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트라우마 (2)
벽에 등을 부딪쳤던 유지한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그는 김시후와 마찬가지로 왜곡된 공간이 아니라 전혀 다른 공간에 있었다.
‘익숙한 장비다.’
유지한은 자신의 장비를 살폈다.
남호열이 공들여서 제작해 준 물건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케로즈에서 그에게 지급했었던 장비가 몸에 걸쳐져 있었다.
‘원래 여기 쯤에 구멍이 있었는데.’
길드의 예산이 부족하다는 관계로 구멍이 뚫려있는 중고 장비를 구매하여 몸에 맞게끔 적당히 수선해 줬던 갑옷.
‘이건 택갈이한 검이고.’
명성 있는 공방에서 제작한 줄 알았으나 양산형 제품에 상표만 붙여 놓은 수준이었던 검.
항상 새로운 장비를 보급받던 다른 파티원들과 비교하면 매우 초라한 물건들이었다.
그렇지만 적당히 쓸만했고, 오랜 기간 다뤘던 장비인 만큼 그는 조금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대충 언제인지 알겠다.’
휴대폰을 통해서 날짜를 확인하던 유지한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그가 김현태 파티에 소속되어 있던 그 시절.
파티가 이제 막 2급에 올랐을 때의 시간대였다.
‘실프는 계속 응답이 없어.’
항상 붙어 다니던 실프는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다.
계약 관계상 정령계로 역소환이 되었다면 진작에 알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 못한 걸 보니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터였다.
주변 모든 것들을 살펴보던 유지한은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환각이군.”
이세계인들의 특기인 환각 계열의 마법.
이번에는 단순히 인간의 시각이나 청각 따위의 감각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을 토대로 환각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실프가 마석을 통해 타인의 기억을 보여 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다만 놀라운 건.
이 환각에서는 촉각이나 청각, 후각까지도 생생하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손으로 휴대폰을 쥐어 보면 미세한 배터리의 온도마저 느껴질 정도로 디테일이 살아있었다.
이세계인들이 비록 적이기는 해도 이러한 마법을 창조해낸 것에 놀라울 따름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걱정이네.’
이 마법에 걸려든 건 유지한뿐만이 아니었다.
마석에서 뿜어져 나온 마력의 폭풍은 주위의 모든 것을 휩쓸었다.
옆에 있던 동료들 또한 비슷한 현상을 겪고 있을 터.
한시라도 빨리 이 환각을 깨고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똑똑.
유지한은 노크 소리가 들려온 문을 바라봤다.
현재 그의 위치는 케로즈의 회의실.
현장에 나서기 전에 김현태 파티원들이 모여서 회의를 진행하는 공간이었다.
‘나 다음으로 들어오는 사람이라면…….’
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젊은 여성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김현태 파티의 영웅이자, 유지한의 옛 동료인 이미아였다.
‘어리다.’
이미아의 얼굴은 유지한이 마지막으로 마주쳤을 때보다 조금 더 어린 느낌이 있었다.
볼살이 조금 더 통통하다고 해야 할까.
이 시기에는 그녀가 음식을 평소 때보다 더 많이 먹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와삭! 와삭!
손에 감자칩을 들고 있는 그녀는 유지한의 옆자리로 다가와 앉았다.
매번 회의를 진행할 때마다 유지한의 옆은 그녀의 고정석이었다.
“너도 먹을래?”
“……난 됐어.”
유지한은 자연스럽게 이미아가 내민 갑자칩을 거절했다.
그러던 중 문득 생각했다.
‘그때와 다른 선택을 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는 분명 과거의 언젠가 이런 경험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과거와 전혀 다른 선택을 한다면, 그 선택은 어떤 결과로 돌아올 것인가.
그것이 궁금해진 그는 이미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다. 나도 하나 줘.”
“여기.”
유지한은 이미아에게서 감자칩을 받아서 먹었다.
짭짤하고도 바삭한 감자칩이었다.
과자를 받아먹지 않았던 과거와는 달라진 결과.
“…….”
그러나 딱히 변하는 건 없었다.
꽤 싱거운 결과에 입맛을 다시는 사이, 회의실의 문으로 다른 사람들이 들어왔다.
마법사 임시연과 탱커 황준호였다.
케로즈를 나온 뒤에 한 번 마주쳤던 이미아와는 다르게.
그 이후로 딱히 접점이 없는 옛 동료들이었다.
쾅!
그리고 마지막에 소리 나게 문을 열어 재낀 인물은 등에 대검을 짊어진 인물.
파티장 김현태였다.
