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땅끝으로 (2)
“뭐……. 그래도 일단은 동행이니까 말이죠. 미아도 저기에 있고.”
“안타깝게도요.”
“크흠! 그보다 저거 터트리지 않고 처리할 수 있겠어요? 아니면 독을 멀리 날려 버린다든지.”
“해볼게요.”
퉁!
민유리가 독폭탄이 굴러오는 방향으로 화살을 쏘아 냈다.
일정한 충격이 가해진다면 그대로 폭탄이 터져 버릴 터.
그녀는 그 부분을 의식하며 스킬을 사용했다.
[형태 변화 - 젤리]
젤리처럼 폭신한 형태로 변해 버린 그녀의 마력은 독폭탄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데굴데굴 굴러가던 독폭탄은 이내 펑 하고 터져 버렸지만.
겉면에 끈적하게 달라붙은 민유리의 마력은 독이 공기 중으로 퍼지지 않게끔 잡아 놓았다.
‘언제 또 저런 기술을…….’
유지한은 처음 보는 민유리의 스킬에 놀라는 한편.
김현태를 향해서 말했다.
“뭐해? 빨리 뒤로 빼!”
조금 더 멀리서 터져 버린 독이 주변을 덮쳐오고 있었기에.
위협을 감지한 김현태 파티는 재빨리 몸을 뒤로 뺐다.
“이쪽이야!”
유지한은 일행을 이끌고 예정된 경로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동했다.
따라오는 몬스터로부터 벗어나고 우회하기 위함이었다.
“내가 앞장서겠어.”
김현태는 꼭 선두에 있고 싶었던 모양인지.
유지한의 뒤를 따르지 않고 맨 앞으로 나와서 달렸다.
그리고는 나란히 달리는 유지한에게 물었다.
“유지한! 왜 저런 게 있다는 걸 알려 주지 않은 거지?”
“나도 모르는 걸 어떻게 알려 줘.”
“미리 알고 피해 있던 거잖아?”
김현태는 유지한이 독폭탄에 관한 정보를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혼자서만 알고 있는 정보를 자신에게 공유하지 않은 것이라 여기는 것이었다.
“그럴 리가.”
말도 안 되는 억측에 유지한은 고개를 저었다.
대체 무슨 수로 해남에 출현하는 몬스터까지 알아낸다는 말인가.
그럼에도 믿으려고 하지 않는 김현태를 보며 그는 혀를 찼다.
‘의심병은 여전하네.’
현장에서 자신의 본능에만 의지하며 남의 의견을 쉽게 무시하는 태도.
김현태는 이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더 이상의 협조는 불가…….”
“현태야. 시끄러우니까 잠깐 조용히 해 봐.”
유지한은 옆에서 구시렁대는 김현태를 무시하고.
주머니에 넣어 뒀던 지도를 펼쳤다.
주변 환경과 건물 따위를 보며 현재 위치를 짐작했다.
‘나쁘지 않네.’
조금 더 돌아가는 방향으로 가게 되었지만.
목적지에 도착하는 시간에는 별 차이가 없을듯했다.
“너……. 지금 내 말 무시하는 거냐?”
유지한이 대답 없이 지도만 들여다보는 모습에 김현태는 은은한 분노를 드러냈다.
그에 유지한은 귀찮다는 듯 말했다.
“애초에 내가 피해서 가자고 했는데 먼저 공격한 건 너잖아.”
“큭!”
“사람이 친절하게 경고해 주면 무시하지 말고 좀 들어라.”
유지한이 훈계하듯 건넨 말에 김현태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했다.
뭐라 따지고 싶었지만, 결정을 내린 건 자신이었기에 딱히 할 말은 없었다.
‘건방진 새끼……!’
같은 파티에 있을 때는 파티장으로서의 권한을 행사하며 그를 쉽게 무시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이전처럼 쉽게 대하기가 힘들었다.
설마 유지한과 다시 만나서 이런 답답함을 느끼게 될 줄이야!
‘이놈에게 내 역할을 뺏길 수는 없어.’
협조하겠다고는 했지만 유지한에게 모든 걸 맡기겠다는 뜻은 아니다.
중요한 순간에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건 유지한이 아니라 자신이어야만 했기에.
김현태는 속으로 분노를 삭이며 때를 기다렸다.
*****
해남 어딘가에 숨겨진 은신처.
리우스는 커다란 보따리를 바닥에 질질 끌며 벽으로 이동했다.
“컥.”
보따리를 벽으로 냅다 던져 버리자 그 안에서 미약한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리우스는 보따리의 입구를 꽁꽁 묶어놓은 줄을 느슨하게끔 풀었다.
이내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주사위 길드의 영웅인 정영욱이었다.
