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땅끝에서 (2)
체내에서 밖으로 세차게 뿜어져 나오는 시커먼 안개.
독인지 무엇인지 모를 안개가 주변으로 퍼지기 전.
유지한은 다급하게 실프를 호출했다.
“실프! 다 걷어내!”
—불어라!
후와아아악!
실프가 일으킨 돌풍이 검은색 안개를 휩쓸었다.
말을 하다 말고 제자리에 쓰러진 정영욱은 계속해서 안개를 뿜어냈지만.
실프 덕분에 모든 안개는 허공으로 날아가 버릴 뿐이었다.
“콜록콜록!”
“에쵸!”
정영욱의 바로 옆에 있었던 칠라와 이동길은 안개를 조금 들이마시고 말았다.
민유리와 김시후는 재빨리 그 둘에게 달려갔다.
“동길 씨! 괜찮으세요?!”
“어, 음……. 괜찮은 것 같습니다?”
힐러의 필수 능력 중 하나는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 상태를 빠르게 파악하는 것.
체내의 마력으로 전신을 훑어본 이동길은 별다른 문제점을 찾지 못했다.
적어도 빠른 시간 내에 작용하는 독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찌, 찍…….”
하지만 칠라는 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손으로 단단하게 붙들고 있던 방패마저 땅으로 떨어뜨린 채 경직된 몸.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던 칠라의 몸은 이내 천천히 옆으로 기울어지더니 쓰러져 버렸다.
“칠라! 안 돼!”
화들짝 놀란 민유리가 칠라의 머리를 들어 올렸다.
어떻게든 눈동자를 굴려서 주인을 바라보는 칠라였지만.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 약물이다.’
유지한은 검은 안개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놈들이 주방에서 생성하는 2종류의 약물 중에서도 초코 우유.
평범한 몬스터를 돌연변이로 변이시키는 효과를 가진 물건이었다.
설마 그걸 안개로 만들어서 정영욱의 몸에 쑤셔 박아 터트릴 줄이야.
“저런! 한 모금밖에 마시지 않았군.”
“네가 감히 칠라를……!”
“역시 주사기로 주입하는 게 최고라니까.”
쓰러진 칠라를 보고 아쉬워하는 리우스.
격노한 민유리는 그를 향해 활을 겨누었다.
파바바바박!
그녀의 활에서 화살들이 수없이 뻗어져 나왔다.
발사된 화살은 다시 3개 이상의 화살로 갈라져 리우스를 노렸다.
“쉬이이익!”
그러나 그녀의 화살은 리우스가 아니라 그가 탄 뱀을 때릴 뿐이었다.
그나마도 뱀 가죽이 두꺼운 탓에 제대로 상처를 입히지도 못했다.
“활 솜씨가 그래서야 되겠어?”
“닥쳐.”
이를 악문 민유리는 속사를 포기하고 화살 한 발에 마력을 집중했다.
활대의 중앙으로 모여드는 푸른 빛의 마력.
최소 30발의 마력 화살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마력이었다.
‘이걸로는 부족해.’
민유리는 활시위를 더 세게 당겼다.
샤라라락!
손에서 빛이 점멸할 정도로 많은 양의 마력이 몰려들었다.
100발의 마력 화살에 더해 100발의 마력이 하나로 뭉치고.
200발에 또다시 100발의 마력이 하나로 뭉쳤다.
그 과정을 계속 반복하여 1000발의 마력이 뭉쳤을 때.
그것은 화살이라고 부르기에도 어색한 마력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아직 아니야.’
꾸우욱!
알루미늄 캔을 위에서부터 발로 밟아서 납작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처럼.
민유리는 커다란 마력 덩어리를 얇게 압축했다.
그 과정에서 흩어져버리는 마력은 무시해 버렸다.
어차피 마력은 넘쳐나니까 과감하게 퍼붓기만 하면 상관없었다.
‘저건……!’
그쯤에서 리우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화살에 담겨 있는 거대한 마력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이것도 막아 보시지.”
퉁!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 하늘을 날았다.
피유우웅——!!
뒤로 긴 꼬리를 그리며 일직선으로 올곧게 날아간 화살은.
눈 깜박하는 사이에 뱀의 머리에 도달했다.
[형태 변화 - 큐브]
콰드드득!!
커다란 사각형의 큐브로 변해 버린 화살이 뱀의 머리를 꿰뚫었다.
두꺼운 가죽은 물론이고 단단한 살점을 푸딩처럼 찢어내며 끝내 뇌에 도달.
극도로 압축된 마력과 접촉한 돌연변이 뱀의 뇌는 반듯하게 썰려 버렸다.
쿵!
쓰러진 뱀의 머리에는 정육면체의 모서리 모양으로 뇌를 도려낸 상처만이 남았다.
공격이 닿기 전 가까스로 뒤로 대피하는 데 성공한 리우스는 침음을 흘렸다.
고작 한 발의 화살일 뿐이었으나 도저히 얕볼 수 있는 위력이 아니었다.
“거기 딱 기다려.”
샤라라라!
작은 알갱이 같은 마력의 입자가 활로 모여들었다.