그가 소파로 걸어오자 주위로 술 냄새가 진동했다.
임시연은 코를 매만지며 말했다.
“김현태! 너 또 아침부터 술 마셨어?”
“냄새 많이 나냐?”
“어.”
김현태는 술에 잘 취하지 않는 영웅의 몸으로 80도 이상의 술을 즐겨 마셨다.
전날 밤이 아니라 현장에 나서는 당일 아침에 마시는 경우도 허다했다.
“길드장님이 현장에 가기 전에는 술 자제하라고 하던데.”
“어차피 길드장님은 나한테 뭐라고 안 해. 쟤라면 모를까.”
김현태는 입가에 명백한 비웃음을 띄운 채 유지한에게 시선을 던졌다.
유지한은 그런 김현태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조금 불만이었는지 김현태가 말했다.
“뭐야? 왜 그렇게 꼬라봐?”
“아무것도.”
“기분 나쁘게 그딴 눈으로 보지 마.”
김현태는 자연스럽게 회의실에서도 가장 상석에 앉았다.
본래 길드장에게만 허락되는 자리였으나 어느 누구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파티가 2급으로 승급하는 데 성공하고 자신감이 넘쳐흐르는 시기.
길드장 박중섭은 이 시기가 되기 전부터 이미 김현태의 모든 편의를 봐주고 있었다.
“브리핑 시작하겠습니다.”
회의실로 들어온 직원은 오늘 파티의 스케줄을 안내했다.
오전 10시부터 3시까지는 MA 참여.
그 이후에는 간단한 인터뷰와 사진 촬영이 예정되어 있었다.
“지한 씨는 2시 40분쯤 알아서 자리를 비워 주시면 되겠습니다.”
길드에서도 극소수의 인원만 알고 있는 유지한의 신분.
유지한은 사냥이 모두 끝나기 전 눈치껏 자리를 뜨라는 지시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로서는 매우 익숙한 대우였기 때문이었다.
조직의 구성원으로 제대로 존중받지 못하는 불합리한 일.
사회초년생을 갓 벗어날 즈음에는 그런 대우에 불만을 가졌던 적도 있었다.
‘그래도 참았지.’
하지만 유지한은 참았다.
언젠가는 빛을 볼 날이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둔하다면 둔했고, 멍청하다면 멍청한 선택이었다.
‘벼룩과 다를 바가 없었군.’
과거 미국의 한 곤충학자는 벼룩을 데리고 실험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몸길이가 2~4mm 정도로 작지만, 점프를 하면 수직으로 18cm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벼룩을 작은 유리컵 안에 가둬 버린 것이다.
그러자 벼룩은 유리컵의 뚜껑에 몸을 부딪치기를 반복했고.
시간이 지나서 유리컵을 제거한 뒤에도 그 벼룩은 딱 유리컵의 높이만큼만 점프할 수 있었다.
자신이 특정한 높이보다 더 높게 올라간다면 고통을 받을 수 있다는 걸 학습한 것이었다.
‘똑같아.’
유지한은 그 벼룩과 과거 자신의 처지를 비교했다.
어쩌면 긴 세월 동안 그런 취급을 받음으로써 그 또한 학습된 것일 수도 있었다.
내가 조직에서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
아침 회의가 끝나고.
유지한은 얼굴을 가리는 복면을 착용한 채 MA로 향하는 차량에 탑승했다.
케로즈의 직원이 운전해 주는 작은 경차.
김현태 파티원들이 타고 가는 커다란 벤이 먼저 출발하면 그 뒤를 쫓아가는 차량이었다.
세간에서 파티에 대한 관심이 평소보다 높아질 때는 이런 식으로 나눠서 이동하곤 했었다.
‘일단 지켜보자고.’
유지한은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과거와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함으로써 깽판을 칠 수도 있었지만.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온 것처럼 너무 정교한 환각이었기에, 이제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지 눈으로 직접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추, 출발하겠습니다.”
운전자는 크게 긴장한 몸짓으로 시동을 걸었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길드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 직원처럼 보였다.
유지한의 그에게 말했다.
“이름이 뭐예요?”
“저요? 제 이름은 #[email protected]#”
“……?!”
운전자의 이름을 묻자 그는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는 외계어로 답변을 대신했다.
흠칫 놀란 유지한이 그를 돌아봤지만.
그는 긴장한 얼굴로 운전을 이어 갈 뿐이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건 구현할 수 없나?’
유지한은 스쳐 지나간 직원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뒤이어 그가 그의 나이나 출신 따위를 묻자 외계어 답변이 이어졌다.
