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땅끝으로
유지한 파티는 다시 김현태 파티와 사무실에서 마주했다.
협력하겠다는 결론이 나온 덕분인지, 내부의 분위기는 아까보다 조용해져 있었다.
“도와주겠다는 건 확실한 거겠지?”
“일단 네 계획을 말해 봐.”
“내가 언급했던 은신처를 위주로 공격을 시도할 거야. 너희가 도움을 준다면 원정대원들을 보내서 은신처 여러 곳을 동시에 급습할 거고.”
“몬스터는 어쩌고?”
현재 외부에서 해남군청이 있는 시내로 들어오는 길목은 몬스터들로 포위된 상황.
본래 김현태가 이끄는 해남 원정대는 놈들을 퇴치하는 일부터 처리할 생각이었다.
후발대는 아직 소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함정에 빠졌거나 다른 몬스터 무리와 대치하고 있을 터.
“필요한 인원만 선별하면 남은 인원으로 몬스터들과 대치하는 건 크게 문제가 없어.”
“그걸 어떻게 믿지?”
“내가 직접 녀석들을 뚫고 왔으니까.”
[투명화]로 은신한 상태의 유지한은 미끼가 되어 몬스터들을 유인하면서 동시에 녀석들의 수준을 파악했다.
그 결과 소수의 영웅들이 잘 대처한다면 현 위치에서도 무리 없이 버틸 수 있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설령 힘으로 밀려난다고 해도 길을 크게 우회해서 돌아간다면 크게 위험할 걱정은 없었다.
“목적지는?”
“우리는 땅끝마을로 간다. 다른 인원들이 향할 장소는 지도에 표시해 줄게. 엘리트들을 발견한 뒤에 대처할 시나리오도 다 생각해 뒀어.”
“……좋아.”
김현태는 계속 앉아 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유지한의 앞으로 다가와서 팔을 앞으로 뻗었다.
“당분간 잘 부탁한다.”
“……?”
갑자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악수를 요청하는 김현태였다.
아까와는 너무 달라진 듯한 그의 태도에 유지한은 얼떨결에 손을 마주 잡으면서도 의아해했다.
하지만 곧 옆으로 다가온 남성이 카메라를 들고 김현태를 촬영하는 걸 보고서는.
그가 촬영을 위해서 ‘쇼’를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정보를 교류하고 협력할 수 있다면 이유는 딱히 상관없었다.
김현태 파티의 화력이라면 이번 일에 큰 힘이 될 것은 분명했으니까.
*****
김현태는 모든 원정대원을 불러모아 은신처를 선제공격할 인원을 뽑았다.
이번 원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싶었던 모양인지 먼저 나서서 손을 드는 파티가 있었기에 인원은 금방 채워졌다.
원정대는 그렇게 이세계인들의 은신처로 향하는 별동대, 자리에 남아 몬스터와 대치하는 부대로 나뉘었다.
“다들 죽지 마셔!”
“나중에 뒤풀이에서 봅시다!”
선별된 별동대는 모든 준비를 갖추어 해남군청에서 빠르게 벗어났다.
동서남북, 각기 다른 위치로 향하는 별동대에서.
유지한 파티는 김현태 파티와 함께 해남 땅끝마을이 있는 남쪽으로 향했다.
‘가장 의심되는 지역이지.’
유지한은 현 위치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그곳에 엘리트들이 숨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해남의 은신처 중에서도 가장 좋은 자원과 시설이 갖춰진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깨어나지 않은 그들의 대장을 회복시키기엔 안성맞춤인 장소.
거리 탓에 평소 영웅들의 눈이 닿기에도 힘든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차를 타고 가자고?”
“귀찮게 걸어갈 필요가 있나?”
한동안 도로를 따라서 쭉 이동하던 일행은.
주변에 있는 차를 타고 가자는 김현태의 제안에 모두 멈춰 섰다.
유지한은 그에게 말했다.
“은밀하게 이동해도 모자를 판에 차에 타자는 건 조금 아닌 것 같다.”
“훌륭한 이동 수단을 두고서 체력을 소모하는 건 비효율적이야.”
“이동 경로 중에는 도로를 벗어나는 구간도 있어. 어차피 타 봤자 10분을 못 갈 거라고.”
“10분은 탈 수 있겠군.”
“…….”
걷는 게 얼마나 귀찮으면 차를 타고 가겠다는 김현태였다.
유지한은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생각했다.
‘하필이면 열쇠가 꽂혀 있는 차를 발견해서.’
도로 옆에 주차된 차량 3대는 어찌 된 일인지 문에 열쇠가 꽂힌 상태로 멈춰 있었다.
여기 모인 10명 정도를 태우는 건 문제가 없겠지만.
커다란 몸집을 가진 칠라가 일반 차량에 타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칠라가 타기에는 차가 너무 좁아.”
“루프에 올라타면 되겠지.”
“왜 그리 위험한 짓을 해? 현태야. 적당히 좀 하자.”
“너야말로 독단이 심하군, 유지한.”
