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땅끝으로 (7)
“그, 그러면 한 번만 꽉 안아 줘. 내가 아예 숨을 못 쉴 정도로!”
“그것도 기각.”
“아니면 내 엉덩이를…….”
“아줌마 엉덩이에는 관심 없어.”
“한번 만져 보면 그런 생각은 쏙 들어갈걸?”
제리는 유지한이 평생 듣도 보도 못한 요청을 해 왔다.
옆에서 듣고 있던 이동길과 김시후마저 당황시킬 정도의 요청들.
유지한은 그 모든 걸 거절하며 말했다.
“넌 진짜 제정신이 아니구나.”
“난 충분히 제정신인데!”
죽음을 예감한 순간에 부탁하는 게 이런 사소한 것들이라니.
농담이나 장난을 치는 건 아닌 것 같았고.
그녀가 정말 진심으로 원하는 행동인 것 같았다.
“왜 그렇게 빤히 바라봐? 내가 너무 예뻐?”
시선을 느낀 제리가 손으로 자신의 가슴 부근을 가렸다.
끝까지 뻔뻔하게 행동하는 걸 보면 분명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성격이리라.
유지한은 짧게 혀를 차며 말했다.
“안타깝게도 넌 여기서 안 죽어.”
“어? 왜?”
“여수에서 사로잡힌 영웅과 널 교환할 거다.”
유지한은 이세계인들로부터 정영욱을 돌려받는 대가로 제리를 넘겨줄 생각이었다.
서로 간에 사로잡은 인질을 교환하는 조건이라면.
무리를 이끄는 역할을 맡았던 리우스라는 놈도 쉽게 거부할 수 없을 터였다.
아제시아에서 함께 넘어온 인간들 사이에는 끈끈한 동료애가 있는 모양이었으니까.
“아하! 그 남자 마법사 말이야?”
“너, 그 마법사를 봤어?!”
“봤지. 만나서 이야기도 했는걸.”
“영욱이 생명에 지장은 없는 거겠지?”
“죽지는 않았어. 따로 관리하고 있었으니까 아직 살아 있을 거야.”
정영욱의 생존을 순순히 인정하는 제리였다.
김시후는 그가 무사하다는 말에 속으로 안도했다.
“그 말이 거짓말이라면 각오해야 할 거야.”
“……네가 아까 그 마법을 사용한 마법사구나.”
제리의 눈동자가 신기한 걸 발견한 사람처럼 빛을 냈다.
“우리 자기 옆에 덤으로 붙어있는 영웅인 줄 알았는데, 설마 이런 힘을 숨기고 있을 줄은 몰랐어.”
“네 칭찬은 별로 듣고 싶지 않아.”
“왜? 칭찬은 언제나 좋은 거잖아.”
“무고한 인간을 살해하는 주제에 그딴 말 하지 마!”
“엥? 난 아무도 안 죽였는걸.”
“……?”
제리의 대답에 유지한과 김시후는 순간 벙쪘다.
저 미친년이 살인을 하지 않았다는 게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하지만 제리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말했다.
“난 살인은 안 해. 인간의 시체는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거짓말.”
“거짓말 아니야.”
“그러면 그때 공항에서 떨어뜨렸던 피 묻은 장비는 다 뭐야!”
“걔네 다 살아 있어. 기절시키고 장비만 벗겨 놓은 거지. 아마 진작에 깨어나서 도망쳤을걸.”
“네가 직접 죽였다고 말했잖아.”
“그거야 너희를 도발하기 위해서였지. 반응이 재밌을 것 같았거든. 실제로도 그랬고.”
“저기 바닥에 떨어진 머리들은……!”
“내 옆 사람이 죽인 거야.”
태어난 순간부터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죽여 본 적이 없다는 제리.
김시후가 말문이 막힌 가운데, 유지한이 말했다.
“네 말이 전부 맞다고 치더라도 넌 옆에서 살인을 방관했잖아.”
“그건 그래.”
“너도 그들과 전혀 다를 바 없어.”
제리는 할 말이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시후야.”
“네.”
“이 사람 마력도 뽑을 수 있겠어?”
“아직 그 정도는 할 수 있어요.”
김시후는 제리의 한쪽 어깨를 붙잡고 마력을 추출했다.
유지한은 그동안 제리가 고개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었다.
“오우……! 이건 상당히 새로운 감각이네.”
“움직이지 마.”
“에이, 기왕 살려 줄 거면 조금만 더 부드럽게 다뤄 줘.”
제리는 유지한의 손바닥에 자신의 머리를 부볐다.
조금이라도 더 그에게 접촉하려는 듯한 행동이었다.
심지어 붉은 혀를 내밀어 손을 날름 핥으려 들었기에.
