래.”
“찍! 그런 거였군!”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칠라였다.
유지한은 녀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칠라와 관련된 요청은 전부 거절하도록 하죠.”
“네.”
“마력이 생겼으니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유지한이 칠라와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시험해본 결과.
칠라의 신체 능력은 마력이 생기기 전보다 강화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지간한 영웅이 달려들더라도 저 방패 든 친칠라 하나를 밀어내기 힘들 터.
더불어 민유리가 24시간 칠라에게 붙어 있으니 납치 따위의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았다.
‘이걸 정영욱 덕분이라고 해야 하나…….’
정영욱의 몸에서 터져나온 검은 안개의 영향을 받아 돌연변이로 변해버린 칠라.
당시 정영욱은 원정대에 한 차례 위기를 가져왔지만.
결과적으로는 칠라에게 거금을 내도 얻을 수 없는 성장의 계기를 제공한 셈이다.
하지만 이제는 김시후의 적이 되어버린 그에게.
유지한은 대체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사무실에 모여있던 유지한 파티는 영웅부 서울 지부로 이동했다.
영웅부에서 소화할 일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영욱이가 사라졌다고요?”
양지철은 유지한 파티에게 치료실에 머물던 정영욱이 실종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유지한도 놀랐지만, 무엇보다 놀란 사람은 김시후였다.
눈이 휘둥그레진 김시후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CCTV는요?”
“아까 정전이 발생해서 30초 정도 동작하지 않았는데, 그사이에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고작 30초 만에요?”
“네. 이상한 건 창문이나 문이 열린 적은 없었다는 겁니다.”
“……!”
간호사와 의사, 영웅부의 힐러들이 방문하는 때가 아니면 굳게 닫혀있던 치료실의 문.
그동안 내내 깨어나지 않았던 정영욱은 집중 치료를 받음과 동시에 24시간 감시를 당하고 있었다.
이세계인에게 납치당했던 유일한 인간이자 영웅이었고.
유지한이 미리 그에 대한 언급을 해두었기에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한 것이었다.
“당장 안내해주세요.”
유지한 파티는 양지철을 따라 정영욱이 머물던 치료실로 달려갔다.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도 몰라도 그가 사라진 건 마법의 개입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
현장에서 정영욱이 마력을 사용한 흔적을 찾아낸다면 중요한 단서로 이어질 수 있었다.
—어라? 없어! ……왜 없지?
그러나 정영욱이 사라진 치료실에는 자그마한 마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당황한 실프가 치료실 곳곳을 날아다니는 사이, 유지한이 김시후에게 말했다.
“뭐 느껴지는 거 없어?”
“이상할 정도로 공간이 깨끗해요.”
“……이상하다는 건?”
“마력을 보유한 인간은 보통 한곳에 오래 머물기만 해도 마력의 찌꺼기, 잔재 같은 게 남아요. 영욱이가 여기서 며칠 머물렀으니 당연히 그런 게 느껴져야 하는데…….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마치 누군가가 일부로 흔적을 지워버린 것처럼.”
유지한 파티는 한동안 치료실을 조사했지만, 끝내 별다른 단서를 찾아내지 못했다.
김시후는 매우 복잡한 표정으로 정영욱이 누워 있었던 침대를 내려다보았다.
*****
기자 회견 따위의 각종 촬영을 위한 공간으로 구성된 영웅부의 강당.
많은 언론사에서 강당 뒤쪽에 자리를 잡고 카메라 따위를 조작하고 있었다.
“입장하십니다!”
영웅부 직원의 외침과 함께 활짝 열려있던 입구를 통해 다수의 영웅 파티가 입장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반듯한 정장을, 누군가는 현장에서나 입을 법한 장비를.
다양한 복장을 착용한 그들의 모습을 기자들이 카메라로 열심히 찍어댔다.
“박재경 씨! 여기 좀 봐주세요!”
“레드홀도 왔다!”
“저기도 찍자.”
시간이 흐를 때마다 강당으로 입장하는 영웅들의 수가 줄어들었다.
오늘 영웅부로부터 초청받은 그들이 가진 한 가지 공통점.
바로 지방 원정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었다는 것이었다.
파바바바밧!
김현태 파티가 입장하자 그들을 향해 카메라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해남에서 원정대장을 맡았던 데다가 유지한 파티와 그들 사이에 생겨난 갈등으로 더 주목받는 모양새였다.
파티를 탈퇴한 이미아는 그들 사이에 보이지 않았다.
“반갑습니다, 하하.”
김현태는 사람 좋은 미소를 보여주며 지정된 좌석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입장 시간이 10분 정도 남았을 무렵.
유지한 파티가 강당에 들어섰다.
“헛!”
“……!”
이번 원정으로 단연코 가장 이름을 떨친 이들.
떠들썩하던 기자들은 기다렸다는 듯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강당의 모든 카메라가 걸어가는 그들에게 쏠렸다.
“칠라 씨! 딱 한 마디만 부탁드립니다!”
“찍찍? 지금은 딱히 하고 싶은 말이 없다!”
“우오오오!”
“정말로 말을 한다!”
영상으로만 칠라를 구경했던 사람들은 칠라의 목소리를 듣고 환호했다.
칠라가 말하는 건 복화술 따위의 조작이라는 소문이 날아가 버리는 순간이었다.
‘자리는 저긴가.’
유지한의 자리는 김현태 파티와는 완전히 떨어진 자리.
영웅부에서 자리 배치에도 꽤 신경을 써준 모양이었다.
“다들 바쁜 와중에도 이렇게 모여줘서 고맙습니다.”
원정대에 참여한 영웅들을 치하하기 위해 계획했다는 행사의 진행자이자 주최자.
최근 들어 활동이 잦아진 조두진 장관은 강당에 입장해서 형식적인 인사말을 건넸다.
“여러분을 포함한 많은 이들의 노력과 희생으로 우리는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시민들을 대표하여 저 조두진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휠체어에 앉은 조두진이 의자에 앉은 영웅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 때는 입가에 장난스러운 웃음이 걸려 있었다.
“사실은 높으신 분들도 오늘 이 자리에 많이들 참석하고 싶어 했지만, 그 양반들 하는 말은 재미도 없고 여러분이 불편할까 봐 내가 한사코 거절했어. 하하!”
대통령의 행사 참석 요청을 대놓고 거부했다며 호탕하게 웃어 재끼는 조두진.
유지한을 포함한 몇몇 영웅들은 그와 함께 미소 지었다.
과연, 5년 임기인 대통령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인물다웠다.
“오늘 이 행사는 원정에서 활약한 여러분께 덕담을 해주기 위한 자리였지……. 그런데 그걸 조금 바꿔볼까 해.”
예정대로라면 각 파티에게 훈장 수여식을 진행하고 덕담과 만찬 따위가 진행되는 행사.
그러나 그 계획을 바꾸겠다는 조두진은 한껏 진지해진 얼굴을 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퍽 흥미로운 발언에 영웅들과 기자들의 이목이 쏠리는 상황.
조두진은 마이크 앞으로 입술을 바짝 가져가며 말했다.
“1급 영웅들의 탈환을 위한 이세계 진출을 선언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