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땅끝으로 (4)
“헛소리하지 말고 준비나 해.”
“헛소리라니? 나한테 감히 그딴 소리를……!”
자신의 주장이 헛소리로 취급당하자 김현태는 화를 냈다.
하지만 서로 말싸움을 할 때가 아니라는 걸 알았는지 대검을 꺼내 들었다.
유지한은 자신에게 시선을 고정한 제리를 예의주시하면서.
점차 몰려드는 몬스터들을 경계했다.
“케켁!”
“푸르르르!”
“이히이이잉!!”
제리가 탑승한 박쥐와 함께 하늘을 뒤덮은 비행형 몬스터들.
땅에도 온몸이 털로 뒤덮였거나 네 발 달린 몬스터들이 유지한 일행을 둘러싸고 있었다.
어디 빠져나갈 틈 하나 없이 빽빽하게 세워진 몬스터의 벽.
쉽게 놓아주지 않겠다는 제리의 의지가 엿보였다.
‘언제 이렇게 가까워진 건지.’
몬스터가 이렇게나 많이 몰려왔다면 지금보다 거리가 더 좁혀지기 전에 알아챘을 법도 하거늘.
그렇지 못한 거로 보아 이놈들은 발소리나 날갯짓 소리가 평범한 몬스터보다 훨씬 조용한 듯했다.
태어날 때부터 그런 특징을 가진 놈들만 모아놓은 것은 아닐 테고.
아마도 몬스터를 데리고 별도의 훈련을 진행했으리라.
‘몬스터의 기세가 남달라.’
여수 공항에서 제리를 마주쳤을 때보다 더 늘어난 수의 몬스터들.
단순히 규모로만 따지자면 4천에 달하는 IUPC 회원들의 것과 비교하기가 어렵지만.
각각의 몬스터가 보여 주는 눈빛이나 흉흉한 기세는 길가에 흔히 널려 있는 놈들보다 수준이 높았다.
“제리 님이 말씀하셨던 게 저 남자입니까?”
“맞아요!”
펄럭! 펄럭!
제리의 뒤에서 골리앗 이글을 탄 남자가 등장했다.
유지한은 떨어진 거리에서도 그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저 사람은…….’
이세계인들의 기억 속에서 종종 등장했던 지구의 인간.
IUPC의 부장급 인사라는 임민수였다.
아제시아에서 넘어온 게 아니라 한국에서 태어난 토종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집어삼키려는 이들에게 오랜 기간 적극적으로 협조했던 인물.
어떻게 보면 한국에서 이번 사태가 벌어진 것에 가장 크게 공헌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저 덩치 큰 햄스터까지 합하면 10마리인가.”
“찍?”
“스트레스를 풀기에는 나쁘지 않은 숫자군요. 유명한 얼굴도 보이고.”
임민수는 유지한 파티와 김현태 파티를 훑어보며 입가에 기분 나쁜 웃음을 띠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몬스터 중에서 그와 비슷하게 미소를 짓는 놈들이 있었다.
‘행동을 따라 하는 거군.’
몬스터를 조종하는 건 제리만이 아니다.
임민수라는 인물 또한 결코 평범한 인간이 아닌 것이었다.
“영웅 여러분!”
촥!
임민수는 오른팔을 앞으로 쫙 뻗으며 소리쳤다.
“당신들은 언제나 사랑스러운 크리쳐들을 무시하고 짓밟았죠. 나는 크리처 보호 연맹의 간부로서 그 폭력적인 행동에 개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
“오늘에 이르러서는 끝내 소중한 회원들까지 무자비하게 살해했어요! 아아, 멀리서 그걸 지켜보기만 했던 내 눈에는 24시간 내내 눈물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이미 마른 것 같은데…….”
김시후의 중얼거림에 속으로 뜨끔했는지.
눈을 가늘게 뜬 임민수는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
불편한 기색으로 목을 가다듬은 임민수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경찰은 언제나 우리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정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연맹에게 혹독한 시련을 부여했죠. 하지만 이제 그런 건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딱!
임민수가 손가락을 튕기자 그가 조종하던 몬스터들이 영웅들을 향해 무언가를 던졌다.
땅에서 굴러가는 물체를 본 유지한은 와락 인상을 썼다.
“내가 당신들을 심판할 테니까!”
몬스터들이 던진 물체는 인간의 머리였다.
8개가 넘는 머리통이 축구공처럼 굴러오는 섬뜩한 광경.
거칠게 찢긴 목 아래로는 마르지 않은 붉은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저 미친놈이……!”
나이가 10살조차 되어 보이지 않는 어린아이의 머리.
눈을 뜬 채로 절명한 아이를 보자마자 격분한 민유리는 임민수를 향해 활을 겨누었다.
