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추격 (5)
“방금 만든 거예요?”
“네.”
유지한은 남호열에게서 반지를 받아서 살폈다.
커다란 깃털의 일부를 잘라 내어 손가락에 착용할 수 있도록 동그랗게 엮어낸 반지였다.
무게감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고 언뜻 보면 애들 장난감 같기도 했지만.
사륵—
손가락에 착용하는 순간.
남호열이 보여줬던 것처럼 반지를 착용한 손이 투명하게 변했다.
‘어제부터 계속 건드리고 있더라니.’
틀림없이 인비저블 버드의 능력인 투명화 스킬이었다.
지속 시간이 짧아서 몇 초 만에 스킬이 해제되긴 했지만 말이다.
유지한이 조금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혹시 이런 거 더 만들 수 있겠어요?”
“어……. 시도는 해볼게요.”
“기왕이면 반지 말고 팔찌로 해 주세요.”
유지한은 재료가 너무 적게 들어가는 반지 대신 두께감이 있는 팔찌를 요청했다.
투명화 스킬의 적용 범위를 지금보다 더 넓히기 위해서였다.
‘잘하면 강력한 무기가 되겠군.’
생각지도 못한 아티팩트를 두고 유지한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투명화 스킬을 통한 잠입이나 기습 공격까지도 고려하는 것이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또 아티팩트를 만들어야 했기에 아주 희망적인 관측이었으나.
열의를 불태우는 남호열을 보고 있자니 가능할 것도 같았다.
*****
고흥에서 이세계인들의 은신처로 이동을 시작한 지 약 1시간.
“찾았습니다!”
“……?!”
도착한 장소에서 끝내 공간 왜곡이 감지되자.
원정대에서 은근히 불만을 드러내던 영웅들은 모두 경악했다.
거짓말만 같던 유지한의 말이 사실로 밝혀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됐습니까?”
“크흠! ……그래요.”
유지한은 머쓱하게 웃는 그들을 이끌고서 은신처를 덮쳤다.
콰직!
여수에서처럼 지문이나 마력의 인증을 요구하는 장치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선전포고를 하듯 전부 다 부숴 재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어떻게 왔는지는 몰라도 여기까지다!”
이세계인들은 은신처로 침투한 영웅들을 바짝 경계했다.
그들은 영웅들이 올 줄 알았다는 것처럼 미리 진형을 갖춰 둔 상태였다.
아마도 지도를 통해 터미널의 영웅들을 계속 추적하고 있었을 터.
“공격!”
쾅! 쾅! 쾅! 쾅!
무너지고, 부서지는 은신처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이세계인들.
고흥 원정대의 화력을 총동원하여 은신처가 망가지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몬스터를 동원한다고 한들 기본적인 전투력은 이세계인들보다 한국의 영웅들이 더 앞서 있었다.
서걱!
몬스터들의 앞을 막아선 유지한은 쉴 새 없이 검을 휘둘렀다.
하얀 도화지를 물감으로 물들이는 화가의 붓처럼.
그의 검은 이 장소를 몬스터들의 피로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꺄하하!
머리 위에서는 실프가 빛을 번쩍거리며 마법을 난사했다.
푸후우웅!
마결정 덕분에 마력의 총량이 큰 폭으로 늘어난 실프는.
유지한을 중심으로 거친 돌풍을 흩뿌리며 적들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이제는 하나하나 명령하지 않아도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는 것이었다.
—나 잡아봐라!
말문이 트이니 시끄럽고도 장난기가 많은 성격임이 드러났지만.
예측이 어려운 타이밍에 날아드는 실프의 바람은 몸놀림이 재빠른 새들조차 피할 수 없었다.
커다란 도움이 된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유리 누나!”
“확인했어!”
그 옆에서는 민유리와 김시후의 연계마저 조화롭게 이루어지며.
유지한 파티는 고흥 원정대원들의 이목을 끌었다.
“저 사람들 잘 싸우네.”
“3급 맞지?”
유지한 파티의 움직임을 보고 웅성거리는 사람들.
그들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원정대 사이로 퍼져 나갔다.
한편, 상황이 어느 정도 종료되자 유지한은 혀를 찼다.
‘여기가 아니야.’
은신처에서 사로잡은 적들의 수준이나 반응을 보아하니.
