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땅끝으로 (6)
하늘을 바라보던 유지한은 마른 침을 삼켰다.
강인한 바바리안들을 고깃덩이로 만들어 버렸던 거대한 손바닥.
그 손바닥을 내보냈던 의문의 타원이 다시금 하늘에 생성되고 있었다.
‘상태는 안정적이야.’
마법을 사용 중인 김시후의 상태는 상당히 안정적이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던 그때와는 사뭇 달랐다.
“설마…….”
“찍, 찍찍찍!”
유지한과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민유리와 칠라 또한 마법을 알아보았다.
모두가 잔뜩 긴장감을 갖고 지켜보는 가운데.
김시후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집중하자, 집중.’
무의식 상태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사용한 뒤.
제대로 터득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해 온 엘프의 마법.
원정에 참여하던 도중에도 머릿속으로는 틈틈이 그 마법에 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직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지 못했지만.
‘작은 실마리는 얻었다고!’
전신의 마력이 팔에 집중되고, 손바닥에 쥔 나무 지팡이를 타고 빠져나가는 대량의 마력.
마력을 아끼고 효율적으로 사용했던 것이 마치 이때만을 위해서였던 것처럼.
김시후는 아주 과감하게 마력을 쏟아부었다.
“너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같은 마법사인 임시연은 주변에서 요동치는 마력을 느끼고 버럭 소리 질렀다.
그녀에게도 지금의 마법이 매우 낯설게 느껴진 탓이었다.
파앗!
땀을 뻘뻘 흘리는 김시후가 끝내 하늘에 동그란 타원을 생성해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만들어 낸 결과물을 보며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젠장할!’
타원의 크기는 그가 원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작았다.
백화점에서 생성한 것과 비교하면 10분의 1, 혹은 그에 훨씬 못 미칠 것 같았다.
심지어 테두리를 이루는 나뭇가지는 그야말로 앙상했고 초록색 풀은 벌레가 파먹은 듯 시들시들했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지만, 지금으로서는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조금만 더!’
김시후는 포기하지 않고 마법에 집중했다.
귀로 들려오던 소음들이 점점 멀어져만 갔다.
“흐응?”
“뭐죠, 저건?”
제리와 임민수는 허공에 등장한 마법을 경계했다.
예사롭지 않은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 뒤로 보여지는 것이 없었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끝이야?”
뭔가 대단한 마법을 보여 줄 것처럼 행동하더니.
압도적인 모기떼는 건재하고, 녀석들의 먹잇감인 영웅들은 제자리에서 우왕좌왕했다.
하늘에 풀떼기가 나타난 걸 제외하면 전혀 달라지지 않은 상황.
그에 조금 실망감을 느끼는 제리였다.
임민수는 아직 지팡이를 치켜들고 있는 김시후를 향해 말했다.
“장난은 끝났습니까?”
“…….”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위잉! 위잉! 위이잉!
제자리에서 비행하던 모기들은 유지한 파티와 김현태 파티를 향해 돌진했다.
힘껏 무기를 휘둘러 보지만 죽어 나가는 모기보다 새로 몰려오는 모기가 훨씬 많았다.
“씨발! 도망쳐!”
“으아아아!”
김현태와 그 파티원들은 기겁하여 한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지한 파티는 달랐다.
지팡이를 뻗은 김시후의 집중을 깨뜨리지 않으며.
그를 파티의 중심에 두고 보호하는 진형으로 맞추어 섰다.
“지한아! 우리도 빨리 도망쳐야지!”
“아직 아니야!”
힐러 이동길의 필사적인 외침에도 유지한은 결정을 바꾸지 않았다.
이동길은 별수 없이 칠라에게 몸을 바짝 붙인 채로 대기했다.
“하앗!”
민유리는 마력 화살을 대신하여 항상 품속에 넣어두는 단검을 꺼내 휘둘렀다.
접근전이 주력은 아니어도 기본적인 교전 능력을 갖추고 있는 그녀였다.
한편, 위에서 여유롭게 전투를 구경하는 제리와 임민수의 시선은 유지한에게 쏠려있었다.
“오호!”
“……저 남자는 대체 뭐죠?”
“우리 자기 잘한다!”
치지지직! 치지지직!