‘이 사람들은 영웅이 아니잖아.’
영웅들을 심판하겠다는 임민수의 포부와 달리.
그가 죽인 것으로 추정되는 인간들의 머리에서는 마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영웅이 아니라 멀리 피난을 가지 못하고 해남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던 시민들이리라.
“저건 심심풀이였습니다. 식사 전에 식욕을 돋우기 위한 애피타이저 같은 거죠.”
“그 입 닥쳐.”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들도 곧 저렇게 되리니…….”
“임시연!”
“시후야!”
김현태와 유지한은 각각 자기 파티의 마법사를 호출했다.
부름을 받은 두 사람은 그들을 둘러싼 몬스터를 향해 지팡이를 뻗었다.
[화산 폭발]
쿠구구구궁!
임시연의 몸 앞에 콘크리트 땅이 산 모양으로 솟아오르고.
분화구처럼 생긴 그 끝에 순식간에 진한 마력이 모여들더니.
이내 커다란 폭발 소리를 내며 마력이 터져 나왔다.
퍼어어어엉——!
360도 전방위로 발사되는 뜨거운 마력의 불길.
포탄처럼 빠른 속도로 날아간 불길은 하늘과 땅의 몬스터들을 집어삼켰다.
“취이이익?!”
“푸르르릉—!”
공격을 정면에서 맞은 몬스터는 괴성을 질러 댔다.
통째로 몸이 익어버리다가 끝내 까맣게 타들어 가는 녀석들.
떨어진 거리에서도 피부로 느껴질 만큼 아주 뜨거운 열기였다.
펑! 펑! 펑!
연쇄 폭발을 일으키며 땅에서 터져 나오는 마력에 유지한은 주의를 기울였다.
진심이 된 임시연의 고유 마법은 강력하긴 하지만, 때때로 적과 아군을 구분하지 못했다.
본인은 그걸 부정하더라도 그는 실제로 몇 번 거기에 휘말릴 뻔했던 기억이 있었다.
[플레임 스톰]
이어지는 건 김시후의 마법이었다.
지팡이에 정령 강화까지 걸고서 사용한 마법은 불에 바람이 더해진 합성 마법.
온몸을 뒤흔들 만큼 세찬 폭풍에 뜨거운 불길까지 더해진 마법이 몬스터들이 서 있는 지역을 휩쓸었다.
후우우웅—!
안 그래도 열기가 느껴지던 주변의 온도가 그로 인해 확 달아올랐다.
이때 김시후의 마법은 임시연의 [화산 폭발]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넓은 범위로 퍼지는 마법끼리 서로 충돌하여 효과가 줄어들 수도 있는 상황.
‘낭비되는 마력이 너무 아까워.’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지팡이를 아주 조심스럽게 휘젓는 김시후.
그에 따라 [플레임 스톰]이 만들어 낸 바람은 엉뚱한 위치로 떨어지는 임시연의 마법을 크게 비틀었다.
‘마법을 쓸 거면 이렇게 써야지.’
그의 뜻에 따라 경로가 변경된 마법은 모두 몬스터들에게 적중하여 적지 않은 피해를 입혔다.
낭비될 예정이었던 마법을 의미 있게 사용하는 것이었다.
‘저놈 봐라?’
임시연은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외부인이 보더라도 감탄사가 나올 정도의 마력 제어.
두 마법이 겹쳐 사용되어 효과가 반감되기는커녕.
시너지를 이루어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운이 아니야.’
절대로 운이 좋아서 가능한 기술이 아니었다.
유지한 파티의 마법사라고 해서 은근히 깔보고 있었는데.
그 실력이 제법 만만치 않았다.
“꽤 하시는군요.”
“키힛! 재밌어, 재밌어!”
몬스터들이 공격에 휘말리는 와중에도 임민수와 제리는 침착했다.
두 사람은 타고 있는 새를 조종하여 날아오는 불덩이들을 가뿐하게 피했다.
날개를 반만 접었다가, 폈다가, 공중에서 자유롭게 회전하기까지.
몬스터가 아니라 자기 몸을 다루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형태 변화 - 로프]
임민수를 멈춰 세우기 위해 기습적으로 날아간 민유리의 공격.
날카로운 화살에서 밧줄 모양으로 변화된 마력은 골리앗 이글의 몸을 휘감았다.
휘리리릭!
거미줄의 효과까지 더해진 끈끈한 밧줄은 골리앗 이글의 날개와 몸, 다리까지 꽁꽁 묶어 버렸다.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쳐 보지만 녀석의 몸은 이미 땅으로 추락하는 상황.
타닷!
임민수는 완전히 추락하기 전 위로 높게 점프하더니, 또 다른 골리앗 이글의 등으로 올라탔다.
