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비밀
취재를 통해 유지한의 과거사를 알아낸 기자 이완.
[협박하려는 건 아닙니다. 원치 않으시면 이 건은 공개하지 않겠습니다.]
이완은 이어지는 메시지를 통해 유지한을 협박하려는 게 아니라는 걸 분명히 했다.
그가 원하지 않는다면 이 정보를 계속 숨기고 있겠다고도 말했다.
다만, 그에게 자신의 과거를 밝힐 의사가 있다면.
자신이 그 소식을 널리 퍼트리는 스피커 역할을 맡겠다는 것이었다.
‘역시 영원한 비밀이라는 건 없었네.’
유지한은 메시지를 읽으며 침묵했다.
김현태 파티원들을 제외하고도 과거 케로즈의 직원 중 일부는 몰래 활동하는 유지한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아무리 비밀 유지 각서를 쓰고 엄중한 경고를 내린다고 한들.
그 관계자 중 단 한 사람이라도 마음이 바뀐다면 쉽게 풀릴 수 있었던 정보인 것이다.
‘어쩌면 지금이 좋은 타이밍일지도 모르지.’
한동안 말이 없던 유지한은 휴대폰을 조작하여 인터넷에 접속했다.
본인의 이름을 검색하며 새롭게 올라오는 소식들을 둘러보다가.
어느 정도 확신이 생긴 그는 이완에게 답장을 보냈다.
*****
김시후는 휴대폰과 지갑을 챙겨서 집 밖으로 나섰다.
소중한 나무 지팡이에 바를 특수 오일을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청영사는 곧 열리는구나.’
IUPC와 이세계인으로 인해 중단되었던 청년영웅사관학교.
길드장인 김시후에게는 그 청영사가 조만간 재개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청영사 본부에 위치한 사무실을 한동안 비워뒀던 만큼 다시 방문해야겠다 싶었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십쇼!”
영웅 관련 물품을 판매하는 상점에 들어서자 직원이 김시후에게 인사를 건네왔다.
특수 오일이 진열된 코너에는 마법 지팡이를 위한 다양한 오일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종류가 너무 많아서 고민이 되기도 했지만.
언제나 지팡이에 사용한 물건이 있었기에 고민하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칠라한테 줄 간식이라도 살까?”
말문이 트인 칠라는 전에 이전에 접하지 못한 새로운 음식을 먹으면 재밌는 반응을 보여주곤 했다.
그에 김시후는 잠깐 편의점에 들러서 새로 발매된 과자들을 구매하고자 했다.
그런데…….
‘뭐지?’
모자로 가려진 김시후의 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온 골목으로 걸어가자 남색 교복을 착용한 한 무리의 학생들이 모여있는 게 보였다.
[사일런스]
김시후는 마법으로 소리까지 죽여가며 자신의 존재를 감췄다.
고개만 빼꼼 내밀어서 학생들을 관찰했다.
“이, 이제 그만해……!”
“아직 덜 때렸어.”
“손 안 치워? 더 맞고 싶지?”
짝! 짝! 짝!
한 남학생이 쫙 펼친 손바닥을 아래로 휘둘렀다.
그럴 때마다 살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을 때리고 있는 장면이었다.
“퉷!”
어느 남학생은 맞고 있는 학생에게 침을 뱉으며 말했다.
“너희 때문에 한국이 개판 났잖아!”
“죽은 사람이 몇 명인지 알아? 대체 어떻게 책임질래?”
“……!”
맞고 있는 학생의 얼굴을 본 김시후가 표정을 굳혔다.
그가 다른 학생들과 같은 교복을 착용한 고양이 귀의 수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한 게 아니야!”
“아니기는!”
“영웅부에서 발표한 거 못 봤냐?”
“넌 오늘 뒤졌어.”
학생들이 다시금 폭행을 시도하려는 찰나.
김시후가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누구지?”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간 김시후는 구석에서 맞고 있던 학생을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다른 학생들은 외부인인 그를 경계하며 화를 냈다.
“이봐요!”
“당신이 뭔데 참견이야?”
“얘가 뭘 잘못했는데.”
“안 보여? 이종족이잖아!”
“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 나오는 새끼들!”
“…….”
입을 다물고 있던 김시후는 얼굴에 착용한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러자 주변의 학생들이 하나같이 눈을 크게 떴다.
“어…….”
“혹시 김시후 님?”
“유지한 파티의 마법사?!”