바닥에 쌓여 가는 모기의 사체들.
유지한이 휘두르는 검은 다가오는 한 치의 오차 없이 작은 모기들을 찢어발겼다.
—너희 다가오지 마!
김시후와 임시연의 마법마저도 높은 마력 저항력을 뚫어내지 못했지만.
실프의 마력으로 형성된 오러는 그걸 가능케 했다.
아쉬운 건 농축된 오러 외의 마법은 여전히 통하지 않는다는 것.
유지한은 오러를 최대한 이용하고자 얇은 검날이 아니라 아예 넓은 검면을 휘둘렀다.
위잉! 위이잉—!
그럼에도 달려드는 모기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지자.
이를 깍 깨물며 검에 집중한 오러를 넓게 퍼트렸다.
샤아아악!
검에서 시작된 초록빛 오러가 이내 유지한의 전신으로 뻗어 나갔다.
무기에 오러를 담는 행위가 매우 익숙해진 전사만이 사용할 수 있는 오러 전이.
사실상 모기가 접근할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지한! 이대로는 얼마 못 버텨!
“나도 알아!”
이대로 오러를 몸에 두른 채 버틸 수 있는 시간은 끽해봤자 30초 정도.
그 뒤에는 실프가 역소환 될 것이 분명했다.
‘15초. 그 이상은 안 돼.’
15초 내로 마법이 완성되지 않으면 이 자리를 벗어난다.
그렇게 다짐한 유지한은 오러를 두른 몸으로 뛰어다니면서 김시후를 힐끔거렸다.
남은 시간은 10, 9, 8, 7…….
그리고 15초가 되기까지 단 2초가 남은 상황.
고오오——
작전 실패라고 판단한 유지한이 김시후를 챙겨서 달아나기 직전.
허공에 생겨난 타원에서 마침내 변화가 일어났다.
쿠구구구궁…….
수없이 많은 나무가 하나로 엮어져 만들어진 물체.
처음 보는 사람들은 그게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을 테지만.
그것은 분명 유지한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거대한 손의 일부였다.
“다 소용없다는 걸 알아야지!”
임민수는 타원에서 빠져나온 물체를 얕잡아봤다.
그래 봤자 마법, 고작 마법일 뿐!
저 초록빛 기운이 모기에게 통하는 건 의외였지만.
어마어마한 마법 저항력을 지닌 모기는 주변에 미칠 듯이 많았다.
“……임민수 씨.”
“네?”
“저건 위험해.”
그러나 제리는 그와 조금 달랐다.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부터 단 한 번도 여유를 잃지 않았던 그녀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나무로부터 불길함을 감지하고 처음으로 입가에서 웃음을 싹 지웠다.
어쩌면 제리가 한국에 도착한 이래, 가장 진지한 태도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입구가 너무 작은데?’
유지한은 타원 밖으로 빠져나오려는 거인의 손을 바라봤다.
마법에 성공한 건 좋은데, 그 크기에 비교해 타원이 너무 좁았다.
거인의 손도 그것을 알고 있던 것인지, 타원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 건 손가락 하나뿐이었다.
그것도 새끼손가락 단 하나.
슈와아아악!
그럼에도 대단한 존재감을 뽐내는 거인의 손가락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거의 코앞까지 도달한 새끼손가락을 보고서 유지한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옆에 있던 민유리와 이동길도 할 말을 잃어버린 채 손가락을 바라보기만 했다.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는 나무가 촘촘한 간격으로 모여 완벽한 손가락의 형상을 이루는 물체.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엄청나다…….’
이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보니까 알 수 있었다.
이 물체가 절대로 지구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또 저 나무에 얼마나 대단한 힘이 깃들어 있는지도.
끼기기기긱.
커다란 새끼손가락의 마디가 관절을 따라 안으로 접혀 들어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제리가 소리쳤다.
“피해야 해!”
“제리 님?”
“빨리, 지금 당장!”
표정이 창백해진 제리가 임민수를 데리고 자리를 피하고자 했지만.
파아아아아앙!!
안으로 접혀 들어간 거인의 손가락이 빠르게 펼쳐짐과 동시에.
주변에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의 파동이 불어닥쳤다.
후와아아아아아악——!
