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귀환 (4)
“끄으으!”
집으로 돌아온 다음 날.
오랜만에 숙면을 취한 유지한은 힘차게 기지개를 피며 일어났다.
소리 없이 침대에서 쉬고 있는 실프를 두고 일어나 거실에서 컵에 물을 따라 마셨다.
그리고 하루 동안 꺼둔 휴대폰을 켰는데.
띠리링! 띠리링! 띠리링!
띠리링! 띠리링! 띠리링!
휴대폰에서 진동과 알림음이 정말 쉴 새 없이 울려왔다.
받지 못한 부재중 전화만 수백 통.
아직 읽지 못한 메신저의 알림은 999개를 뛰어넘었는지 더 숫자가 올라가지 않았다.
휴대폰 화면을 책상에 엎어둔 유지한은 컴퓨터를 켜서 최신 뉴스를 확인했다.
“재경 씨가 돌아오셨네.”
불과 몇 분 전.
여수에 있던 박재경과 정기준이 서울로 돌아왔다는 속보가 들어왔다.
큰 상처 없이 멀쩡한 그녀를 보고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도중.
유지한은 기자들이 촬영한 사진에서 뜻밖의 인물을 찾아냈다.
“아뎀?”
정영욱 파티에게 맡겼었지만.
이후 자취를 감췄던 이세계인 아뎀이 박재경의 손에 끌려가고 있었다.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가는 듯한 그를 보아하니 일부러 투항을 한 모양이었다.
아주 협조적이었던 그를 떠올리며 유지한이 조금이나마 반가운 마음을 느끼던 그때였다.
[Q. 꿀잼의 유지한 씨가 원정에서 어떤 존재였다고 생각하시나요?]
[Q. 3급인 유지한 파티가 상위 등급보다도 많은 활약을 했다고 전해지는데…….]
[Q. 박재경 씨와 유지한 씨가 서로 어떤 관계인지 궁금합니다.]
박재경과 정기준에게 쏟아지는 질문 중에는 유독 유지한과 관련된 것들이 많이 보였다.
그에 유지한은 낯이 간지러웠다.
“이런 질문을 왜 하는 거야.”
드르륵! 드르륵!
빠르게 마우스 스크롤을 내리며 기사의 끝에 다다랐다.
마지막 질문은 사라진 윤도하와 관련된 것이었다.
[Q. 윤도하 길드장은 찾아내지 못한 건가요?]
[A. 찾아낼 겁니다. 반드시.]
박재경은 길드장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레드홀의 부길드장인 정기준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용을 정리해서 전달하는 편이 좋겠다.’
원정대에서 유일하게 차원의 경계에 다녀온 유지한은 그곳에 출입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검증은 필요하겠지만, 사실상 지구에서 이세계로 넘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 것이었다.
아마도 이건 정말 많은 이들이 원하는 정보일 터.
다만 유지한은 한편으로 걱정이 들기도 했다.
“……우리가 침입자가 될지도 몰라.”
그렇게나 침입자를 비난하던 지구인들이.
되레 침입자가 되어버리는 상황에 처할 수 있었으니까.
*****
각 지역에서 벌어졌던 원정대와 IUPC간의 대립은 시간이 지날수록 원정대가 IUPC를 압도하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치열하게 저항하던 하얀 머리의 인간들도 조종하던 몬스터가 사라진 뒤에는 그저 힘이 조금 센 일반인에 불과할 뿐.
분위기 파악이 매우 느렸던 IUPC 회원들은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뒤에야 자신들의 패배를 선언하며 무릎을 꿇었다.
“역시 사형이군.”
붙잡힌 이세계인들은 유지한의 예상대로 영웅부에서 자신들의 성과를 홍보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유지한이 선처를 요청한 제리와 박재경을 따라간 아뎀을 제외한 이들은 언론에 얼굴이 알려지며 무기징역이나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나마 큰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도록 해준 것이 나름의 배려라면 배려였다.
‘청영사는 다시 진행되려나?’
원정으로 인해 중단되었던 청영사는 아직 소식이 없었다.
그에 유지한은 파티원들과 청영사의 사무실로 출근하지 않기로 합의한 후 자신의 주변을 정리하며 시간을 보냈다.
