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귀환 (3)
“장관님. 그건 내부 검토가 필요한 사안이…….”
“검토? 검토를 하면 달라질 게 있나? 나보고 이번 원정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해낸 영웅의 부탁을 거절하기라도 하란 말인가?”
“…….”
조두진에게 우려를 전한 비서는 곧장 고개를 숙였다.
그가 이렇게 완강한 자세로 나올 때는 절대로 고집을 꺾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우리는 이들에게 원정의 시작부터 큰 실수를 저질렀어.”
탑승한 열차에서부터 문제가 생긴 건 영웅부의 관리가 허술했기 때문이었다.
장관인 조두진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드리미움은 창고에 보관해봤자 쓸모도 없는 물건이야. 다룰 줄 아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언제든지 내어줄 용의가 있었지.”
“지한 씨는 정말로 드리미움을 활용할 수 있는 겁니까?”
“확신은 아닙니다. 다만 얘가 있으니까요.”
—응?
유지한이 손으로 실프를 가리키자.
실프는 공중에서 한 바퀴를 빙글 돌았다.
그에 조두진은 의문이 담긴 얼굴로 말했다.
“정령이라면 드리미움을 다룰 수 있다는 건가?”
“느낌상 그렇습니다.”
“이미 다른 정령과는 접촉을 해본 적이 있네만.”
“실프는 정령 중에서도 제법 특별한 친구입니다.”
—에헴! 내가 좀 특별하지!
자기 자신을 높이는 듯한 실프의 말투에 조두진이 미소 지었다.
“영화에서는 실프가 말을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말이지.”
“아마도 후속편에서 상세한 사정이 나올 겁니다.”
“오호! 기대하고 있겠네.”
“드리미움은 언제쯤 받아갈 수 있는 겁니까?”
“조만간 따로 연락하겠네.”
이후 조두진은 비서에게 창고 개방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눴다.
아무래도 드리미움 같은 물건은 높은 수준의 보안으로 관리되다 보니.
물건을 꺼내는 데 절차적인 문제가 따르는 모양이었다.
“아, 드리미움을 내어주는 데 몇 가지 조건을 달지.”
“말씀하십시오.”
“하나는 꿀잼에서 반드시 1년 내로 드리미움을 활용한 결과물을 내게 보여줄 것. 그러지 못한다면 영웅부에 물건을 도로 반납한다는 조건이야. 까다로운 조건이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뒷말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지. 괜찮겠나?”
“전혀 문제없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년 뒤에도 드리미움이 가공되지 않은 형태로 남아있다면 반납하는 조건.
유지한은 거기에 깔끔하게 동의했다.
어차피 써먹지 못할 물건이라고 판단되면 굳이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자네들이 포박해왔다는 이세계인들을 우리에게 전부 넘겨주게.”
“그렇게 하시죠. 애초에 그럴 의도로 살려서 데려온 겁니다.”
“……처음부터 영웅부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건가?”
“정확히는 시민들을 생각했죠. 저희 같은 관계자를 제외하면 다들 자세한 내막을 모르니까, 저들의 존재를 세상에 알릴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아주 훌륭하군.”
짝! 짝! 짝!
감탄하여 손뼉을 마주치는 조두진.
유지한은 순간적으로 차원의 경계에서의 일이 떠올라 주먹을 쥐었다.
“크흠! 제리라는 이세계인에게는 선처를 바랍니다.”
“이유는?”
“그녀가 아니었다면 전투가 더 힘들어졌을 겁니다.”
“알겠네.”
제리를 언급한 유지한은 마음을 한시름 놓았다.
이것으로 제리는 최소한 사형까지는 면할 수 있으리라.
“앞으로 각종 행사 따위에 유지한 파티를 초청할 테니 그때 참석해줬으면 해.”
“중요한 일정과 겹치지만 않는다면 좋습니다. 그리고 제가 하나 빼먹은 게 있습니다만.”
“뭐지?”
“저희와 마지막에 함께해준 힐러 이동길에게도 마땅한 보상이 지급됐으면 좋겠습니다.”
“알겠네.”
“나, 나는 받지 않아도 괜찮은데…….”
“준다고 할 때 받아.”
이동길에게 지급될 보상까지 정해진 뒤에야 조두진은 치료실을 떠났다.
유지한 일행은 그 자리에 남아 몇 가지 검사와 치료를 받았다.
다행히 몸에 큰 문제가 드러난 사람은 없었다.
