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트라우마
—온다! 온다!
몸의 크기를 모래알처럼 아주 작게 줄인 실프는.
주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통해 먼 거리에서 낯선 생명체의 접근을 감지했다.
유지한 파티는 실프의 경고가 떨어진 즉시 안전한 장소에 몸을 숨겼다.
“꽤애액!”
“푸르릉!”
“꾸아아아!”
줄지어 한쪽으로 이동하는 여러 무리의 몬스터들.
녀석들이 아스팔트 바닥을 밟을 때마다 바닥에 조금씩 균열이 일어났다.
움직이는 방향은 원정대가 떠나간 방향과 일치했다.
모두가 고흥을 벗어나려는 것이었다.
“그냥 보내요?”
“놔둬.”
이런 곳에서 체력을 낭비할 수는 없었기에.
유지한은 몬스터들의 이동을 막아서지 않았다.
고흥이 아닌 더 위쪽에서 후발대와 저 몬스터들이 전투를 치르게 되겠지.
‘여수 쪽은 레드홀이 막아 줄 테고.’
여수에서 헤어졌던 레드홀의 부길드장 정기준.
예정대로라면 그의 일행은 지금쯤 후발대와 합류했으리라.
여수에 남은 잔당은 그쪽에 맡겨 두면 문제가 없었다.
“가자.”
유지한은 몬스터가 전부 사라지고 정적이 찾아온 뒤에야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이동을 계속한 끝에 그들의 2개의 산 사이에 위치한 작은 동네에 도달했다.
대도시처럼 커다란 빌딩 따위는 없고 눈에 보이는 건 높아 봐야 2층짜리 건물뿐.
마을회관이 가장 화려한 건물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낙후된 마을이었다.
‘자동차가 하나도 없네.’
유지한은 길가를 빠르게 스쳐 지나가며 주변을 살폈다.
인기척이 없는 이 마을에는 주차된 차량이 단 1개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다른 지역으로 피난을 떠난 것이었다.
“음머어어!”
“……!”
유지한 파티는 소의 울음소리가 들려온 즉시 무기를 들고 경계 태세를 갖췄다.
그러나 막상 소리가 들려온 곳에 도착해 보니 평범한 황소가 있었다.
사람들에게 풀려나지 못한 강아지나 소 따위만 유일하게 마을에 남아있는 것이었다.
‘기분이 좀 그렇다.’
소똥 냄새를 맡으며 황소를 경계하고 있자니 유지한은 자신이 조금 초라하게 느껴졌다.
평범한 동물을 몬스터로 바꿔 버린 그놈들 때문에 괜히 경계심만 높아진 탓이었다.
“이거 먹어.”
“왈! 왈!”
주인들이 대피할 때 음식을 주고 간 모양이지만, 어떤 녀석들의 밥그릇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그에 안쓰러움을 느낀 민유리는 유지한의 이해를 구하고 동물들에게 근처에 있던 사료와 물을 많이 제공했다.
‘생각해보니 은신처는 전부 바다 근처에 있었군.’
이세계인들의 은신처는 대부분 바다를 옆에 끼고 있었다.
아무래도 비상시 바다로 달아나는 전략을 사용하려는 듯했다.
그걸 눈치챈 유지한은 어느덧 가까워진 은신처로 숨어들기 전.
작은 항구에 배가 있는지 먼저 살폈다.
‘저건가.’
한 10명 정도가 탑승할 수 있는 어선 1대가 정박해 있었다.
유지한 파티는 은신처에 앞서 그 배를 먼저 조사했다.
“이건…….”
외부에서 바라볼 때는 지극히 평범한 어선.
하지만 배 안에는 폐사된 물고기들과 이미 사용된 주사기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김시후는 그것을 두고 바다에서 물고기를 낚아서 약물을 주입했다고 추측했다.
연구용으로 사용된 어선인 셈이었다.
“여기 ‘초코 우유’가 하나 남았어요.”
김시후는 배 안에서 아직 사용하지 않은 주사기 하나를 찾아냈다.
앞서 밝혀진 내용에 따르면 하얀색 ‘우유’는 인간에게 몬스터를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는 약물.
검은색 ‘초코 우유’는 몬스터를 돌연변이로 변이시키는 약물이었다.
“찍! 찍찍!”
주사기에서 본능적으로 위협을 감지한 칠라가 온몸의 털을 곤두세웠다.