“네가 고작 몇 분 걷는 거로 체력이 소모될 정도로 나약하진 않을 텐데?”
“…….”
“그 김현태가 체력이 모자랄 리는 없지. 안 그래?”
여기서 반박한다면 본인의 체력이 약하다고 인정하는 게 되어 버릴 터.
기분 전환 겸 드라이브를 하고 싶었던 김현태는 유지한을 째려보다가 몸을 돌려 다시 걸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일방적으로 지시를 주고받는 상하관계가 아니었기에.
이번 계획을 제안한 사람을 두고 의견을 강압적으로 밀어붙일 수는 없었다.
“다음은 저쪽이야.”
“뭐라고? 그쪽은 산밖에 없잖아.”
두 사람의 의견 충돌은 그 후로도 이어졌다.
이번에는 온통 산으로 뒤덮인 지형을 넘어가자는 유지한의 말에.
김현태가 강한 의구심을 드러냈다.
“내가 아까 산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고 말했어.”
“필요하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거였지. 안전한 평지를 두고서 굳이 산을 타려는 이유가?”
“안전해 보이지 않으니까. 지도상으로 보면 통상적으로 많이 오가는 길이라 오히려 더 위험해.”
“이건 뭐 겁쟁이도 아니고…….”
“김현태! 해남에서 이동 경로는 내가 결정하는 것에 합의했을 텐데?”
“……쯧!”
김현태는 혀를 한번 차고는 앞장서서 산 쪽으로 향했다.
황준호와 임시연, 김강우가 자연스럽게 그의 뒤를 따랐다.
잠시 자리에 멈춰 있던 이미아는 김현태와 유지한 사이에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러자 유지한은 이마아에게 먼저 가라는 손짓을 했다.
‘김현태가 내 말을 듣긴 듣네.’
유지한은 항상 주도권을 가져가고 싶어 하는 김현태의 본능을 알고 있었다.
그런 김현태가 먼저 자기 뜻을 꺾고 유지한의 의견에 따른다는 건.
예전 같았으면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
‘은근히 재밌군.’
특수한 상황이라고는 해도 그 고집불통을 원하는 대로 통제하고 있자니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김현태라는 사람과의 관계가 과거와 완전히 달라진 것을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찍! 찍찍!”
탓! 타닷! 타다닷!
일행이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산길을 오르며 산의 중턱에 다다랐을 즈음.
칠라는 날렵한 움직임으로 커다란 나무와 나무 사이를 넘나들었다.
산이 마음에 들었는지 거친 환경을 되레 즐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칠라는 신났네.”
“지형이 꽤 마음에 들었나 봐요.”
유지한 파티는 녀석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런데 칠라가 새로운 나무로 뛰어 넘어가던 순간이었다.
쿵!
칠라가 착지하려던 굵은 나뭇가지가 무언가에 맞고 꺾여 버렸다.
“칠라!”
“찍?!”
당황한 칠라는 재빨리 양손으로 나무 기둥을 붙잡고서 균형을 잡았다.
황급히 달려나간 민유리가 녀석을 살폈지만, 다행히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
“이봐요!”
뒤이어 그녀가 크게 분노한 기색으로 소리 질렀다.
스킬을 이용하여 나뭇가지를 꺾어 버린 것이 김현태 파티의 김강우였기 때문이었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
“어이쿠, 몬스터인 줄 알았네. 쏘리!”
김강우는 태연한 표정으로 사과를 전했다.
그에 민유리는 눈을 아주 가늘게 좁혔다.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몬스터랑 헷갈리니까 그놈보고 위에서 뛰어다니지 말라고 해요.”
“찍찍……!”
나무 기둥을 타고 아래로 주르륵 미끄러지듯 내려온 칠라는 김강우를 노려보았다.
마찬가지로 김강우를 노려보던 유지한이 입을 열었다.
“김강우 씨. 그쪽은 몬스터랑 펫도 제대로 구분 못 합니까?”
“뭐요?”
“지금처럼 해가 쨍쨍한 시간대에 피아식별이 어렵다? 허, 그렇다면 무척 실망인데 말이죠.”
김현태 파티에 소속된 주제에 같은 아군도 알아볼 수 없느냐.
김강우에게 의문을 제기하는 유지한이었다.
“아, 그러니까 실수라니까요?!”
“예! 그러셔야죠. ‘실력’이 아니라 ‘실수’이기를 바랍니다. 진심으로.”
“…….”
“아군을 공격하는 사람에게 등을 맡기고 싶지 않으니까요.”
유지한은 김강우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던졌다.
입술을 꾹 다문 김강우는 몸을 홱 돌려 다시 앞으로 걸었다.
유지한에게서 칠라에게로 날아간 실프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쟤 싸가지 없어!
“하는 짓만 보면 완전 애새끼네.”
정령마저 불만을 드러낼 정도의 싸가지.
김현태 파티에 새로 들어왔다던 파티원은.
유지한의 바랐던 것보다 기대에 못 미치는 인물인 듯 보였다.
“…….”