유지한은 힘을 주어 고개를 단단하게 고정시켰다.
‘인간이 아니라 짐승을 보는 것 같군.’
이성이 아니라 자신의 본능에 충실한 부류.
처음 대화를 나눴을 때부터 느낀 것이지만.
유지한은 제리라는 인간이 자신과 정반대의 인간이라고 느꼈다.
“끝났어요.”
“앗! 놓지 말고 조금만 더 만져 줘!”
“시끄럽다.”
꽝!
제리의 머리에 꿀밤을 먹인 유지한은 김시후로부터 마석을 전달받았다.
이세계인 사이에서도 따로 선발된 엘리트.
그 엘리트 중에서도 상당한 중요 인물에 해당하는 제리.
그녀의 기억 속에는 분명히 쓸만한 정보가 존재하겠지.
“가자.”
—냠냠!
실프가 마석을 섭취하자 유지한의 시야에 새까만 어둠이 찾아왔다.
그리고 약 5초쯤 흘렀을까.
주변이 환하게 밝아지며 낯선 풍경이 찾아왔다.
‘여긴…….’
제리가 한 무리의 영웅들과 전투를 치르는 상황.
몬스터의 합공에 조금씩 밀려난 영웅들은 결국 큰 충격을 받고 기절해 버렸다.
당장이라도 몬스터들의 먹잇감이 되어 버릴 듯한 영웅들.
하지만 몬스터들은 영웅들을 먹어치우지 않고 그들의 장비를 벗겨서 각자의 등에 실었다.
전부 공항에서 제리가 떨어뜨린 주사위 길드원들의 장비였다.
‘살인을 하지 않는다는 건 진짜였나.’
유지한이 확인을 끝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실프는 그에게 다른 장면을 보여 주었다.
—1급 영웅들을 보내 버린 건 확실한 거예요?
—그래! 대장님의 작전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실종된 영웅들과 관련된 기억이었다.
*****
“조금 어때요?”
“현기증은 많이 줄어들었어요.”
[힐링]
[리프레쉬]
[홀리 미스트]
이동길은 김시후에게 각종 치유 마법을 사용했다.
신체 회복 속도를 증가시키는 것부터 불안한 감정을 걷어주는 마법까지.
치유 마법을 세트로 받은 김시후는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시후야!”
“앗, 유리 누나!”
그때 민유리가 칠라와 함께 김시후를 향해 달려왔다.
그녀의 뒤에는 모기떼로부터 달아났던 김현태 파티가 따라오고 있었다.
전투에서 성공적으로 승리했음을 전하고 데려온 것이었다.
“정말로 전부 죽였군.”
“아까 허공에 등장했던 마법인가?”
“고유 마법이 틀림없어. 대체 어떻게 그런 마법을……!”
김현태 파티는 바닥에 죽어 있는 몬스터들을 내려다보며 수군거렸다.
모기 사체는 어찌나 많은지, 앞으로 걸을 때마다 신발에 최소 10마리가 넘게 짓밟히고 있었다.
“아니, 저건!”
파티의 선두로 이동하던 김현태는 눈을 크게 떴다.
움직이지 못하도록 속박된 제리와 임민수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놈들이잖아!”
“아직 살아 있었네?”
유지한이 적들을 살려 뒀다는 사실에 임시연이나 황준호는 의문을 가졌다.
까드득!
김현태는 소리 나게 이빨을 갈았다.
고작 모기라는 하찮은 동물을 이용해서 그의 자존심에 커다란 스크래치를 새겨놓은 놈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카메라!”
“네?”
“날 찍어!”
카메라맨에게 촬영 지시를 내린 김현태가 앞으로 뛰쳐나갔다.
유지한이 무슨 이유로 두 사람을 살려 둔 것인지는 몰라도.
저놈들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김현태! 거기 멈춰!”
흠칫 놀란 이미아가 황급히 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광룡의 질주]
콰과과과과!
지진이 발생한 것처럼 흔들리는 땅.
김현태가 발로 밟는 자리마다 바닥에 균열이 생겨나며 먼지구름이 일어났다.
‘죽인다!’
그는 아직 피가 흐르는 몬스터들의 사체를 대검으로 날려 버리며.
묶여 있는 제리와 임민수를 향해 일직선으로 돌진했다.
“어어? 저 사람 지금 뭐 하는 거야?”
“찍?!”
빠르게 가까워지는 김현태를 두고서 모두가 당황했다.
오로지 그의 타겟이 된 제리만이 태연하게 말했다.
“저거 날 죽일 생각이네.”
“뭐라고?”
“우리 자기는 언제쯤 깨어나는 거야?”