민유리가 녀석을 안심시키는 가운데, 유지한이 말했다.
“저건 유리 씨가 들고 계세요.”
“네? 제가요?”
“마력 화살에 담아서 쏠 수 있죠?”
“그 정도는 가능해요.”
“잘하면 역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겁니다.”
이세계인들로부터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초코 우유에 적응한 몬스터들은 돌연변이로 변해 버리지만.
반대로 적응하지 못한 몬스터들은 발작을 일으키거나 힘을 잃고 죽어 버린다.
그리고…….
‘이미 돌연변이가 된 개체에게 초코 우유가 주입되면 높은 확률로 부작용이 일어난다.’
실패 확률이 꽤 높은 것을 고려했을 때.
저 약물은 무기로 사용될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이었다.
앞서 주방에서 생산된 것들은 다 처분해 버렸어도 하나쯤 가지고 있는 건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다.
“찍찍! 찍찍찍!”
“칠라가 ‘저거 당장 갖다 버려!’라는 것 같아요.”
—우히히! 칠라는 겁쟁이래요!
실프는 약물을 경계하는 칠라를 놀려댔다.
그러자 칠라가 실프를 찌릿 노려보며 허공에 주먹질을 했다.
“찍!”
—히익!
그 위협 한 번에 겁을 집어먹고.
유지한의 등 뒤로 숨어 버리는 실프였다.
*****
배의 조사를 끝낸 유지한 파티는 공간 왜곡에 숨겨진 은신처로 숨어들었다.
이전과 다르게 입장에 별다른 인증 따위가 필요 없는 장소였다.
“아무도 없는데요?”
“정말.”
그런데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들어왔건만.
사무실처럼 꾸며진 은신처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들려오지 않았다.
“기다려봐.”
유지한은 이세계인들의 기억을 더듬었다.
그 기억에 따르면 이곳은 적들에게 필요한 물건 따위가 보관되어 있기에 고흥에서 은신처 겸 창고와 보급소의 역할을 맡고 있는 장소.
꽤 중요한 거점이라 내부 규칙에 의하면 8명 이상의 인원이 상시 상주하고 있어야만 했다.
‘물건들은 다 사라졌군.’
마법 스크롤이 놓여 있어야 하는 선반은 텅 비어 있었고, 각종 쓰레기만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유지한은 땅바닥에 신발 밑창 모양으로 새겨진 자국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물기를 머금은 모래가 그의 손끝에 묻어났다.
‘1시간 이내에 새겨진 자국이다.’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의 흔적.
엘리트들의 이동 동선은 제대로 잡아낸 모양이었다.
비록 놓쳐 버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잠깐.”
그때 유지한의 고개가 홱 하고 돌아갔다.
사무실 안쪽에서 이질적인 마력의 파동이 감지된 덕분이었다.
‘아직 여기 남아있었나?’
유지한 파티는 발소리를 죽인 채 마력이 느껴지는 장소로 달려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다른 파티원들도 묘한 마력을 느끼고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굳게 닫혀있는 문을 유지한이 활짝 열었을 때.
“저게 뭐죠?”
“마법진?”
바닥에 원형의 마법진이 새겨진 장소에 도달했다.
조금 전까지 느껴진 마력은 그 중심에 놓인 물건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건 마석이에요!”
“엄청난 크기네…….”
윤동길은 사람 머리보다 큰 크기의 마석을 보고서 혀를 내둘렀다.
마트에서도 흔히 판매하는 최하급 마석 따위가 아니라.
인위적인 생산이 불가능하여 경매장에서나 구할 수 있는 최상급 마석이었다.
일반적인 결계에 투입되는 마석보다도 질이 훨씬 더 좋아 보였다.
—지한! 저건 위험해!
“……!”
조금 전까지 장난스럽게 행동하던 실프가 진지하게 경고를 해왔다.
그 누구보다 마력에 친숙한 정령이 이렇게 경고할 정도라니.
불길함을 감지한 유지한은 마석을 깨부술 생각으로 달려들었다.
전리품으로 챙겨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푸화아악——!
그때 마법진의 중앙에서 대량의 마력이 터져 나왔다.
흡사 거대한 쓰나미와도 같은 마력의 폭풍!
마석에 닿기 직전이었던 유지한의 몸은 그 충격으로 튕겨져 나갔다.
“컥!”
벽에 등을 세게 부딪힌 유지한은 숨을 토했다.
