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땅끝에서 (4)
198. 땅끝에서 (4)
타인의 기억 속에서만 볼 수 있었던 이세계인들의 리더.
유지한이 실제로 그를 마주하고 느낀 첫 인상은.
‘강하다.’
이제껏 마주친 이세계인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 느껴진다는 것.
윤도하를 비롯한 1급 영웅과 비교하더라도 저 남자의 기세가 전혀 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실제로 그의 몸을 짓누르고 있는 마력 또한 허공에 떠 있는 그에게서 뻗어져 나오고 있었다.
파앙!
김시후는 일행들을 방해하는 힘을 걷어내고자.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마력을 주변에 흩뿌려서 대장의 마력과 충돌시켰다.
근처에 있는 임시연 또한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대처했으나.
“요호호!”
“윽!”
“꺅!”
마법사들의 그러한 노력은 대장이 쫙 펼친 손바닥을 위에서 아래로 휘젓는 것만으로 파훼됐다.
심지어 직전보다 더 무거워진 마력 때문에, 김시후는 양손으로 허벅지를 밀어내면서 어떻게든 상체를 들어 올렸다.
그걸 버티지 못한 임시연은 아예 바닥에 드러눕고 말았다.
“임시연!”
“나, 난 괜찮아.”
황준호의 부름에 괜찮다고 말했지만, 몸을 다시 일으키지 못하는 임시연이었다.
유지한은 그들의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것만 확인한 뒤 다시 대장에게 시선을 던졌다.
“저 때문에 다들 고생 많았습니다.”
“아닙니다!”
“먼저, 죽어간 동료들에게 묵념을.”
중절모를 가슴 위로 올린 대장은 죽어있는 이세계인들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눈을 감았다.
리우스를 비롯한 이세계인 또한 그를 따라 함께 묵념했다.
“저놈들이 쳐 뒤질려고……!”
감히 내 앞에서 여유를 부리다니.
팍 인상을 쓴 김현태는 평소보다 몇 배로 무거워진 대검을 붙잡았다.
부담이 평소보다 훨씬 커졌어도 그가 아예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거기서 기다리세요.”
“……!”
아직 묵념 중인 대장의 입에서 기다리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김현태가 마치 그의 부하라도 되는 것처럼 모든 행동을 멈췄다.
정확히는 전신을 압박하는 힘으로 인해 강제로 멈춰진 것이었다.
“너, 너! 거기서 당장 내려와!”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읍!”
심지어 입을 봉인 당하기까지.
그 모습을 본 유지한은 생각했다.
‘괜히 기다리고 있던 것이 아니었군.’
최소 20m는 떨어진 거리에서 모든 일행들의 발을 묶고.
김현태마저 자리에서 아예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는 걸 보면.
대장이라는 인간의 힘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방금 깨어났지만……. 어떤 상황인지는 알겠습니다.”
여수에서 땅끝까지 이동해 온 엘리트들.
그런 그들을 코앞에서 공격하는 영웅들.
대장은 이 자리에 주어진 몇 가지 정황만으로 현황을 파악하는 데 성공했다.
“음?”
이내 그의 시선이 쓰러진 칠라 쪽으로 향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특이한 몬스터.
그리고 그 몬스터의 몸을 붙잡고 자신을 노려보는 민유리가 보였다.
“저건…….”
민유리에게 시선을 고정한 대장의 눈이 크게 뜨였다.
입가에 슬며시 미소를 띤 그가 말했다.
“리우스! 저 햄스터 옆에 있는 여자는 생포하세요.”
“네?”
“최상급 마석을 못해도 9개 이상 제작할 수 있는 보물입니다.”
“……!”
살아있는 영웅을 재료로 사용하는 것만으로 최상급 마석을 제작할 수 있다니.
대체 1명의 영웅이 얼마나 막대한 마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말인가.
리우스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지만 대장이 그에게 거짓말을 할 리는 없었다.
“저런 인간은 처음 봅니다! 저 여인의 피는 전부 뽑아서 저한테 주시고, 도려낸 살덩이와 뼈, 내장만 따로 보관하면 좋겠어요.”
“찍……!”
“요호호! 향후 복구된 아제시아에 아주 훌륭한 자료로 남겠죠!”
주인에게 해를 끼치려는 적들을 두고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칠라는 부들부들 떨었다.
