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추격 (4)
유지한 일행은 이세계인들의 배를 쫓아 바닷속에서 헤엄쳤다.
실프의 마법이 더해진 덕분인지 물속에서 헤엄을 친다는 느낌보다는 조금 무거워진 공기 속에서 떠 있는 느낌이었다.
민유리는 그것을 두고 바닷속을 날아다니는 것 같다고 표현했다.
“5분 지났습니다.”
밤바다에서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건 빛을 밝히는 마법과 추적용 아티팩트에서 보내오는 신호뿐.
그들은 단 1초도 낭비하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그리하여 육지에 다다랐을 때.
닻을 내린 이세계인들의 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긴 고흥이군.’
유지한은 바다를 가로질러 전라남도 고흥에 도착했음을 인지했다.
이곳은 여수처럼 또 다른 원정대가 도착해 있는 지역이었다.
“아무도 없나?”
“인기척은 없습니다.”
이세계인들의 배에는 아무도 탑승하고 있지 않았다.
몬스터와 배에 실려 있던 짐들도 전부 다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었다.
유지한 일행은 그렇게 배 내부를 탐색하다가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어디로 간 걸까.”
“이제 어쩔까요?”
“흐음…….”
다음 행동 방향을 놓고 고민에 빠진 사람들.
이내 김시후와 민유리는 물론이고 윤도하 파티원들까지 전부 유지한을 힐끔거렸다.
여수에서 결성된 이 그룹은 어느새 많은 부분을 유지한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조금 부담스럽네.’
그 대단한 능력을 가진 박재경마저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으니.
묘한 기대를 짊어지게 된 유지한은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고흥에 위치한 이세계인들의 은신처도 대부분 파악하고 있습니다.”
“오오…….”
“다만 저희끼리 움직이기보다는, 이곳에 도착한 원정대와 먼저 합류를 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저도 그 말에 동의해요.”
유지한은 고흥에서 활동하는 원정대와 합류할 계획을 세웠다.
지역은 다르다더라도 이세계인들의 문제는 결국 하나로 이어질 테니.
여수에서 벌어진 일들을 알린다면 그들의 도움을 구할 수 있을 터였다.
“일단 근처에서 조금 쉬죠. 다들 지쳤습니다.”
유지한 일행은 인근에 있는 민가로 이동했다.
시간은 이미 어두운 새벽에 장비도 물에 젖어서 무거웠고 체력도 많이 떨어진 상태라서 모두에게 휴식이 필요했다.
제때 쉴 줄 아는 것도 하나의 실력이라고 볼 수 있는 법.
“불침번은 돌아가면서 합시다.”
“제가 먼저 할게요.”
일행은 이미 피난을 떠난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주택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유지한이 불침번을 서게 된 순간.
그는 가까이에 있던 남호열이 보이지 않는 걸 발견했다.
주름지게 젖혀진 이불을 보아하니 조금 전에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어디 가셨지?’
유지한은 마당으로 나와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남호열은 넓은 마당의 구석에서 고개를 내린 채 무언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찾았다!
실프가 목소리를 내자 남호열이 퍼뜩 유지한을 돌아보았다.
“호열 씨. 뭐하고 계세요?”
“아, 전에 주셨던 물건을 좀 보고 있었어요.”
남호열에 손에 들려있는 건 전주에서 사냥했던 인비저블 버드의 깃털이었다.
“이건 제가 원하는 데 사용하라고 하셨잖아요.”
“그랬죠.”
“너무 좋은 소재라서 계속 고민이 되네요.”
남호열은 무척 밝은 목소리였다.
보존 상태마저도 A급인 소재를 두고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싼 소재인 만큼 팔아 버리는 것도 좋겠는데…….”
“그럴 일은 없습니다.”
유지한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인비저블 버드의 깃털은 이미 남호열의 성장을 위해서 투자하겠다고 못을 박아 둔 소재.
설령 아티팩트를 만드는 데 실패하더라도 아까워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 그의 대답에 남호열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한 10초쯤 지났을까.
“저기, 지한 씨.”
“예.”
“저 괜히 따라온 걸까요?”
유지한 파티의 대장장이로서 원정에 참여한 입장.
남호열은 자신이 원정대의 방해가 되는 건 아닐까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지한은 즉답했다.
“아니요.”
“…….”
“호열 씨는 여기에 필요한 사람입니다.”
