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땅끝에서
김현태가 평생을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모욕.
심지어 그 말을 하는 사람이 그 유지한이라니.
뚝!
김현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인내심의 끈이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하, 하하하! 그래, 답답한 새끼라…….”
검을 땅에 꽂아 둔 채로 유지한에게 저벅저벅 걸어가는 김현태.
입가에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이 걸려 있었다.
“멈춰.”
이미아는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김현태는 이미아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말했다.
“비켜!”
“이건 누가 봐도 네 잘못이야.”
“이 썅년아! 너 대체 누구의 파티원이야!”
유지한과 김현태의 대립이 애꿎은 이미아에게 번지는 분위기.
보다 못한 황준호와 임시연까지 달려와 상황을 중재했다.
“워워, 여기까지만 하자.”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잖아.”
“형님! 그러지 말고 아예 박살을 내버립……!”
“넌 조용히 해.”
“읍읍!”
“…….”
김강우는 싸움을 말리기는커녕 부추기려고 했지만.
그 외 다른 파티원들의 만류에 김현태는 결국 행동을 멈췄다.
그러면서도 눈동자는 열심히 유지한을 쫓고 있었다.
‘이건 글렀군.’
유지한은 더는 김현태 파티와 함께할 수 없다는 걸 느꼈다.
파티장 사이에 신뢰 관계가 완전히 깨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김현태가 해남 원정대를 동원해 준 건 고마운 일이지만.
현 상태로 함께 움직이는 건 서로에게 부담이 될 터.
“정 불만이면 동행은 여기까지만 해.”
“아니.”
“……?”
“우리는 예정대로 땅끝으로 이동한다. 네 멋대로 모든 걸 끝내려고 하지 마.”
하지만 김현태는 끝까지 계획대로 이동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를 말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유지한은 딱히 반대하지 않았다.
“그럼 10분 뒤에 출발한다.”
“…….”
거리를 두고 멀어지는 김현태에게 출발 소식을 전한 뒤.
유지한은 뒤에 있는 제리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꺄! 나는 역시 자기를 믿고 있었다고……!”
“이게 전부 너희 때문이잖아.”
“보답으로 내가 키스해 줄게. 츄~”
꽝!
유지한은 키스 대신 제리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
“제리! 조금이라도 몬스터를 조종하는 낌새가 있으면 바로 죽이겠어.”
“사로잡힌 주제에 양심이 있어야지. 절대 안 그럴 거야.”
갑자기 벌어졌던 소란을 뒤로하고.
휴식을 마친 유지한 일행은 다시 땅끝으로 향했다.
조금 달라진 점이라면 두 파티 사이의 거리가 약 10m 정도 늘어났다는 것이었다.
김현태와 유지한의 마음의 거리는 못 해도 100m 이상 늘어났을 터.
“시후야. 마력은?”
“음……. 단기간에 회복하는 건 힘들 것 같아요.”
“구체적으로는 얼마나 남은 건데?”
“큰 마법을 딱 2번 사용할 정도로요. 목적지에 도달할 즈음엔 3번 정도는 가능하려나.”
모기를 때려잡은 거인의 손을 소환한 대가로 김시후의 마력은 대부분 소모됐다.
이 뒤에 발생할 전투에서 마법사의 역할을 기대하기 힘들어진 셈이었다.
“내 마력이라도 나눠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민유리는 자신의 넘쳐나는 마력을 김시후에게 주고 싶었지만.
개인 간에 성질이 다른 마력을 주고받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칠라에게서 절대로 떨어지지 마.”
“찍찍!”
최대한 수비적으로 움직이게 된 김시후.
파티에 남은 딜러는 민유리와 유지한뿐인 덕분에.
뒤에서 아직 김현태 파티가 따라온다는 것이 묘하게 달갑기도 했다.
‘조용하군.’
김현태는 아까처럼 맨 앞에서 이동하겠다고 고집부리지 않았다.
그저 뒤에서 유지한을 강하게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유지한은 그를 무시하고 앞으로만 걸었다.
“정지.”
약 40분 정도를 더 이동했을 무렵.
일행은 한반도의 끝자락인 땅끝마을에 도착했다.
조금 더 강해진 짠내음은 다시금 바다 가까이에 도달했다는 증거였다.
유지한은 혹시 모를 감시를 피하고자 건물이 몰려 있는 지역을 피해서 움직였다.
“으읍!”
민유리의 젤리로 입이 봉쇄된 제리는 무언가 말할 게 있다는 듯 버둥거렸다.
그에 유지한은 빽빽한 나무들 사이에서 그녀의 입을 잠시 풀어주었다.
“따로 할 말이라도?”