처음부터 치료실로 오게 된 건 아마도 조두진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지한 씨는 장관님 앞에서 긴장하지도 않으시네요.”
“긴장해야 하는 거였나요?”
“아니, 영웅분들도 보통은 처음 뵐 때 많이 떠시더라고요. 아무래도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대단한 영웅이셨으니까요. 그런데 지한 씨는 대놓고 드리미움까지 요구하셨으니.”
“존경심과는 별개로 받을 건 받아가야죠.”
“하하…….”
양지철은 멋쩍게 웃었다.
괴아리를 사냥하던 때 처음 발견해서 직접 승급을 권했던 파티가.
이제는 영웅부 장관의 큰 인정을 받을 정도로 활약했다는 것이.
양지철로서도 쉽게 믿기지 않는 것이었다.
‘잘하면 조건 없는 승급도 가능하겠구나.’
커다란 성과를 올린 파티를 대상으로 각종 절차를 건너뛰고 단번에 등급을 올려주는 무조건 승급.
역사적으로도 아주 예외적으로만 진행됐던 그것이 조만간 유지한 파티에게 적용될 수 있었다.
*****
“후아.”
목에 하얀색 수건을 두른 유지한이 욕실에서 빠져나왔다.
젖어있는 머리칼과 한껏 상쾌해진 목소리.
그와 함께 욕실에 들어갔던 실프가 소리쳤다.
—지한은 더럽대요!
“넌 어떻게 된 게 먼지 하나 안 묻냐.”
—우히히!
욕실 하수구로 내려가는 거뭇거뭇한 땟국물과 찌꺼기들은 그간 유지한의 노력들을 짐작게 했다.
원정에 참여하는 내내 제대로 씻지도 못한 덕분에 지금 같은 기분이 되는 건 오랜만이었다.
반면 실프의 동그란 몸에는 작은 먼지 하나 묻어있지 않았다.
정령은 24시간 내내 청결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털썩.
유지한이 소파에 주저앉자 실프가 그 옆으로 내려앉았다.
“오늘은 고생깨나 했네.”
—응! 시끌시끌했어!
유지한은 어느덧 캄캄해진 창문 너머를 바라보며 영웅부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양지철을 따라 치료와 간단한 조사를 마치고 건물을 빠져나온 순간.
그때까지 계속 영웅부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이 그와 파티원들에게 달려들었다.
기자들에게 그렇게나 관심을 받아본 건 정말 처음 겪는 일이었다.
‘지인들도 연락이 끊이지 않았고.’
통신이 닿는 그의 휴대폰에는 수많은 전화와 메시지가 쏟아졌다.
민유리와 김시후의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에 어쩔 수 없이 세 사람은 휴대폰을 모두 꺼놓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고모도 보셨으려나.”
—뭘?
“영화.”
고모라면 갑자기 주목을 받게 된 조카를 어떻게 생각할지.
원정에서 돌아왔다는 소식은 전해졌을 테니.
유지한은 조만간 그녀를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해야겠다 싶었다.
‘남은 전투는 금방 끝나겠군.’
IUPC의 잔당들과 남은 원정대의 전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었다.
통신이 닿는 덕분에 현황은 실시간으로 전해졌는데.
원정대가 빠르게 승기를 잡아가고 있다는 소식이 많이 들려왔다.
아마도 2일에서 3일 내로 모든 전투가 마무리될 것 같았다.
“실프. 이제 여유도 생겼으니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뭐든 물어봐.
“네가 마석을 섭취하는 것으로 내게 타인의 기억을 보여줄 수 있잖아.”
—맞아.
“그건 네가 가진 능력이야?”
—아니. 지한의 힘을 이용한 거야.
“역시 그런가…….”
유지한은 손으로 턱을 천천히 매만졌다.
이번 원정에서 매 순간 중요한 정보들을 제공했던 실프의 능력.
계속 몸으로 느껴왔지만, 그건 실프가 가진 힘이 아니라 샘플링에서 파생된 능력이었다.
‘애초에 바람의 정령과는 어울리지 않지.’
누군가의 기억을 읽는다는 것과 바람이라는 속성은 그다지 연관성이 없었다.
그렇다면 실프는 대체 어떤 방법으로 샘플링을 알아보고 이용하는 것일까.
—몰라!
거기까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지한은 몸을 움직일 때 어떻게 해?
“그냥 움직이지.”
—나도 그래.