여수에서 건너온 이세계인들은 이곳에 들리지 않은듯했다.
엘리트라는 것들은 은밀한 동선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그놈들이라면 어디로 갔을까…….’
역지사지의 자세로 엘리트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유지한.
그런데 그때 속보가 들어왔다.
수색조가 근처에서 아주 수상한 움직임을 포착한 것이었다.
“대량의 몬스터가 이동하고 있다고요?”
“네! 전부 위쪽으로 올라가려는 것 같습니다.”
여수에서는 박재경의 활약으로 IUPC의 계획이 크게 틀어졌지만.
별다른 일이 없었던 고흥에서는 놈들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본격적인 움직임을 개시했다.
인간들에게 조종당하는 몬스터들이 전부 수도권으로 몰려가는 초유의 사태.
결계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원정대에서 여러 의견이 튀어나왔다.
“IUPC가 이동하지 못하도록 막아서야 합니다!”
“하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이세계인들에게 있잖아요?”
“그래서 저걸 보고만 있자고요?”
“차라리 후발대와 합류를 해서…….”
“아니, 그게 아니라…….”
모두가 방향성을 두고 옥신각신하던 와중.
의견은 점차 후발대와 합류하자는 쪽으로 모였다.
그때 생각에 깊게 잠겨있던 유지한이 말했다.
“여러분들은 모두 위로 올라가서 후발대와 합류하세요.”
“그 말씀은?”
“이세계인들은 저희가 쫓겠습니다.”
“……!”
유지한 파티는 원정대에서 떨어져나와 이세계인을 계속 쫓겠다는 뜻을 밝혔다.
현재 적들에 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인물은 유지한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가 가진 정보는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변해 버릴 터.
그는 정보의 가치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이세계인들을 찾아낼 생각이었다.
그러자 박재경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아니요. 재경 씨와 윤도하 파티는 이분들과 함께 가세요.”
“그런……!”
“재경 씨는 지금 싸울 때가 아닙니다.”
고유 스킬의 부작용으로 박재경의 컨디션과 전투력은 큰 폭으로 떨어졌다.
몬스터와의 전투에서도 제대로 된 힘을 내보일 수가 없는 상황.
그녀는 당장 몸을 회복하는 일에 집중하는 편이 옳았다.
“하지만 위험하잖아요!”
“위험해지면 알아서 몸을 빼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굳이 도와주시겠다면, 힐러를 한 분 데려가는 거로 하죠.”
박재경은 조금 답답해 보이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은 자신이 나설 타이밍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었다.
이내 그녀의 요청으로 유지한 파티에 젊은 남자 힐러가 한 명 따라붙었다.
뒤이어 유지한이 남호열을 향해 말했다.
“아쉽지만 호열 씨도 이분들을 따라가는 편이 낫겠습니다.”
“그, 그럼 이거라도 받아 주세요!”
“……!”
안전상의 이유로 고흥 원정대를 따라가게 된 남호열.
그는 인비저블 버드의 깃털로 만든 팔찌 1개를 유지한에게 건넸다.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해 끝내 아티팩트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완성도를 더 높이고 싶었는데…….”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유지한은 그것을 받아서 자신의 팔에 착용했다.
이미 그가 착용할 것을 가정하고 만들어진 덕분에 손목 사이즈가 딱 맞아떨어졌다.
새로운 아티팩트를 두고 크게 만족한 유지한이 말했다.
“나중에 안전한 곳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
고흥 원정대가 후발대와의 합류를 위해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사이.
따로 떨어져나온 유지한 일행은 그들과 반대로 걸음을 옮겼다.
김시후는 좌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되게 조용해졌어요.”
처음 기차에 탑승할 때만 하더라도 1천 명 정도로 시작된 원정대.
사고로 인해 그 인원이 계속해서 나뉘더니.
결국, 유지한 파티를 제외하면 힐러 1명밖에 남지 않았다.
“저희만으로 괜찮을까요?”
“찍찍…….”
민유리는 파티의 안전을 걱정했다.
1천 명이 함께 움직일 때도 여러 혼란을 겪었었는데.
지금 남은 건 칠라와 외부인을 포함하더라도 겨우 5명뿐.
추격을 계속하자는 유지한의 뜻에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걱정은 지극히 타당했다.
“문제없습니다.”