여기저기서 들어온 연락이나 요청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남호열의 생사를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멀쩡하네.”
“다치길 바라셨어요?”
“설마.”
그리고 유지한의 집으로 그의 고모가 찾아온 날.
영웅부에서 유지한 파티에게 출석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고모도 같이 가신다고요?”
“그쪽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그런데 너 차림새가 그게 뭐니?”
유지한은 얼굴에 모자와 선글라스, 마스크까지 착용한 채 집 밖으로 나섰다.
다소 요란한 차림새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밖에서 자꾸 사람들이 달라붙어서요.”
“연예인이 다 됐구나.”
“어쩌면 그 이상이죠.”
유지한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외출만 하면 자꾸 사람들이 얼굴을 알아보기 때문에 일부러 가린 것이었다.
아직은 그들의 관심에 부담을 느끼는 것이 사실이었다.
“가시죠.”
택시를 타고 도착한 장소는 영웅부.
유지한은 다른 볼일이 있다는 고모와 헤어진 뒤.
파티원들과의 만남을 약속한 장소로 이동했다.
“……어?”
그곳에는 익숙한 모자를 쓰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유지한과 거의 똑같은 차림새를 한 그는 김시후였다.
“너도?”
“형도요?”
전화로만 이야기를 나누다가 며칠 만에 이뤄진 만남.
서로의 처지를 알아본 두 사람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유리 씨는?”
“칠라 때문에 먼저 들어가셨어요. 필요해지면 불러달라고 하시네요.”
원정이 마무리된 뒤에도 칠라는 여전히 깨어나지 못했다.
그에 걱정이 된 민유리는 매일 같이 동생의 병원과 칠라가 있는 영웅부를 번갈아 방문하고 있었다.
‘제리가 거짓말을 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유지한은 이내 김시후와 함께 양지철에게 전달받은 장소로 이동했다.
“재경 씨?”
“아, 지한 씨!”
그곳에는 여수에서 함께했던 박재경과 정기준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얼마 전 통화를 했었던 유지한을 반갑게 맞이했다.
“오늘은 뭣 하러 부른 거래요?”
“저희도 잘 모르겠어요.”
“통화에서도 말했지만, 지한 씨가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기준 씨 덕분에 일이 잘 풀렸습니다.”
유지한은 정기준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전했다.
그가 여수에서 원정대장이라는 타이틀을 넘겨주지 않았다면.
해남에서 김현태의 협조를 구하기가 한층 힘들어졌을 수도 있었다.
“다들 왔군.”
“……!”
“장관님?!”
그때 조두진 장관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휠체어에 탑승한 그가 앞으로 천천히 다가와서 말했다.
“갑자기 불러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다른 게 아니라 자네들이랑 의논하고 싶은 게 있어서.”
“……?”
“지한. 차원의 경계라는 것이 실존하는 게 사실인가?”
“맞습니다.”
유지한은 대략적인 내용을 조두진과 주변 사람들에게 공유했다.
처음에는 다들 좀처럼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그 말을 꺼낸 사람이 유지한이라는 것에 신뢰가 더해졌다.
“자네들은 영웅부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나?”
“가능하다면……. 1급 영웅들을 이세계에서 데려와야겠죠.”
“그게 정말로 가능하겠나?”
“갈 수는 있을 것 같은데, 지구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지구로의 복귀를 우려하는 말에 모두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벼운 마음으로 차원 이동을 시도했다가는.
평생 이세계에서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될 수도 있었다.
1급 영웅들과 함께 이세계에 갇혀버리는 셈이었다.
“필요하다면 전문가들과 차원 이동 연구팀을 따로 꾸릴 생각이네.”
“으음. 괜찮은 생각 같습니다.”
“자네들도 거기에 도움을 줬으면 좋겠어.”
“물론이죠.”
박재경과 정기준은 모두 협력을 약속했다.
주사위와 레드홀의 고급 인력들이 더해지면 상당한 시너지가 나올 터.
“그리고 나는 오늘 유지한 파티에게 드리미움을 넘겨줄 생각이야.”
“정말이십니까?”
“여기 있는 지한이 내게 직접 요청했어. 대신 1년 내로 다루지 못한다면 반납하는 조건을 달았지.”