간신히 의식만 붙잡고 있기에도 벅찬 것이었다.
그런데 민유리가 무리하는 칠라를 진정시키던 그때였다.
파밧!
땅에서 칼날과도 같은 날카로운 바람이 대장에게 날아가 그의 목을 노렸다.
아쉽게도 대장은 고개를 꺾어 그 공격을 가뿐하게 피해냈다.
“정령사가 있었군요?”
대장이 실프를 내려다봤다.
인간이 아닌 정령은 그의 마력에도 큰 영향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우힛! 아깝다!
공격에 실패한 실프는 매우 아쉬워했다.
대장이 등장하자마자 몸을 숨기고 있다가 기습을 날린 것이었는데.
간단한 마법 공격은 그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동그란 정령아! 네 주제를 알고 덤비렴.”
—내 주제는 이미 잘 알아! 네까짓 녀석과는 비교도 안 되지!
“과연, 아주 건방진 정령이로군요.”
—네 엄마다!
“쯧쯧! 어찌 말투가 이리도 저렴할까! 계약자가 대체 어떻게 되먹은 인간이길래…….”
대장은 계약자로 보이는 유지한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러자 유지한은 그를 향해 말했다.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보세요.”
“대체 어떻게 한국의 1급 영웅들을 이세계로 보낸 거지?”
“……!”
유지한이 던진 질문에 대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째서 한낱 영웅이 이 정보를 알고 있는 것일까.
리우스를 바라보자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심지어 인질로 잡혀있는 제리를 바라봐도 똑같은 반응이었다.
“당신이야말로 그걸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거죠?”
“어쩌다 보니.”
“……뭐, 그래요. 어차피 이제 와서 뭘 알아낸다고 한들 달라질 건 없으니까.”
대장은 오른쪽 손바닥을 천천히 앞으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소리 나게 튕겼다.
[미라클 할루시네이션]
영웅들의 몸을 억죄고 있던 마력은 갑자기 사라지는가 싶더니.
곧바로 마법이라는 현상으로 발현되어 그들을 휘감았다.
마법에 휘말린 이들의 동공은 힘없이 풀려버리고 초점을 잃어갔다.
“아…….”
“으…….”
잠시 후에는 손아귀의 힘이 약해지면서 전투 내내 들고 있던 무기들을 하나씩 땅에 떨어뜨렸다.
눈을 질끈 감고 저항하던 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역시 대장님이다.’
환각 마법을 다루는 마법사 중에서도 정점으로 취급되는 자의 마법.
아제시아의 긴 역사를 통틀어도 채 오직 2명만이 올랐던 극한의 경지.
인간의 정신을 보호하는 수많은 방법을 동원해도 막을 수 없었던 마법이었기에.
리우스는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띠었다.
‘이번에는 너라도 어쩔 수 없구나!’
리우스는 유지한을 주시했다.
아무리 성가신 능력을 보유한 그라도 이번만큼은 벗어날 수 없을 테지.
“……?”
그런데 어째서일까.
마법이 펼쳐짐과 동시에 고개를 아래로 떨구는 것 같았던 유지한은.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들어서 대장을 바라봤다.
뚜렷한 눈동자는 환각을 보고 있지 않다는 증거였다.
그에 모두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은 대체……?”
“대장님! 저 남자에게는 환각이 통하지 않습니다!”
리우스는 지금까지 유지한에게 간파당했던 마법들을 하나씩 나열했다.
대략적인 설명을 전해 들은 대장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요약하자면, 여기까지 밀려난 이유는 저 남자 때문인 거군요.”
“예……. 그렇습니다.”
고작 한 명의 정령사 때문에 한반도의 땅끝까지 밀려난 입장.
환각에 빠져서 고개를 떨어뜨린 영웅들과는 다르게.
리우스는 창피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제리.”
“넷!”
민유리의 마력이 해제되면서 자연스럽게 자유를 되찾은 제리는 대장에게 경례했다.
아무리 인질로 잡혔었던 그녀라고 해도 대장의 앞에서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
“제리도 저 유지한이라는 영웅에게 당한 건가요?”
“넷! 우리 자기에게 당했어요!”
“……자기?”
“우리 자기예요!”
환각 마법이 통하지 않을뿐더러 리우스가 직접 인정하는 강자.