“내 동료들을 찾는 거지? 여기서부터는 내가 길을 잘 알아.”
“그래서?”
“자기가 원한다면 알려 줄게. 그 대신 아주 작은 대가만 주면 되는데!”
유지한을 바라보는 제리는 붉은 혀로 입술을 핥짝거렸다.
도대체 몇 번째인지 모를 키스 요구였다.
“필요 없어.”
“우아악! 잠깐만!”
유지한은 그녀의 제안을 냉정하게 거절했다.
다시금 입을 틀어막으려고 하자 제리는 기겁하며 말했다.
“어디에 숨어 있는지는 자기도 모를 거 아니야!”
“아니. 알고 있어.”
“엥?”
“그뿐만 아니라 너희가 1급 영웅들을 어디로 보내 버렸는지도 알아.”
“……거, 거짓말하지 마.”
거짓말이라는 그녀의 주장에 유지한은 짧게 대답했다.
“카를렘.”
“헉?!”
“할 말 끝났지?”
허세라기에는 강한 확신이 담겨 있는 말투.
다시금 입이 봉쇄된 제리는 뜨악한 얼굴로 유지한을 올려다봤다.
‘대체 어떻게?’
여기서 이세계의 이름을 언급하는 의도는 딱 하나뿐이다.
이 남자는 대체 어떻게 이런 정보를 얻었단 말인가.
‘설마, 아까 눈을 감았던 건……!’
제리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탄식했다.
지구인들은 물론이고 같은 이세계인도 알지 못하도록 정보 보안에 심혈을 기울였음에도.
한국의 원정대가 각종 은신처와 엘리트를 계속 파헤치며 쫓아다닐 수 있었던 이유.
‘우리 자기 때문이었구나.’
그 이유가 바로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유지한이 그저 솜씨 좋은 영웅인 것뿐만 아니라.
이세계인에게서 정보를 캐내는 역할까지 맡고 있었다는 걸 눈치챈 것이었다.
“읍! 읍!”
유지한은 더 말하고 싶어 하는 제리를 무시했다.
이내 일행이 은밀하게 도착한 장소는 땅끝마을에 존재하는 전망대의 근처.
“네가 말한 목적지가 여기냐?”
“그래.”
“카메라. 준비해.”
“……?”
유지한이 고개를 갸웃거리던 순간.
카메라맨에게 지시를 내린 김현태가 폼나게 대검을 잡고서 허리를 한껏 비틀었다.
지이잉—
그의 검으로 몰려드는 강력한 오러의 기운.
유지한은 설마 했지만, 김현태는 그 기대에 보답하듯.
전망대를 향해 검을 크게 휘둘렀다.
“흐아아압!!”
[광룡의 채찍]
콰아아아아앙——!
용이 기다란 꼬리를 휘두르듯 가로로 깔끔하게 그어진 공격.
오러가 한껏 담긴 스킬로 인해 전망대의 1층이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
바닥의 지지대가 사라져 버린 건물은 2층부터 아래로 무너져내렸다.
쨍그랑! 쨍그랑!
쿠구구구궁!
와르르 깨져 버리는 벽면의 유리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너지는 건물.
유지한은 그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몸을 피했다.
곧 바닥에서 커다란 먼지구름이 피어오르면서 모두의 시야를 가렸다.
“후아! 시원하군.”
김현태는 아주 후련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건물을 쓰러뜨림으로써 쌓여있던 스트레스를 조금이나마 날려 버린 것이었다.
“읍!! 읍?!”
“…….”
파티원들은 물론이고 제리조차 황당함을 감추지 못할 정도의 행동.
놀란 제리가 발버둥 치고, 유지한은 말을 잇지 못했다.
설마 전망대를 날려 버릴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전망대 3층이었는데…….’
은신처, 공간 왜곡의 입구가 숨겨진 장소는 전망대의 3층 부근.
하지만 전망대가 통째로 날아가 버렸으니.
유지한은 떨어진 거리에서 먼지구름이 걷히기만을 기다렸다.
“저기 있다.”
대략 3층의 높이에서 기묘한 마력이 느껴지는 곳.
틀림없는 공간 왜곡의 입구였다.
“끄르르륵…….”
한편, 무너진 건물 사이에는 전망대로 나와 있던 이세계인 몇 명이 쓰러져 있었다.
김현태는 그들의 가슴에 커다란 대검을 꽂아 넣으며 마무리 공격을 가했다.
유지한은 그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멀쩡한 건물을 왜 부수는 거야.”
“그 덕분에 귀찮게 찾아다닐 필요가 없어졌지.”
“정확한 위치는 이미 알고 있었어. 안에 시민들이 있었으면 어쩌려고.”