앞에서 뒤를 살짝 돌아본 이미아는 유지한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김강우를 대신하여 미안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형. 이거 괜찮은 거 맞아요?”
“괜찮을 리가.”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함께 행동하고 있지만.
상대가 일정한 선을 넘으려고 하면 그에 맞춰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또 이런 일이 생기거든 2번 봐주지는 않아.”
적인지도 아군인지도 모를 사람과는 함께할 수는 없었으니까.
*****
이동을 개시한 지 2시간째.
산을 넘고 평지를 넘나들며 유지한은 목적지에 조금씩 가까워졌다.
별다른 사고 없이 앞으로 1시간 정도만 더 이동하면 은신처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저건…….”
“몬스터다.”
일행과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몬스터들이 출현했다.
김현태 파티는 능숙한 움직임으로 전투태세를 갖췄다.
아직 그들을 인식하지 못한 몬스터들에게 당장이라도 공격을 날릴 기세였다.
“잠깐 기다려.”
하지만 유지한은 그들을 멈춰 세웠다.
뭔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여긴 몬스터가 있을 법한 장소가 아니야.”
평범한 도로에서도 한참 벗어난 장소.
주변에 주택 따위도 존재하지 않고, 아래에서 위로 올라왔다고 한들 일반적으로 몬스터들이 거쳐 갈 만한 곳이 아니었다.
인근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몬스터라는 가능성도 있지만.
관찰 결과, 한 자리에서 배회하는 몬스터들의 행동이란 어딘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피해서 가는 게 좋겠다.”
“뭐? 저걸 그냥 두고 가자고?”
“그래.”
“개소리!”
김현태는 유지한의 의견에 반발했다.
지금 발견한 몬스터들을 쓰러뜨리는 데는 단 5분도 필요하지 않았다.
고작 한 입 거리에 불과한 몬스터들이 뭐가 무섭다고 피해 간다는 말인가.
그러기에는 김현태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무서우면 뒤에서 보고나 있어.”
“야, 잠깐…….”
김현태는 유지한을 무시하고 먼저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의 파티원들은 파티장의 뒤를 이어 달려가더니.
이내 몬스터를 향해 공격을 시도했다.
쿵! 쿠구궁—!
김현태 파티와 몬스터 무리의 충돌로 주변 땅이 흔들리고.
주위로 흩뿌려진 마력으로 인해 공기가 떨려왔다.
“우린 대기한다.”
“네.”
유지한 파티는 전투에 뛰어들지 않고 대기했다.
상황을 지켜보면서 행동할 생각이었다.
“덤벼라!!”
[지룡의 분노]
커다란 대검으로 몬스터들을 통째로 썰어 버리는 김현태.
근력이 더해지는 아티팩트를 전신에 두른 덕분에 크고 단단한 뼈마저 종잇장처럼 찢어져 나갔다.
전사로서 별다른 기교가 필요치 않은 강력함.
옆으로 따라붙은 카메라맨은 다양한 각도에서 그의 모습을 담아냈다.
“흡!”
촬영을 너무 의식하는 탓에 과도한 표정 연기나 몸짓을 섞어 가는 그의 행동은.
멀리서 유지한이 보기에도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아쉽네.’
서포터로서 그들과 오래 함께했던 덕분인지.
유지한은 자신이 빠진 김현태 파티의 합을 지켜보며 입이 근질거렸다.
파티원들이 조화롭지 않고 서로 따로 놀고 있는 느낌이랄까.
‘내가 신경 쓸 건 아니지.’
지적하려면 얼마든지 지적할 수는 있겠지만.
김현태 파티에서는 적당한 화력만 나와 주면 딱히 불만이 없었다.
그것보다는 내키지 않는 장소에서 전투가 벌어진 게 신경 쓰일 뿐.
“……?”
그때 유지한의 시야에 들어오는 물체가 있었다.
한창 전투 중인 김현태 파티를 향해 바닥에서 굴러가는 무언가.
점점 김현태 파티와 가까워지는 그 구체를 보며 유지한은 눈을 크게 떴다.
‘독이다.’
식물계 몬스터가 내뱉은 것으로 추측되는 독폭탄이었다.
독극물을 감싸는 얇은 껍질이 찢어지는 순간 공기 중으로 확산되는 방식의 독.
껍질의 색은 위장색을 입힌 듯 바닥의 색과 거의 똑같았다.
‘어째 불안하더라니…….’
전투에 집중하는 김현태 파티는 독폭탄을 아직 인식하지 못했다.
유지한은 재빨리 그것을 손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유리 씨. 저거 조준하세요.”
“저게 뭐예요?”
“독입니다.”
유지한의 요청에 민유리는 마력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그리고 화살을 쏘기 직전 그녀가 물었다.
“위험한 독인가요?”
“목숨을 위협할 정도는 아닐 겁니다.”
“그러면 그냥 터지게 둬도 될 것 같은데요?”
“예?”
“한 번 된통 깨져 봐야 자기들이 실수한 걸 알겠죠.”
“…….”
상당한 설득력이 느껴지는 민유리의 주장에.
순간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뻔한 유지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