조금 전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뭉쳐지는 마력.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팅!
민유리가 잡아당기고 있던 활시위가 그만 끊어져 버렸다.
몬스터의 거미줄로 제작된 아티팩트가 끝도 없이 흘러나오는 민유리의 마력을 버티지 못한 것이었다.
집중력이 깨져 버린 그녀의 마력은 전부 공기 중으로 흩뿌려졌다.
“읏!”
전투 중에 활이 망가지는 건 처음 겪는 일.
순간적으로 당황한 민유리는 무기의 도움 없이 마력을 뽑아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맨손으로는 얇은 막대기와 구겨진 덩어리 외의 형태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오랜 시간 활이라는 무기에 적응한 영웅이 제대로 된 장비 없이 실력을 보이기란 쉽지 않았다.
‘문제가 생겼나. 다행스럽게도.’
민유리가 허둥거리자 리우스는 뇌가 터져 죽은 뱀의 몸으로 손바닥을 가져갔다.
평소 먹는 양이 많고 크기도 커서 여러 말썽을 일으켰던 몬스터가 이렇게 허무하게 가 버릴 줄이야.
하지만 너무 안타까워하지는 않았다.
위협적인 공격을 막아 냈으니 나름대로 제 역할을 하고 떠난 것이리라.
“감히 내 앞에서 한눈을 팔아?”
쾅!
리우스를 노렸던 김현태의 공격은 허공을 갈랐다.
실체가 아니라 환각을 베어냈기 때문이었다.
뒤이어 이세계인들이 김현태를 향해 마법을 쏟아냈다.
[미스틱 일루전]
[임파서블 드림]
[화이트 라이]
“……!”
이세계인들을 노려보던 김현태가 자리에 멈춰섰다.
마치 캄캄한 어둠 속에 들어온 것처럼 크게 확대되는 그의 동공.
그의 뇌는 그가 눈으로 보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강력한 최면과 환각에 빠져든 것이었다.
“현태야! 뭐해!”
“형님! 정신 차리세요!”
파티원들의 외침에도 김현태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저건?’
유지한의 시야에 김현태의 머리와 이어지는 얇은 실 같은 것이 보였다.
여수 원정대가 열차를 타고 내려오던 중 공간 왜곡에 휘말렸을 때.
그에게 길을 안내해주었던 실과 똑같이 생긴 물체였다.
—한 대 때려!
실프의 조언에 감을 잡은 유지한이 김현태에게 달려갔다.
빡!
펼친 손바닥으로 뒤통수를 세게 후려갈기자, 김현태의 고개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때리는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지켜보던 이미아마저 몸을 움찔거릴 정도였다.
“헛!”
유지한에게 얻어맞은 김현태는 순식간에 정신을 되찾았다.
잠깐 불쾌한 꿈을 꾸고 온 듯한 기분이었다.
뒤통수가 얼얼한 것이 무언가 잘못된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말이다.
“황준호! 김현태는 내가 맡을 테니까 내 파티원들을 지켜 줘.”
“지켜 달라고?”
“네가 진짜 ‘탱커’라면 내 부탁을 들어줘야 할 거야.”
비상 상황이 발생했을 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먼저 보호하는 건 탱커의 기본 덕목.
그에 따라 유지한은 황준호에게 파티원들을 지켜 달라는 요청을 보냈다.
“……알겠어.”
황준호는 별다른 불만 없이 방패를 들고서 김시후와 이동길의 앞으로 섰다.
여기서 유지한의 요청을 거부하는 건 전혀 이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김현태에게 붙는다고 한들 이세계인들의 환각 마법을 돌파할 자신도 없었다.
‘저거면 버틸 수 있겠지.’
유지한과 김현태를 제외한 모든 파티원들은 서로 가깝게 붙었다.
탱커인 황준호가 먼저 나서면서 어설프게나마 협력이 이뤄지는 모양새였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칠라가 전투 불능이 되고 민유리는 활이 망가졌을뿐더러 김시후도 마력이 넉넉지 않으니.
그들끼리 붙어있는 게 도움이 될 터였다.
김현태는 유지한을 보며 으르렁댔다.
“유지한. 무슨 생각이냐.”
“무슨 생각이긴. 저거 안 보여?”
한반도의 땅끝까지 이주해 온 이세계인들.
그들을 앞에 두고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앞에 있는 놈들부터 처리해. 너무 깊게 들어가지 말고.”
“나한테 명령하지 말라고 했어.”
샤아아—
이세계인들과 대치하는 두 사람의 검에 타오르는 듯한 오러가 서렸다.
같은 파티였을 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장면.
이내 자세를 잡은 두 명의 전사가 앞으로 뛰쳐나갔다.
“이미아! 옆쪽을 맡아 줘!”
“알겠어.”
콰앙!
유지한의 요청으로 전선으로 뛰어든 이미아는 살아남은 몬스터에게 주먹을 꽂아 넣었다.
공격에 얻어맞은 몬스터의 살덩이에는 하나같이 주먹 모양의 자국이 움푹 패였다.
홀로 움직이더라도 항상 기대 이상의 성과를 가져오는 믿음직한 동료.