“마셔라.”
“……!”
리우스는 그의 입술에 플라스틱 물병을 물렸다.
그러자 갈증이 극에 달해 있던 정영욱은 마치 아기가 젖을 빨듯이 물병을 쪽쪽 빨아 댔다.
작은 물병에 3분의 1쯤 담겨 있던 물을 다 마시다 못해.
단 한 방울도 남기지 않으며 빠는 힘으로 물병을 찌그러뜨렸다.
“가, 감사합니다.”
물병을 바닥에 떨어뜨린 정영욱은 리우스에게 고개를 숙였다.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
처음 이세계인에게 붙잡혔을 즈음 크게 반항하던 기색은 깔끔하게 사라져 버린 뒤였다.
리우스는 그런 정영욱의 태도에 만족하는 얼굴이었다.
“몸은 괜찮나?”
“…….”
“쯧쯧, 그러게 적당히 했어야지.”
정영욱이 속박된 아뎀을 비롯한 이세계인들을 먹을 것으로 유혹하던 때.
하나같이 그에게 아부를 떨던 이세계인들은 정영욱이 되레 붙잡히자마자 그의 얼굴에 침을 뱉어 대며 몸 여기저기를 구타했다.
자신들이 당한 걸 배로 갚아 준 것이었다.
“팔다리를 자르겠다는 걸 내가 말렸기에 망정이지. 너도 네 동료들처럼 그 자리에서 죽을뻔했다. 알고 있겠지?”
“……알고 있습니다.”
정영욱을 내려다보던 리우스는 뒤이어 그의 입에 육포 조각을 물렸다.
혀를 타고 느껴지는 감칠맛에 정영욱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며 이빨로 육포를 씹어 댔다.
“그래도 지금 같은 순종적인 자세는 마음에 드는군.”
한동안 육포의 맛을 음미하던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왜 나를 살려 둔 겁니까?”
“이용 가치가 있어 보였으니까.”
미숙한 느낌은 남아 있지만, 마법 실력이 꽤 나쁘지 않은 어린 마법사.
인질로 삼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길드원을 아낀다는 주사위의 소속이라면 더욱 그랬다.
무척이나 분해하던 박재경의 얼굴은 아직도 리우스의 눈에 선했다.
“기껏 여기까지 데려왔으니, 곧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생길 거다.”
“……내가 거부한다면?”
“그걸 꼭 물어봐야 알겠나?”
“…….”
명령에 거부한다면 남은 것은 죽음뿐.
이미 동료들의 죽음을 코앞에서 본 뒤였기에.
정영욱의 등 뒤로 죽음의 공포가 밀려왔다.
죽은 동료들의 얼굴이 떠오르며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혀에서 소고기의 감칠맛이 맴도는 것이 참으로 원망스러웠다.
“현명한 선택을 바라지.”
정영욱에 입에 다시금 육포를 물려 준 리우스는 풀어놓은 보따리를 묶었다.
그리고는 이세계인들이 한데 모여 있는지도 앞으로 가서 말했다.
“현재 상황은?”
“그리 좋지는 않습니다.”
누군가가 빛나는 표식이 가득한 지도를 가리켰다.
각 지역에서 IUPC 회원들이 이끄는 몬스터 부대, 그리고 대치 중인 영웅들이었다.
현재 서울에서 내려온 후발대와 교전을 치르는 것이었다.
“하필이면 여수가 당해 버려서…….”
영웅들이 막아서더라도 돌파해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판단했던 여수는.
고유 스킬까지 동원한 박재경의 습격으로 인해 모든 지역 중에서도 가장 뒤처져 있었다.
레드홀과 주사위의 수장이 존재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그나마 해남에서 출발한 일부 몬스터들은 후발대와 마주치지 않고 논산 근처까지 다다르는 데 성공했지만.
고작 저런 숫자로 서울을 치겠다는 건 무리였다.
“대장님의 회복은 어때?”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각종 회복 시설이 풍부하게 갖춰진 이 은신처에서.
아직 의식이 없는 그들의 대장은 체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외상이 있는 건 아니었기에 곧 깨어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해남 원정대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습니다.”
“어떻게 정확히 은신처가 숨겨진 곳으로 향하는 건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해남에서 추적이 붙어 있는 영웅 중에는 이곳과는 다른 은신처로 향하는 이들이 있었다.
대체 놈들은 어디서 정보를 얻어 낸 것인지.
여수와 고흥에서부터 계속 이어져 온 의문이었다.
‘……왜 또 그놈이 떠오르는 거지?’
그때 리우스는 갑자기 유지한의 얼굴이 떠올랐다.
환각 마법을 꿰뚫어내고 바다까지 쫓아오던 그 녀석.