공중에 떠 있던 모기들이 동시에 날갯짓을 멈췄다.
모깃소리가 사라져서 순식간에 조용해진 전장.
하늘을 날아다니던 모든 모기는 힘없이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광경은 마치 하늘에서 모기의 비가 떨어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쿵! 쿠웅!
심지어 살아남은 다른 몬스터들도 바닥으로 쓰러져 내렸다.
겨우 한 번의 손짓이 만들어 낸 어마어마한 결과.
잠시 후 거인의 손가락은 천천히 타원 안쪽으로 회수되었다.
사라지는 손가락을 보며 어안이 벙벙해진 유지한은 땅으로 떨어진 모기를 살폈다.
‘죽었다.’
파들거리며 몸을 떨어 대던 모기의 움직임은 곧 완전히 멎어 버렸다.
다른 곳에 떨어진 녀석들의 최후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분명 뛰어난 마법 저항력을 갖춘 몬스터임에도 불구하고.
마법과도 같은 거인의 손가락으로 인해 목숨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우리에겐 피해가 전혀 없어.’
놀라운 건 같은 자리에서 마력에 휩쓸렸던 영웅들에게는 전혀 피해가 없다는 것.
오로지 적들에게만 타격이 들어간 것이었다.
몸집이 커다란 몬스터는 아직 죽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쓰러진 자리에서 일어나지는 못했다.
“커어어억!!”
“꺄아아아악—!”
유일하게 입으로 비명을 지르는 인간은 임민수와 제리였다.
탑승한 몬스터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진 두 사람은 온몸을 파르르 떨어 댔다.
그때 유지한이 소리쳤다.
“유리 씨!”
“네, 네?”
“저 사람들 묶어요!”
민유리는 황급히 로프를 소환하여 두 사람의 몸을 단단하게 구속했다.
그녀가 스킬을 취소하지 않는 한 풀어낼 수 없는 속박이었다.
물론 숨겨둔 무기를 빼앗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 어지러워…….”
머리에서 현기증을 느낀 김시후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코에서는 어느새 붉은 코피가 흐르고 있었다.
“너 괜찮아?”
“조금만 앉아 있을게요.”
“동길아! 시후 좀 봐줘!”
“어어, 그래!”
이동길은 주저앉은 김시후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약간의 현기증과 마력이 90% 이상 소모된 걸 제외하면 몸은 멀쩡했다.
아직도 지팡이를 꽉 쥐고 있던 김시후는 씩 웃으며 말했다.
“저 조금은 도움이 됐죠?”
“얌마, 고작 도움이 된 정도가 아니지!”
어이없다는 얼굴을 한 유지한이 손으로 김시후의 머리칼을 마구 휘저었다.
그렇게 불리해 보이던 전황을 완전히 뒤집어 버렸는데.
도움이라는 단어만으로 그의 활약을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찍, 찍찍……!”
이것이 바로 팀워크라고 소리치는 칠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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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쪽에 살아남은 놈 없어요?”
“없는 것 같아요!”
유지한과 민유리는 바닥에 쓰러진 몬스터들을 조사하며 살아남은 개체의 목숨을 끊었다.
몸이 마비된 것인지, 아니면 공포에 질려 버린 것인지는 몰라도 놈들은 끝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 덕분에 작업은 빠르게 진행할 수 있었다.
“으으, 으으……!”
사로잡힌 임민수는 아직도 넋이 나가 있었다.
그 앞에서 손을 이리저리 흔들어보지만 인지하지 못할 정도였다.
반면 정신을 되찾은 제리는 가만히 유지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남자 상태는 어때?”
“개판이야.”
볼일을 마치고 다가온 유지한의 물음에 이동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주 여유가 넘치던 남자가 대체 어떤 고통을 겪었길래 이렇게 변해 버린 걸까.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자기야.”
그때 제리가 유지한에게 말을 걸어왔다.
유지한은 팔다리가 묶인 그녀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죽기 전에 뭐 하나만 부탁해도 돼?”
“무슨 부탁?”
“내 입술에 키스해 줘. 기왕이면 혀까지 넣어서 아주 찐하게.”
“기각.”
입술을 비죽 내민 제리가 크게 실망하는 표정을 보며.
유지한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