그 덕분에 유지한은 예정대로 김현태와 함께 행동할 수 있었다.
“전부 다 죽여 버리겠어!”
[광룡의 질주]
돌진기를 사용하며 거침없이 질주하는 김현태.
[에어 러쉬]
비슷한 형식의 돌진기를 사용한 유지한이 그 뒤로 바짝 따라붙었다.
그리고 이세계인들이 환각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빡!
김현태의 뒤통수를 후려쳐 정신을 차리게끔 했다.
빡! 빡! 빡! 빡! 빡!
머리 위로 하얗게 빛나는 실이 생겨날 때마다.
김현태의 뒤통수에서는 시원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너무 재밌는데?’
김현태의 머리를 때리는 유지한의 한쪽 입꼬리가 연신 씰룩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이놈을 대놓고 때릴 기회가 얼마나 있겠는가.
풀스윙을 날리면서도 다치지는 않을까, 라는 걱정은 전혀 없었다.
김현태의 몸이 얼마나 튼튼한지는 유지한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덕분이었다.
“어이쿠.”
그때 뒷머리에서 김현태의 머리칼이 한 움큼 빠져나왔다.
데뷔 초부터 그가 탈모를 열심히 관리했던 만큼 이것만은 조심해야겠다 싶었다.
“젠장! 달려들어!”
“우아아아!”
이세계인들은 두 사람을 노리고 달라붙었다.
환각으로는 도저히 막아 낼 수 없었기에 직접 나서는 분위기였다.
“잡놈들은 꺼져!”
꽈드드득!
위에서 아래로 크게 휘둘러진 대검이 이세계인의 몸을 탑승한 몬스터와 함께 두 동강 냈다.
시뻘건 피와 조각난 덩어리가 주위로 흩뿌려지자 김현태는 기세등등한 얼굴을 했다.
[루어 오브 브리즈]
옆에서는 실프가 달려드는 적들의 발을 묶은 뒤 유지한이 놈들의 목숨을 끊어 냈다.
정확하게 적의 심장 또는 취약 부위만을 신속하게 베어내는 유지한의 검은.
각각의 공격마다 전혀 다른 생명체의 피를 검날에 묻혔다.
—팡팡 터져라!
팡! 파바방!
이세계인들이 단체로 몰려들더라도 당황하는 일은 없었다.
실프가 일으키는 바람을 통해 그들이 의도한 진형을 와르르 무너뜨린 뒤.
이어지는 유지한의 검격은 그야말로 적들에게 커다란 공포로 다가왔다.
‘저 새끼한테 절대로 질 수 없어!’
김현태는 함께 공격에 나선 유지한을 자신의 경쟁자로 취급했다.
그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대검을 계속 휘두르다 보니.
시체가 쌓여 가는 바닥에는 한시라도 피가 마를 일이 없었다.
‘그래. 어쩌면 이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유지한은 자신의 싸움에 집중하면서도 김현태를 지속적으로 커버했다.
끊임없이 투덜거리고 비협조적인 그를 유지한이 꾸역꾸역 땅끝까지 데려온 이유.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김현태라는 전사를 세상에서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그가 가장 싫어하는 유지한이기 때문이었다.
김현태가 선호하는 공격 또는 전투 방식이나 반복되는 움직임부터 작은 습관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걸 파악하고 있는 유지한은 사실상 그가 가진 최대의 가능성을 끄집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서걱!
한 파티에서 다년간의 호흡으로 완성된 유지한의 흔들림 없는 서포팅.
거기에 서포터를 때려치운 그에게 바람의 정령과 공격적인 성향까지 더해진 것으로.
이 자리에 무서운 파괴력을 갖춘 전사 듀오가 탄생했다.
‘……정말 강하다. 이 말밖에 할 수가 없어.’
김현태 파티의 카메라맨은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광경을 보며 그야말로 혀를 내둘렀다.
거칠면서도 시원시원한 김현태의 전투는 익히 알려진 대로 짜릿함을 선사했지만.
유지한이라는 영웅이 그에게 전혀 밀리지 않을 정도로.
혹은 뛰어넘을 정도로 활약하는 것이 매우 놀라웠다.
무엇보다 서로 너무 다른 성향을 가진 듯한 두 사람이 이렇게나 조화롭게 어우러진다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저, 저게 어떻게 된 거지?”
“내가 알던 그 유지한이 아닌데?!”
옛 동료들은 유지한이 딜러로서 나온 전투를 직접 지켜보는 건 처음이었기에.
그가 경악할 정도의 전투력을 선보이자 그저 입을 벌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현장에서 내가 맡은 역할에만 신경 쓰면서 그를 무시하던 때와는 체감되는 게 너무 달랐다.
‘이게 형의 진짜 실력이구나.’
꽈악!
눈으로 유지한을 쫓던 김시후는 분한 듯 주먹을 말아쥐었다.
김현태와 유지한의 조합에서 커다란 벽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7년이라는 벽은 아직 뛰어넘을 수 없는 건가.’
마법으로 파티에 화력을 더해 줄 수는 있겠지만.
유지한의 잠재력을 모두 끌어내지 못했다는 것이.
김시후로서는 안타까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