뒤이어 이를 깍 깨문 김시후가 마석을 향해 지팡이를 겨눴다.
아무리 질이 좋은 마석이라도 외부에서 강력한 충격을 가한다면 부숴버릴 수 있었다.
“……어라?”
그런데 김시후는 팔을 앞으로 뻗은 자세로 굳어버렸다.
갑자기 주변 풍경이 완전히 뒤바뀌었기 때문이었다.
바닥에 새겨진 마법진과 대량의 마력을 뿜어내던 마석은 온데간데없고.
‘칠판?’
가로로 기다란 초록색 칠판이 보였다.
마치 어느 교실의 칠판과도 비슷한 생김새였다.
그것도 김시후가 다녔던 푸른 달 영웅 학원의 칠판과 똑 닮았다.
‘이게 뭐야?!’
심지어 김시후는 책상에 앉아 있었고.
몸에는 익숙한 교복을 착용한 상태였다.
딩동댕동!
교실의 스피커에서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책상에 앉아 있던 학생들이 의자를 뒤로 밀어내며 우르르 일어났다.
혼란스러운 감정을 정리하지 못한 김시후는 말없이 그대로 멈춰 있었다.
툭.
곧이어 김시후의 머리 위로 무언가가 날아왔다.
모자의 굴곡을 타고 눈앞으로 떨어지는 하얀색 물체.
공책의 일부를 찢어내서 둥글게 뭉친 쓰레기였다.
툭. 툭.
계속해서 쓰레기가 날아오자 김시후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한 남녀 무리가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귀쟁아! 왜 멍때리고 있냐?”
“야. 그렇게 너무 어려운 표현 쓰면 엘프들은 이해 못 해.”
“엘프라고 부르지 마. 쟨 반쪽이라 외모도 딸리잖아.”
“푸하하하!”
“…….”
아무래도.
여긴 푸른 달 영웅 학원이 맞는 모양이었다.
*****
“끝났군.”
드넓은 바다에 떠 있는 소형 유람선.
그 안에서 이세계인들은 자신들이 숨겨 놓은 함정이 발동된 것을 인지했다.
추격해오는 영웅들이 은신처의 위치를 찾아내는 방법은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은신처로 올 것을 알고 있으니 함정을 파두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마석이 아까운데…….”
“다시 구할 수도 없는 거잖아.”
최상급 마석은 대량의 몬스터에게 명령을 내리는 데 사용할 수 있고.
물리 결계를 설치하여 지구인들을 한곳에 가둬 버릴 수도 있는 유용한 물건이었다.
정부와 영웅들의 눈을 피해 음지에서 그 물건을 구하는 건 쉽지 않았던 일.
그중 하나를 소모해 버린 것에 아쉬워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 정도면 충분히 제값을 했어.”
“진심이야?”
“그래.”
하지만 리우스는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석 하나로 추격대를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다른 것보다 유지한이라는 정령사가 문제였다고.”
수준이 높은 영웅들을 속여 넘길 정도로 정교하게 다듬어진 환각 마법.
유지한은 이 지구에서 처음으로 그걸 전부 꿰뚫어 보는 인물이었다.
‘제리가 괜히 고평가를 내린 게 아니었어.’
어지간한 마법으로 그를 속일 수 없다고 판단하여.
리우스는 과감하게 마석을 투자한 것이었다.
“몇 분 뒤에는 정신이 갈기갈기 찢어져 버리겠군.”
“아무렴. 대장님이 만든 마법이니까.”
“근처에 있었으면 우리까지 말려들었을 테지.”
세밀한 제어조차 불가능한 고유 마법의 위력을 두고 대화를 나누는 한편.
제리는 바닥에 드러누워서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빼애애액!”
“…….”
“빼애애애액—!”
한동안 그녀를 무시하고 있던 리우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리.”
“빼애애액!”
“제리, 제발 좀 닥쳐!”
“그치만! 그치만 우리 자기가……!”
제리는 눈가에 눈물까지 맺힌 채 울먹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설치한 고유 마법의 영향권에 들어가는 사람은.
강력한 환각을 경험하고 정신이 파괴되어 백치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었다.
“유지한의 몸은 나중에 너한테 넘겨줄게.”
“살아있는 송장은 싫어!”
“싫어도 받아들여.”
“빼애애액!!”
유지한과의 재대결을 치른 후.
그를 제압하여 노예처럼 부리고 싶었던 제리로서는 최악의 결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