골목길에 모인 학생 중에 김시후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은 없었다.
유지한 파티는 최근 어린 학생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편이기 때문이었다.
“구역질은 안 나냐?”
“네?”
이종족을 보면 구역질이 나온다던 남학생은 김시후를 보고 있음에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에 김시후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전부 다 꺼져.”
“허억!”
“윽!”
솨아아아!
김시후의 발바닥으로부터 서늘한 마력이 뻗어져 나왔다.
그 마력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학생들은 서서히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이내 몸을 돌려 도망쳤다.
‘종족 차별이 심해졌다더니, 사실이었나.’
영웅부에서 IUPC 사태를 일으킨 것이 이세계인의 짓이었음을 공표함에 따라.
평범한 시민들 사이에서 이종족들을 대상으로 한 혐오 범죄가 부쩍 늘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분간하기 어렵고 마주치기도 힘든 이세계인들을 대신하여 애꿎은 이들에게 분풀이를 하는 셈이었다.
“괜찮아?”
“가, 감사합니다.”
“너 왜 저항하지 않는 거야?”
고양이 귀를 가진 남학생은 몸에 마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또래 학생들을 날려버리는 것도 간단한 일이겠지.
하지만 그는 아무런 저항조차 하지 않았다.
“큰 싸움으로 번지면 안 되잖아요.”
“…….”
“괜히 잘못되기라도 하면 학교에서 제가 있을 자리가 사라지니까…….”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던 남학생은 김시후에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전했다.
그의 머리 위에 달린 귀를 본 김시후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모자를 붙잡으며 생각했다.
‘때가 된 건가.’
하프 엘프이자 동시에 영웅으로서 활동하는 김시후.
그로서는 피할 수 없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
—정말 확실한 거지?
“본인이 허락했다니까요? 저한테 다 맡겨두세요.”
—알았다. 메인에 띄울 준비 하고 있으마.
부릉!
이완은 유지한과 만남을 약속한 장소로 차량을 운전했다.
직장 상사와 통화를 끝낸 그의 손가락은 좀처럼 가만히 있질 못하고 꼼지락거렸다.
그만큼 마음이 들떠있는 것이었다.
‘마침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유지한이 메시지로 만남을 허락한 순간.
이완은 김현태 파티에서 여태껏 감춰왔던 인물이 그가 맞다는 확신이 생겼다.
긴 취재를 통해 커다란 의문이 해소되는 순간은 언제나 즐거운 법.
어젯밤에는 기대감에 부풀어 잠에 깊게 들지도 못하고 새벽까지 깨어 있었다.
“원정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한 명의 영웅. 그리고 그를 떠나보낸 케로즈…….”
원정대에서 가장 크게 이름을 떨친 영웅은 단연코 유지한이었다.
수많은 쟁쟁한 파티가 원정에 뛰어들었지만, 그 누구도 그만큼의 반응을 끌어내지 못했다.
그런데 그런 영웅이 소속되어 있었던 길드에서 그에게 마땅한 대우를 해주지 않았었다면.
과연 어떤 반응들이 튀어나올지 궁금했다.
‘저거군.’
촬영이 예정된 스튜디오 앞에 주차된 커다란 차량.
유지한 파티는 민유리가 운전하는 그 차량에 탑승하고 있었다.
“다들 오셨군요!”
“들어가서 얘기할까요?”
유지한은 혼자가 아니라 파티원들과 함께였다.
이완은 스튜디오에 들어가 간단한 준비를 마치고 그들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유지한 파티! 이번 원정 수고 많으셨습니다. 저 또한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원정이 끝난 뒤 첫 인터뷰 시죠?”
“맞습니다.”
원정 직후 유지한 파티가 처음으로 진행하는 언론 인터뷰.
그들에게 쏠려있는 관심을 생각해보면 기사 조회수는 보증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현재 여러분들의 인지도가 3급 파티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는데요. 체감이 좀 되시나요?”
“아무래도 그렇죠.”
“어딜 갈 때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피곤하긴 해요.”
가볍게 인사와 잡담을 나누던 이완은 자신의 메모지를 바라봤다.
이제부터 중요한 질문을 건넬 시간이었다.
“여기까지 오셨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케로즈의 김현태 파티. 당연히 알고 계시겠죠?”
“예.”