유지한은 파티원들을 안심시켰다.
위험해지면 언제든지 달아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다 근거가 있는 자신감이었다.
육지뿐만 아니라 실프의 마법을 이용해서 물속을 가로질러 갈 수도 있었으니까.
그에게 있어서 이동의 제한은 사라진 것이나 다음 없었다.
‘나도 이젠 정령사가 다 됐군.’
유지한은 머리 위의 실프를 바라봤다.
이 장난꾸러기 같은 정령은 어느덧 그의 자신감이 되어 주었다.
녀석이 말문이 트인 것에 뿌듯함마저 느끼게 되었으니.
세간에서 그를 부르는 정령사라는 타이틀이 이제는 그리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저기…….”
“……?”
그때 유지한 파티와 함께 이동하는 힐러가 입을 열었다.
그의 눈동자는 유지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왜 그러시죠?”
“내 얼굴 모르겠어요?”
“예?”
“아니, 계속 눈치를 못 채는 거 같아서.”
“그게 무슨 말인지…….”
마치 유지한을 아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러나 유지한은 그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게 크게 답답했는지 힐러는 직접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나 이동길이야.”
“이동길?”
“유지한, 너랑 영웅 학원 동기인 이동길이라고.”
“……아!”
유지한은 그제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과거 영웅 학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당시.
같은 반에 분명 이동길이라는 힐러가 있었다.
심지어 2학년 1학기 때는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 1달간 임시로 파티를 맺은 적도 있었다.
“야, 진짜 오랜만이다!”
“늦게라도 알아보긴 하는구나.”
“졸업한 지 너무 오래 지나서 잘 몰랐어.”
유지한은 머리를 긁적였다.
서로 친한 사이라거나 졸업 전에 연락처를 나눈 것도 아니었기에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내 그가 이동길의 장비에 새겨진 로고를 바라보며 말했다.
“해피 타임에 들어갔었구나.”
“운이 좋았어. 7년 전 해피 타임에는 힐러가 많이 모자랐거든.”
“지금 따라온 것도 날 알고 있어서 그런 거야?”
“거의 그렇지.”
유지한은 오랜만에 재회한 이동길과 대화를 나눴다.
단번에 파티에서 존재감이 상승한 이동길은 유지한을 두고서 신기하다는 반응이었다.
“뉴스에서 네 이름을 발견했을 때 깜짝 놀랐는데!”
“내가 너였어도 놀랐을걸.”
유지한은 영웅 학원에서 늘 중하위권의 성적을 유지했다.
몸놀림이나 무기술은 썩 나쁘지 않았지만.
스킬 활용 수업에서 매번 최하위의 점수를 기록하던 학생.
그게 주변에서 유지한을 바라보던 평가였다.
그랬던 그가 몇 년 만에 영화와 정령사로서 이름을 널리 알렸으니.
과거에 그를 알던 사람으로서는 놀라워할 수밖에 없었다.
“……너 옛날에 우리가 과제 때문에 파티 맺었을 때 기억해?”
“조금은.”
“솔직히 말하면 난 그때 네가 파티에 묻어간다고 생각했었어.”
스킬 하나 사용하지 못하는 영웅이라는 조건.
영웅 학원에서 딱히 빼어난 능력이 없었던 유지한은.
과제를 함께할 파티원으로서 그리 선호되지 않는 영웅이었다.
“하지만 사회에서 겪어 보니 알겠더라. 그게 아니었다는 걸.”
“…….”
“이제 와서 이런 걸 말하는 이유는……. 그냥, 아주 가끔 그때 생각이 나더라고.”
1달 정도를 함께했었던 학생 시절의 유지한을 뒤늦게나마 인정하는 이동길이었다.
그것은 동시에 타인을 무시했던 자신의 과거에 대한 참회이기도 했다.
“어떤 말인지 이해했어. 고맙다.”
유지한은 그의 솔직한 고백이 썩 나쁘지 않았다.
오래전 자신의 노고를 인정받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 좋긴 한데…….’
앞장서서 이동하는 유지한은 입가에 씁쓸한 웃음을 띄웠다.
케로즈에서 7년간 붙어 다닌 김현태에게서는 단 한 번도 받지 못했던 인정.
그것을 얼굴도 알아보지 못했던 옛 지인에게 받고 있자니, 굉장히 묘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