“없으면 된 거 아니냐? 시끄럽게 쫑알쫑알 쪼아대지 마.”
푸욱!
이세계인의 목숨을 끊던 김현태의 손등으로 붉은 핏방울이 튀어 올랐다.
그는 마치 더러운 것이 묻었다는 듯이 피를 툭툭 털어 냈다.
그런데 그때였다.
“어지간히 미친놈이로군.”
“……!”
“……!”
유지한과 김현태는 거의 동시에 고개를 위로 들었다.
돌연변이로 보이는 거대한 뱀의 머리 위에 탑승한 리우스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공간 왜곡의 입구에서 빠져나오는 뱀의 몸에 타고 있는 건 이세계인의 행렬.
유지한이 여수부터 추격해 왔던 엘리트의 집단이었다.
“영욱아!”
김시후는 어느 여성의 손에 붙잡힌 정영욱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팔다리가 속박된 것은 물론이고 두 눈마저 안대로 가려진 정영욱은 그 목소리를 듣고서 몸을 움찔거렸다.
유지한은 그를 아주 자세히 관찰했다.
여수에서 배를 타고 달아나던 때와 다르게 환각으로 만들어진 가짜 정영욱은 아닌 듯했다.
“제리! 네가 또 사고를 치는구나.”
“읍! 읍읍읍읍.”
“변명 따위는 필요 없어. 넌 이 시간부터 엘리트에서 추방이다.”
“흐흥! 읍읍읍읍…….”
집단에서 추방되었다는 것에 제리는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뒤이어 리우스가 유지한을 노려보았다.
“유지한이라고 했던가. ……역시 전부 네가 문제였어.”
“찾아내느라 힘들었다. 리우스.”
“해남에 오기 전에 널 죽였어야만 했는데!”
“무슨 수로? 쭉 도망치기 바빴으면서.”
리우스가 조용히 화를 내자 유지한은 피식하고 웃었다.
상대측에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보아 기껏 멀리까지 찾아온 의미가 있었다.
“김현태. 아직 움직이지 마.”
“나한테 명령하지 마라.”
유지한은 대화를 무시하고 뛰쳐나가려는 김현태를 만류했다.
리우스는 묶여 있는 제리와 임민수를 힐끗거렸다.
“저들은 왜 살려 둔 거지?”
“인질 교환을 요청한다.”
“인질이라면, 저 마법사 말인가?”
“그래.”
정영욱에게 시선을 둔 채 고심하는 리우스.
이내 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데려가라.”
“구구구!”
“……!”
어디선가 등장한 괴둘기 한 마리가 발로 정영욱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는 칠라의 위로 날아가서 떨어뜨렸다.
“찍!”
칠라는 떨어지는 정영욱의 몸을 잽싸게 낚아챘다.
‘이렇게 그냥 보내 준다고?’
양쪽의 인질을 동시에 교환하는 것도 아니고.
정영욱을 선뜻 먼저 보내 주는 모습에 유지한은 조금 당황했다.
“이제 두 사람을 이쪽으로 넘겨주면 되겠군.”
“…….”
“왜? 싫은가?”
“대체 무슨 꿍꿍이냐.”
“꿍꿍이라니? 달라고 해서 준 것뿐인데.”
“해독제는?”
“이미 먹였다.”
평범한 베개를 정영욱으로 속이면서까지 그를 납치해 갔던 놈들이.
이제 와서 태도를 바꿔 순순히 그를 넘겨준다니.
뭔가 이유가 있지 않고서야 그럴 리 없었다.
“동길아. 잠깐 확인해 줘.”
“알았어.”
힐러 이동길은 칠라에게 등을 기댄 정영욱에게 다가갔다.
안대와 입을 틀어막은 끈적한 테이프를 뜯어내고, 팔다리의 속박을 하나씩 제거했다.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꿉꿉한 체취는 이동길로 하여금 그가 겪은 고생을 느끼게끔 했다.
“어디 다친 데 없어요?”
“……딱히.”
정수리부터 발끝에 이르기까지.
정영욱의 몸은 전체적으로 야위긴 했으나 자잘한 상처들을 제외하면 크게 상한 부위가 없었다.
그때 힘없이 고개를 내리고 있던 정영욱이 김시후를 불렀다.
“김시후.”
“응?”
“나……. ……어.”
정영욱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어물거렸다.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김시후가 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나는…….”
“조금만 더 크게…….”
“나는 네가 정말 싫어!”
“……!”
“개 엿같은 엘프 같으니! 너만 없었어도 나는……!”
확 커져 버린 정영욱의 목소리.
난데없는 분노의 외침에 김시후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 순간.
푸화아아악—!
정영욱의 눈, 코, 입과 귀에서 검은색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