“유지한 파티와 함께 원정에 참여한 것으로도 알려진 김현태 파티에는 여태껏 존재가 드러나지 않은 파티원이 존재한다고 알려집니다. 그들과 같은 현장에서 복면이나 가면을 쓴 사람을 목격했다는 영웅들의 증언들이 이어지기도 했죠.”
“…….”
“이에 대해 케로즈에 몇 번이나 직접 문의를 넣었지만, 아쉽게도 공식적인 답변을 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영웅일보의 집중 취재 결과 아주 놀라운 정보를 알아냈는데요. 그 의문의 영웅이 다름 아닌 유지한 씨였다는 겁니다!”
“그건 제가 맞습니다.”
“……!!”
오늘의 하이라이트.
유지한이 자신의 과거를 긍정하는 장면.
원했던 답변을 전해 들은 이완은 자신의 무릎을 탁 치며 기뻐했다.
답답하게 묵혀있던 변이 쑥하고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생각보다 담담하네?’
케로즈의 요구로 감추고 있던 과거를 드러내는 일.
쉽지 않을 결정이었을 텐데도 유지한은 생각보다 담담한 태도를 유지했다.
마음을 굳게 먹고 온 것이리라.
“이걸 봐주시죠.”
“……?”
촤락!
유지한이 과거 케로즈와 그가 맺었던 계약서를 내밀었다.
살짝 놀란 이완은 그 계약서의 조항을 손으로 짚어가며 꼼꼼히 살폈다.
그리고…….
“이, 이걸 받아들이셨다고요?”
영웅보다 길드가 훨씬 더 많이 가져가는 수익 배분부터 시작하여.
비공식 파티원이라는 명목으로 정의된 각종 제약 사항까지.
‘최악이군.’
계약서의 조항들이 대부분 길드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걸 깨닫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언뜻 보면 불법 계약 같지만 결코 불법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법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는 않는 선에서 교묘하게 작성된 계약일 뿐.
“그땐 어렸죠.”
“이 계약서의 내용이 알려지면 소란이 일어날 겁니다.”
길드는 민간업체의 성격을 띠지만 엄연히 국가 기관인 영웅부에 의해 관리된다.
영웅들의 존재는 국가의 위상에도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계약서의 내용은 향후 영웅부에서도 언급될 수 있을 정도로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케로즈가 이따위 짓거리를 할 줄이야.”
“이제 와서 따질 생각은 없습니다. 계약서에 사인을 한 건 제 책임도 있으니까.”
“그런데 이거, 공개하실 겁니까?”
“기자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공개하는 게 좋겠습니까?”
“다시는 이와 비슷한 계약이 생겨나지 않게끔, 공개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시죠.”
“하지만…….”
이완은 조금 머뭇거렸다.
계약서 내용이 공개되면 유지한 또한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모든 위험은 제가 감수하겠습니다.”
위험을 떠안겠다는 유지한의 선언에 이완은 결국 계약서의 사본을 챙겼다.
회사로 돌아가자마자 내부 검토를 거쳐 그 내용을 공개할 생각이었다.
“몇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어떤 거요?”
유지한은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김시후의 얼굴을 바라봤다.
“…….”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던 김시후는 무언가 결심한 표정을 짓고는.
오른손을 이용하여 머리 위의 비니를 아래로 쭉 잡아당겼다.
스르륵—
항상 그의 머리에 붙어있을 것만 같던 모자가 너무나도 쉽게 벗겨지고.
그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잿빛 머리칼과 뾰족한 한쪽 귀가 드러났다.
“하프 엘프?!”
“네.”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김시후를 주시하고 있던 이완은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그가 이종족이라는 소문은 인터넷을 통해 조금씩 퍼지고 있었다지만.
헛소문이 아니라 진짜였을 줄이야.
‘이종족이 설립한 길드라……!’
이완의 볼펜이 메모지 위에서 현란하게 움직였다.
마지막으로 유지한 파티의 인터뷰를 진행했을 때처럼.
그는 이번 기사가 특종이 되리라는 걸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아직 한 발 남았습니다.”
“네?”
“찍찍! 이제 내 차례인가?”
처음 듣는 낯선 목소리에 이완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방금 누가 말씀하신 겁니까?”
“나다. 찍!”
“허어억.”
이완을 향해 손을 흔드는 칠라.
소스라치게 놀란 이완은 의자에서 그만 미끄러지고 말았다.
“허, 허허허…….”
고작 특종이라는 단어로 이번 인터뷰를 포장하기에는.
다소 부족함이 많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