유지한이 기억을 들여다보는 시간은 평소보다 길어지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파티원들이 대신 나섰다.
“멈추세요!”
“찍찍!!”
방패를 들고 김현태의 앞을 막아서는 칠라.
하지만 김현태는 칠라를 가볍게 무시하며 위로 높게 뛰어올랐다.
“다치기 싫으면 너희 전부 꺼져!”
[메테오 스매시]
김현태와 그의 대검이 위에서 아래로 운석처럼 떨어져 내라며 제리를 노렸다.
기겁한 김시후와 이동길이 빠르게 자리를 피하는 가운데.
위를 올려다보는 제리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죽기 전에 키스라도 받아 보고 싶었는데…….”
이윽고 대검의 날이 제리의 몸에 닿기 직전.
콰아아아아앙——!!
커다란 충돌음과 함께 강력한 충격파가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바로 근처에 있었던 이동길과 김시후는 그로 인해 피부가 파르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공격에 휘말렸다면 틀림없이 몸이 터져 버렸을 위력.
하지만 주변으로 충격이 분산되었다는 건.
누군가가 공격을 받아쳤다는 것.
“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유지한……!”
제리의 앞에서 공격을 막아 낸 것은 유지한이었다.
자신의 공격이 막혀버린 것에 김현태는 크게 분노했지만.
유지한은 그에 맞서듯 검에 힘을 실었다.
카가가각!!
서로 맞댄 2개의 검 사이에서 힘겨루기가 이어지며 거친 마찰음이 발생했다.
그러자 김현태는 눈을 부릅뜨며 경악했다.
‘저놈이 내 힘을 버틸 수 있다고? 유지한 주제에?’
1급 영웅과는 직접 싸워 본 적이 없지만.
신체 능력으로 그 어떤 영웅에게 꿇리지 않을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김현태였다.
그런데 ‘그 유지한’이 정면에서 밀려나지 않는다는 건.
또다시 김현태의 자존심에 작은 상처를 만들어냈다.
“당장 내 앞에서 비켜.”
“너야말로 뒤로 물러나라.”
두 사람 사이에서 신경전이 벌어졌다.
날 선 분위기가 그들을 감싸는 가운데.
“두 사람 다 멈추지 못해?”
다가온 이미아의 중재 덕분에 두 사람의 대치가 중단되었다.
유지한은 먼저 검을 회수하면서 생각했다.
‘크으, 저 무식한 힘은 여전하군.’
검을 쥐고 있던 손목에서 저릿저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몸에 버프를 두르지 않았더라면 훨씬 쉽게 밀려 버렸으리라.
역시 그가 기억하는 영웅 김현태다운 힘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더 버틸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다른 것보다 검날이 부서질 듯 비명을 질러 댔기 때문이었다.
‘최상급 아티팩트와 맞서기엔 무리다.’
수준 높은 장인이 질 좋은 재료로 직접 제작한 김현태의 대검.
무식하게 큰 검의 크기처럼 높은 파괴력과 내구도를 보유한 무기였다.
김현태가 그 무기로 이뤄 낸 결과들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기에 알 수 있었다.
남호열이 제작한 검이 같은 아티팩트로 분류되긴 해도 질적 차이가 크다는 걸.
팍!
검을 땅바닥에 꽂아 넣은 김현태는 손으로 제리를 가리켰다.
“왜 저 쓰레기들을 죽이지 않는 거지? 내가 오해하지 않도록 제대로 설명해야 할 거다.”
“여수에서 사로잡힌 영웅이 있어. 그 사람과 교환할 거야.”
인질이 있다는 말에 곧바로 입을 다무는 김현태였다.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어떤 의도였는지는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에 유지한이 양쪽 눈을 좁히며 말했다.
“적을 제압하고 살려 뒀으면 뭐든 간에 그 이유가 있지 않겠어?”
“네가 저놈들과 한패일 수도 있으니까…….”
“그건 아무런 근거조차 없는 네 망상이잖아.”
“…….”
“무엇보다 부리나케 도망갔다가 뒤늦게 돌아와서 이미 제압된 적을 죽이려 드는 건, 조금 부끄럽지 않냐?”
“닥쳐!”
유지한이 행동을 지적하자 김현태는 얼굴을 붉혔다.
“네 주제에 날 모욕하지 마!”
“나는 안 하고 싶은데 네가 하게 만드네.”
“너 이 자식……!”
“내가 7년이나 네 밑에서 참아 줬으니까 넌 지금도 날 네 아래로 보겠지. 사실 난 그런 거 딱히 신경 안 써. 그런데…….”
유지한은 검지손가락으로 자신의 옆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머리가 달려 있으면 제발 생각이라는 걸 하고 행동하자고. 이 답답한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