“……그런가.”
인간의 움직임을 자세히 파고 들어가면 뇌에서 운동 기관에 명령을 내리는 등 일련의 과정이 존재하겠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런 복잡한 요소를 고려하면서 몸을 움직이지는 않는다.
자세한 원리를 알고 있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것.
실프가 타인의 기억을 보여주는 행위 또한 그와 별로 다를 게 없는 것이었다.
‘계약으로 묶여있기 때문일지도.’
직접 끊어내지 않는 한 계약자가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정령과의 계약.
계약자가 지닌 고유 스킬은 그것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듯했다.
“어쨌든 수고 많았다.”
—나 잘했어?
“잘했어.”
—우히!
실프는 소파 위에서 기분 좋게 굴러다녔다.
“칠라만 깨어나면 좋을 텐데.”
민유리는 영웅부에서 한동안 칠라를 간호하다가 동생이 있는 병원으로 갔다고 알려왔다.
부모님이 병원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깨어나지 못한 정영욱도 영웅부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지만.
——이제 다시 볼 일 없을 것 같아요.
김시후는 정영욱을 보지 않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사실상 절교를 선언한 셈이었다.
‘재경 씨에게 알릴까?’
정영욱이 대놓고 김시후를 욕보였다는 건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유지한으로서는 파티원을 보호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박재경에게 자세한 내막을 알린다면.
주사위 내부에서 마땅한 처벌이 가해질 터였다.
‘시후 의견도 구해봐야겠지.’
혼자서 결정할 문제는 아닌 것 같았기에.
유지한은 그 문제에 관한 생각을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실프. 정령계로 안 돌아가도 돼?”
—가봤자 심심한걸! 난 여기가 더 편해.
실프는 원정의 시작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유지한의 곁에서만 머물렀다.
처음에는 그것이 녀석과의 친밀도를 올리려는 유지한의 뜻이었지만.
이제는 실프가 정령계로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설령 마력이 회복되는 속도가 느리더라도 현실에 남아있길 원했다.
“생각해보니까 넌 나랑 계약하기 전까지 시후의 지팡이 속에 있었지.”
—응!
“왜 그랬던 거야?”
—그 지팡이에 있으면 에르나와 함께하던 순간이 새록새록 떠올라.
에르나는 시후의 어머니인 에르나 하스를 가리키는 말.
실프는 그녀의 죽음으로 계약 관계가 완전히 사라졌음에도.
그녀를 그리워하며 그녀의 유품인 지팡이에서 몇 년씩이나 머물렀다.
“그분의 아들인 시후와 계약할 수도 있었잖아.”
—시후는 내 계약자가 될 수 없어.
“왜?”
—그냥 그렇게 정해졌는걸!
김시후가 이전 계약자의 아들임에도 계약이 불가능하다는 실프.
하긴, 그런 게 가능했다면 모든 정령사들은 자신의 자녀에게 정령을 물려줄 수 있을 테지.
“그럼 왜 나와 계약한 거야?”
—지한은 특별한 존재야. 어쩌면 에르나보다 훨씬 더.
“내 고유 스킬 때문이야?”
—글쎄? 그럴지도?
“……?”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우히히!
그루디아라고 알려진 이세계에서도 시오론 왕국의 3왕녀였다는 에르나 하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아주 범상치 않은 핏줄을 가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런 엘프보다도 내가 더 특별하다고?’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실프의 말.
실프 또한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걸 보니.
정령과의 계약에서 고려되는 건 종족이나 신분 따위가 아니라 더 심오한 기준인 것 같았다.
—아! 무무랑 아쿠아도 이게 어떤 느낌인지 알고 있을걸?
“도하 씨의 정령과 저번에 본 물의 정령 말이지?”
—응응! 처음 만났을 때 눈치를 챈 거 같더라고.
유지한은 무무의 이름을 듣고 대장에 의해 이세계로 떠난 윤도하를 떠올렸다.
정령이라는 연결고리로 처음 인연이 닿아 그에게 여러 도움을 주었던 1급 영웅.
원정에서 실프가 이전처럼 쉽게 탈진하지 않았던 건.
주로 윤도하의 가르침을 통해 얻어낸 성과였다.
‘큰 빚을 졌으니……. 가만있을 수는 없지.’
유지한은 사라진 윤도하를 찾아낼 거라고 다짐했다.
설령, 지구를 떠나 이세계로 직접 찾아가야 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