그런 뒤에는 짜증이 난 얼굴로 민유리를 노려봤다.
고작 저런 밧줄 하나를 끊어 내지 못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당신, 상당히 거슬리네.”
촤르르륵!
바로 근처에 있던 흙밭 아래에서 기다란 물체가 지면 위로 치솟아 올랐다.
온통 초록색인 그것은 이름 모를 식물의 줄기.
임민수가 거창한 포부를 내뱉던 때, 땅 아래에 몰래 무기를 심어 놓은 것이었다.
“읏!”
바닥에서 솟아오른 수많은 줄기들이 노리는 건 주로 민유리였다.
몬스터를 통째로 태워 버리는 마법사들보다.
특이한 스킬을 사용하는 그녀 한 명을 더 견제하는 것이다.
“칠라!”
“찍찍!!”
유지한은 칠라와 함께 민유리를 보호했다.
텅! 텅! 터엉!
방패에 막혀서 밖으로 튕겨 나가는 줄기.
서걱!
오러가 실린 유지한의 검은 줄기를 손쉽게 잘라냈다.
거기에 아티팩트에 내장된 발열 스킬까지 더해지자 절단면에 불이 옮겨붙었다.
치이이익—!
줄기 끝에서 시작된 불은 하얀색 연기를 피워 내며 빠르게 번져 나갔다.
바람의 오러가 더해진 불이 번지는 속도는 유지한의 기대를 훌쩍 뛰어넘었다.
그에 공격을 시도했던 이름 모를 몬스터는 불이 더 번지지 않도록 자신의 줄기를 중간에 뚝 끊어 버렸다.
범상치 않은 지능이 엿보이는 행동이었다.
쾅! 쾅! 쾅!
맨주먹으로 몬스터의 뼈와 살을 터트리던 이미아는 위로 높게 점프했다.
현역 농구 선수가 옆에 있었다면 입을 쩍하고 벌릴만한 맨몸 점프.
낙하산이라도 필요할 것 같은 놀라운 점프로 노리는 건 골리앗 이글에 탑승한 임민수였다.
“퓌요오오!”
하지만 새가 더 높게 날아오르자 안타깝게도 이미아의 손은 그에게 닿지 않았다.
커다란 기린의 머리를 밟고서 땅으로 내려온 그녀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상황은 나쁘지 않아.’
파티원 보호에 집중하던 유지한은 임민수와 제리를 힐끗거렸다.
그들이 조종하는 몬스터는 전에 마주친 놈들보다 더 체계적인 움직임을 가지고 있었다.
훈련이 잘 된 군대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하지만 김현태 파티와 더불어 원정 중에도 꾸준하게 성장한 유지한 파티를 막아서기에는 부족했다.
‘왜 아직도 여유를 부리는 걸까.’
그런 와중에도 임민수와 제리의 얼굴에는 여유가 듬뿍 묻어나왔다.
저건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일까, 고민하던 순간.
김현태의 외침이 들려왔다.
“가소로운 것들!”
부웅! 부우웅!
커다란 크기에 걸맞게 커다란 원을 그리며 적들을 찢어내는 대검.
김현태는 몬스터들 사이에서 아주 화려하게 날뛰며 보는 이로 하여금 시원함마저 느껴지게 했다.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김현태를 주목하는지 이해가 될 정도.
“너무 멋지십니다, 형님!”
김현태 파티의 새로운 파티원, 김강우는 내내 김현태의 옆을 졸졸 따라다녔다.
그런데 유지한의 눈에는 그 모습이 너무 어설프게 보였다.
“……쟤 지금 뭐 하냐.”
허우대 멀쩡한 전사가 좋은 장비와 검을 들고 전투에 참여하고 있긴 한데…….
옆에서 호들갑 떠는 걸 제외하면 김현태를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달리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는 것도 아니었다.
독폭탄이 날아오던 전투 때보다 훨씬 더 심각한 수준이었다.
‘나 대신 들어간 게 아니었어?’
속으로 김강우의 수준을 계산해 보던 유지한은 의문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을 대신하여 파티에 합류했다는 그의 역할을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건, 김현태가 그걸 보고도 아무런 불만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
“강우야! 뒤를 부탁한다!”
심지어 친히 자신의 후방을 맡기기까지 하다니.
과거의 유지한에게는 단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은 모습이었다.
‘……진작에 추방돼서 다행이구만.’
유지한은 자신이 김현태 파티원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했다.
아직 저 파티에 있었다면 저들이 싸지르는 똥을 열심히 치워야 했을 테니까.
“칠라. 우리가 보여 주자.”
“찍찍!”
사람 보는 눈이 부족한 김현태에게.
팀워크라는 게 어떤 것인지 보여 줄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