괴래를 이용하여 바닷속으로 가라앉혔음에도 끝까지 따라오는 찰거머리 같은 영웅!
굉장히 거슬리는 그 영웅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계획이 성공했다면 분명 정신이 파괴되었을 테지.’
최상급 마석을 소모하여 고유 마법까지 사용했으니.
이제 그놈의 얼굴은 볼일이 없을 터였다.
하지만 자꾸 가슴이 답답한 건 왜일까.
그건 아마도 구석에서 떠드는 제리 때문일지도 몰랐다.
“우리 자기가 이렇게 죽었을 리 없어.”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내가 찜한 사람이니까! ……그래! 분명히 해남으로 들어왔을 거야.”
그 누구보다 유지한의 생존을 확신하는 이세계인.
리우스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째 불안함이 가시지 않았다.
“리우스 님.”
“말씀하세요.”
IUPC의 부장 임민수는 리우스를 불렀다.
그리고는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를 보내 주십시오.”
“……민수 씨가요?”
“회원들이 고생 중인데 저만 쉬고 있을 수는 없죠.”
“임민수 씨는 IUPC와 저희를 이어 주는 연결점입니다. 혹시라도 당해 버리면 곤란해요.”
IUPC는 물량 공세로 한국에 충분한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그 중심에 있는 건 그간 전 지역에서 회원들과 길 잃은 몬스터를 끌어모은 임민수.
각성한 고위 회원들과 대부분 안면이 있으며 그들에게 원격으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컨트롤 타워 같은 존재.
IUPC 한국 지부의 강력한 실세인 그는 이곳에 꼭 필요한 인물이었다.
“대장님께서 깨어나시기 전까지는 이곳에 계시죠.”
“리우스 님 판단에는 제가 영웅에게 밀릴 것 같습니까?”
“그건 아닙니다만.”
몬스터를 조종하는 약물을 지구에 퍼뜨린 건 이세계인이었다.
지구인을 기준으로 제작되지 않았기에 그 능력이 약화되거나 머리카락이 변색되는 등 각종 부작용이 있었지만.
그런 부작용을 고려하고도 리우스는 임민수 개인의 능력이 탁월하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에게 전혀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말이다.
“나들이 가는 기분으로 다녀오겠습니다.”
“…….”
“정 불안하시면 저쪽의 숙녀분을 제게 붙여 주시죠.”
“제리를요?”
제리를 함께 데려가겠다는 임민수였다.
“갈래, 갈래! 나도 갈래요!”
송장이 된 유지한을 넘겨주겠다고 했음에도 온종일 시끄럽게 떠드는 제리.
회원들의 죽음으로 스트레스가 쌓인 임민수의 뜻을 아예 무시하기도 그렇고.
그녀가 따라붙는다면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을 터.
리우스는 결국 요청을 받아들였다.
“5시간 내로 돌아오세요. 그 이상은 허락 못 합니다.”
“기왕 나가는 거 20마리 정도만 사냥하고 오겠습니다.”
임민수는 붉은 혀를 길게 내밀어 입술을 할짝였다.
*****
유지한 일행이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길을 재촉하던 때.
띠링! 띠리리링!
“어라?”
특정한 지역에 다다르자 갑자기 여기저기서 진동이나 알림음이 들려왔다.
깜짝 놀란 모두가 하나같이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여긴 방해 전파가 닿지 않는 건가?’
유지한 또한 자신의 휴대폰을 확인했다.
각종 재난 문자와 주로 여러 부재중 전화가 보였다.
가장 많은 부재중 전화는 영웅부의 양지철에게서 걸려 온 것.
그가 어떤 이유로 전화를 걸어 왔는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성태 씨도 전화를 했었네.”
“저는 아빠한테 왔었어요.”
부재중 전화 목록에는 영화감독 하성태도 포함되어 있었다.
별도로 보낸 문자를 보아하니 선발대와의 연락이 끊겼다는 소식이 전해져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
그때 번뜩 유지한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유리 씨.”
“네?”
“저희가 이번에 가져온 카메라, 촬영한 영상을 서버에 곧바로 전송하는 것도 가능하죠?”
“네! 아마 될 거예요.”
“이 자리에서 미리 보내 두죠.”
유지한은 파티원들과 함께 하성태에게 영상을 보내면서 김현태 파티를 힐끔거렸다.
순식간에 휴대폰에 빠져든 그들의 모습을 보아하니 영상을 보낼 시간은 충분히 나올 것 같았다.
‘잘하면 선공개를 할 수 있겠는데?’
통신이 불가능한 지역에서 촬영된 영상을 누구보다 빠르게 공개하게 된다면.
높은 관심을 불러 모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유지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