기억 속에 아예 존재하지 않는 정보는 환각에도 나타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도착했습니다.”
한 공장 단지에 선언된 MA에 도착한 뒤.
유지한은 김현태 파티보다 한발 늦게 입구로 들어섰다.
그들의 짐꾼 역할을 자처했기에 입장 기록은 남지 않았다.
“왜 이리 늦었어?”
“최대한 빨리 온 거야.”
“핑계 대기는…….”
괜히 핀잔을 주는 김현태를 무시하고.
파티원들과 함께 MA에서 사냥을 진행했다.
출현한 몬스터는 2급 몬스터인 블러드 스네이크.
몸 전체에 돋아난 이빨로 인간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 뱀이었다.
IUPC마저 도저히 옹호하지 못할 만큼 흉측한 생김새를 가진 몬스터.
생김새 하나 때문에 등급이 올라갈 정도로 혐오 몬스터로 취급되는 놈들이었다.
서걱!
유지한은 처음 출현한 블러드 스네이크를 그 즉시 베어 버렸다.
너무나도 흉측하게 생긴 나머지 몸이 저절로 움직인 것이었다.
약점인 꼬리를 제대로 공격해 버린 탓에 블러드 스네이크는 그대로 즉사했다.
그러자 김현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야, 유지한! 미쳤어?”
“……아.”
“너 지금 제정신이 아니구나?”
유지한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꿀잼에서의 활동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과거를 잊고 있었다.
“깝치지 말고 평소처럼 서포팅만 해!”
김현태 파티에서 그가 맡았던 역할은 어디까지나 서포터.
서포터인 그가 파티의 딜러처럼 앞장서서 적을 해치운다는 것은.
파티장인 김현태의 뜻에 정면으로 반하는 일이었다.
설령 적을 충분히 쓰러뜨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따라서 유지한은 한발 뒤로 물러나서 파티원들을 도와주는 형태로 움직였다.
‘임시연은 여전하군.’
마법사 임시연에게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차단하고.
그녀의 안전이 어느 정도 확보될 때까지 주위를 지켰다.
공격은 썩 괜찮지만, 자기방어에 취약한 그녀의 성향 때문에 주기적으로 관리가 필요했다.
‘이쪽도 빈틈이 있고.’
유지한은 탱커 황준호가 놓쳐 버린 적들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한 자리에 묶어 두었다.
그리고는 그에게 여유가 생기거든 조금씩 넘겨주었다.
시야가 은근히 좁은 편인 황준호의 곁에서 서브 탱커 노릇을 하는 것이었다.
‘쟤 또 저런다.’
적들에게 아주 과감하게 공격을 시도하는 김현태.
이 순간에는 다른 모든 걸 젖혀두고 김현태를 커버해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몬스터를 쓰러뜨리는 일은 어지간해서 허락되지 않는다.
서포터는 몬스터에게 상처를 만들어 놓을 뿐.
마지막 일격을 가하는 건 항상 김현태여야만 했다.
‘지금 봐도 비효율적이야.’
유지한은 혀를 쯧쯧 찼다.
그가 서포터가 아니라 한 명의 딜러로서 전투에 참여했다면.
지금보다 파티의 화력이 몇 배는 더 뛰어났을 것이었기에.
혼자서도 알아서 잘 하는 이미아를 제외하면 단점이 여럿 보였다.
“후우……!”
한 차례의 전투가 마무리된 뒤.
유지한은 가방에서 깨끗한 수건을 꺼내어 피가 잔뜩 묻어있는 이미아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그때 김현태가 유지한에게 다가왔다.
잔뜩 화가 난 듯한 얼굴이었다.
“유지한! 똑바로 못해? 오늘 왜 이렇게 병신 같냐?”
“내 지팡이에 피 튀긴 것 좀 봐! 유지한, 다 너 때문이잖아!”
“옆에서 계속 혼자 겉돌더라? 서포터가 그래도 돼?”
“하여간 쓸모없는 짐꾼 새끼.”
자리에 멈춰 있는 이미아를 제외하고 하나 같이 유지한을 비난하는 파티원들.
험악한 욕설마저 섞이며 비난의 수위는 점점 높아져만 갔다.
과거에도 이만큼이나 노골적인 비난을 받은 적이 있었나, 의심이 들 정도.
그런 가운데…….
유지한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현태야.”
“뭐!”
“그리고 얘들아.”
“……?”
입가에 환한 미소를 띄운 유지한은.
김현태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다 좆까 이 새끼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