남자라는 생물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던 제리의 마음을 뺏어버린 영웅.
모든 것들을 검토하던 대장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요호호, 위험인물이군요…….’
*****
“야! 김현태!”
속박에서 풀려나온 유지한은 김현태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쳤다.
그러나 그는 정신을 되찾지 못했다.
뒤통수가 아니라 어딜 때려도 마찬가지였다.
—으으! 저건 끊어내기 힘들어!
유지한은 김현태의 머리 위를 바라봤다.
환각 마법에 씌였을 때 보였던 얇은 실이 아니라 하얗고 거대한 기둥 같은 것이 그의 머리와 연결되어 있었다.
손으로 만지려고 해도 만질 수는 없었다.
단지 그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최면에 빠져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잘못하면 죽는다!’
마법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멀쩡하게 움직이는 이세계인들.
제리마저 구속이 풀려버렸으니, 그들이 단체로 덤벼든다면 막아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
‘방법, 방법을 찾아야 해.’
눈으로는 적들을 바라보고 몸으로는 그들을 경계하며.
머리로는 이 어려운 상황을 돌파할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그러나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도망친다고 하더라도 마법에 빠진 모든 인원을 옮길 수는 없었다.
그야말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상황.
—앗! 지한!
그때 실프의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유지한이 빠르게 고개를 돌려 녀석을 바라보려는데.
“……실프?”
실프가 둥둥 떠 있던 방향에 존재하지 않았다.
바로 곁에 있던 정령이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유지한은 황급히 주위를 살폈다.
‘사라졌다.’
부서진 전망대와 이세계인들은 전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 대신 보이는 건 그리 넓지 않은 정육면체 형태의 방.
작은 출입문조차 보이지 않는 그곳은 단 한 번도 직접 와본 적이 없었지만.
‘그때 본 공간이잖아.’
윤도하의 정령 무무의 기억 속에서 보여졌던 공간이었다.
“요호호! 환영합니다.”
“……!”
몇 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대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지한은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지만 검이 잡히지 않았다.
무기 없이 몸만 이동해온 것이었다.
“여긴 어디지?”
“차원의 경계.”
“경계?”
“다른 차원, 쉽게 말해 이세계로 이동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믿기 힘든 대장의 말.
가만히 그의 눈을 바라보던 유지한이 말했다.
“나도 1급 영웅들처럼 다른 차원으로 보내버릴 셈인가?”
“요호호! 똑똑하시군요!”
“왜 죽이지 않고?”
“당신이라면 죽지 않고 홀로 도망갈 수도 있잖아요?”
“…….”
“어디까지나 가능성이지만 말이에요.”
다른 동료들을 버리는 것이 전제가 되긴 하지만.
유지한이 실프를 이용하여 도망치는 것에만 주력한다면 혼자서 달아난다는 건 충분한 가능성이 있었다.
다만 그걸 적의 입으로 듣고 있자니, 그는 조금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때로는 살인보다 더 좋은 선택지가 있지요.”
“아제시아의 수장인 당신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우리의 출신도 알고 있었네요? 역시 당신은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요.”
“누구 덕분에 말이지.”
“대화는 여기까지. 이제 헤어질 시간입니다.”
대장은 양손을 앞으로 들어 올렸다.
손뼉을 마주치기 전의 움직임이었다.
‘이런!’
기억에 따르면 박수를 치는 순간 윤도하와 백강천의 몸이 사라졌었다.
유지한은 앞으로 맹렬하게 돌진하며 그를 막아서고자 했다.
“안녕히 가시길.”
짝!
하지만 2개의 손뼉이 부딪히며 짧은 소리가 울려 퍼지고.
할 일을 마친 대장은 미소를 지었다.
“……어라?”
그런데 앞으로 돌진해오던 유지한의 몸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내 대장에게 도달한 유지한은 그의 코를 후려쳤다.
퍼어어어억!!
미간에서부터 대각선 방향으로 올곧게 뻗어있던 코뼈가.
얼굴 속으로 움푹 들어가며 부러져버렸다.
퓨슉!
양쪽 콧구멍에서는 시뻘건 피가 흘러나왔다.
두 손으로 얼굴을 붙잡은 대장은 고통에 이기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크아악! 다, 당신! 왜 사라지지 않는 겁니까!”
“몰라! 일단 맞고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