박재경과 정기준이 동시에 유지한을 돌아봤다.
주사위와 레드홀 또한 이미 영웅부로부터 드리미움을 받아서 가공을 시도했었지만.
그 모든 시도는 금속에 흠집조차 내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갔다.
거대 길드의 힘을 쏟아부어도 다루지 못했던 재료인 셈이었다.
그런데 그걸 꿀잼이라는 중소 길드에서 가져가겠다니.
‘……지한 씨라면 가능할 것 같은데.’
원정에서 워낙 특이한 능력을 많이 보여주었던 유지한이었기에.
박재경은 그에게 묘한 기대감을 품었다.
“저는 찬성입니다.”
정기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지한 파티라면 응당 도전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어지간히 인정을 받았나 보군.”
거대 길드의 임원쯤 되면 영웅을 보는 눈이 매우 까다로워진다.
그렇지 않고서야 뛰어난 인재들을 걸러내고 키울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 임원들 중에서도 거의 정점에 있는 부길드장들에게 인정을 따낸 유지한.
그에게 역시 상당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조두진이었다.
*****
“늦어서 죄송합니다.”
“괜찮네. 칠라는 어떤가?”
“상태는 점점 좋아지고 있다고 하네요.”
민유리까지 합류한 유지한 파티는 조두진을 따라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조두진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는 대신 리모컨으로 보이는 물체를 조작했다.
그러자 그들이 탑승한 엘리베이터가 지하로 빠르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금 이동하는 곳은 원래는 외부인에게 공개되지 않는 층이야.”
“저희가 들어가도 되는 겁니까?”
“내가 허락했네.”
쿵!
곧 엘리베이터가 멈춰서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따라오게.”
“오…….”
“이건……?”
유지한 파티는 앞으로 천천히 이동하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각종 인증 절차를 거치고 도착한 장소에는 수많은 아티팩트와 영약들이 존재했다.
각 구역마다 온도와 습도까지 최적으로 유지되는 그곳은 영웅부의 숨겨진 창고였다.
“저쪽은 이번 달에 글로벌 경매장으로 나갈 예정인 품목이지.”
“멋지군요.”
“지금이라면 드리미움을 포기하고 받아가도 좋아. 인원수에 맞게 3개까지 줄 수도 있어.”
“거부하겠습니다. 덤으로 주신다면 모를까.”
분명히 좋아 보이는 물건들이긴 하지만.
유지한은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조두진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창고의 중심에 들어왔을 때.
크고 묵직해 보이는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끼이익—
조두진이 그 상자를 열자 검은색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리미움이네.”
“……!”
새까만 밤하늘에 은하수가 떠 있는 것처럼 하얗게 빛나는 점들이 박혀있는 금속.
보는 이로 하여금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 그 덩어리가 바로 유지한이 원했던 드리미움이었다.
“멋지네요!”
“실물로 보는 건 처음입니다.”
“이걸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는 알고 있나?”
“침입자들로부터 빼앗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번 원정만큼이나 힘든 전투였지.”
조두진은 자신을 무릎을 쓰다듬었다.
그때의 전투에서 다리를 크게 다쳤던 나머지.
회복이 불가능한 상처로 남았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부디 제 주인을 찾아갔으면 좋겠군.”
유지한은 조두진으로부터 드리미움이 담긴 상자를 건네받았다.
“어떻게 사용할 계획이지?”
“일단은 저희 전속 대장장이에게 맡길 겁니다.”
“어지간한 실력으로 건드렸다가는 큰코다칠 텐데.”
“아티팩트를 만들 수 있는 분입니다.”
“……정말로?”
“예.”
아티팩트를 제작할 수 있는 장인이 중소길드의 전속 대장장이로 들어갔다니.
쉽게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은둔의 고수 같은 존재로군.”
“조만간 세상에 이름을 떨칠 테죠.”
“기대하고 있겠네.”
*****
유지한 파티와 헤어진 조두진은 응접실로 이동했다.
응접실에는 그의 또 다른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두진은 자신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여성을 바라봤다.
“오랜만이다.”
“그러게요.”
“설마 네가 유지한의 가족이었을 줄이야…….”
그녀는 유지한의 고모인 한서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