찢어진 장비를 꿰매거나 날을 갈아주는 등.
남호열이 원정대의 장비를 수선해 준 횟수만 이미 15번을 넘겼다.
대장장이로서의 역할은 톡톡히 해 주고 있는 셈이었다.
“아까 전의 일 때문에 그래요?”
“뭐, 그렇죠.”
괴래에게 영웅들이 잡아먹혔을 때.
남호열은 자기만 아니었다면 영웅들이 괴래를 더 빠르게 벗어나서 이세계인들을 놓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와이프한테 멋진 척은 다 하고 왔는데, 창피하게도…….”
“하지만 실프는 그 덕분에 말을 하게 됐죠.”
그가 남호열을 걱정하지 않고 곧바로 괴래의 몸을 빠져나왔다면.
괴래의 위장에 숨겨진 마결정을 바로 코앞에서 놓쳐 버렸을 수도 있었다.
그때의 위기는 절호의 기회로 변한 것이었다.
—우히히! 남호열은 바보!
“너 말투가 그게 뭐야.”
—아앗!
유지한이 실프의 머리에 꿀밤을 때렸다.
그리고는 남호열에게 말했다.
“언젠가 내 아이가 말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자랐을 때, 오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생각해보세요.”
“아이한테요?”
“분명 존경받는 아버지가 되실 겁니다.”
“하하, 그랬으면 좋겠네요.”
“곧 태어날 애 이름은 지어 두셨어요?”
“아직이요. ……괜찮으시면 지한 씨가 하나 지어 주실래요?”
“예? 제가요?”
“괜찮은 이름이면 후보로 삼아 둘게요.”
“으음, 작명에는 별로 재능이 없는데…….”
두 남자의 대화로 밤이 깊어져 갔다.
*****
다음 날 아침.
체력을 회복한 유지한 일행은 간단한 점검을 마치고 고흥의 버스터미널 근처로 이동했다.
그곳은 고흥으로 내려온 해피 타임 길드와 주작 길드가 모일 예정이었던 장소였다.
‘여기서 한바탕 싸웠나 보군.’
전투를 치른 흔적이 남아있는 버스터미널.
부서진 버스들과 굴러다니는 타이어가 유지한의 눈에 들어왔다.
이런 상황이라면 이미 자리를 떠났을지도 몰랐다.
“어! 저기!”
그때 김시후가 터미널 건물 안쪽에서 누군가를 발견했다.
전용 장비를 착용하고 있는 영웅이었다.
그 또한 유지한 일행을 발견하고 부서진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쪽은……. 설마 박재경 씨?!”
“맞습니다.”
윤도하 파티를 알아보는 영웅들.
가까이서 마주한 그들은 예상했던 대로 해피 타임과 주작에 소속된 영웅들이었다.
대표로 나온 해피 타임의 부길드장이 박재경에게 물었다.
“여수에 계셔야 할 분들이 왜 고흥에 계십니까?”
“그게…….”
박재경은 그들에게 간략한 사정을 전했다.
주로 여수에서 도망친 이세계인들이 고흥에 진입했다는 내용이었다.
“혹시 마주치지 않았어요?”
“아니요. 그런 사람들은 못 봤습니다.”
“고흥에서는 지금 어떻게 움직이고 계신 거예요?”
“어젯밤에 도착해서 넓게 수색조를 보내고 있습니다.”
테이머가 꽤 많은 편인 해피 타임에서는 주로 펫들을 이용하여 고흥을 수색하고 있었다.
다만 그들은 여수 원정대와 달리 환각에 빠져 시간을 많이 낭비해 버렸다.
그 때문에 밤새 수색을 벌였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진척이 없었다.
“아, 마침 저기 수색조가 오네요! 곧 회의를 진행할 건데 함께하시겠습니까?”
“그러죠.”
3시간 전에 나갔던 수색조가 다시 돌아옴에 따라 터미널에서는 회의가 진행됐다.
“항구에 수상한 배 하나가 들어온 걸 발견했습니다!”
“그건 저희가 쫓던 겁니다. 지금 거기에는 아무도 없어요.”
“어……. 그러면 못 보던 몬스터를 몇 개 발견한 것 외에 별다른 특이 사항은 없습니다.”
“이세계인은?”
“인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안타깝게도 돌아온 수색조는 이세계인들이 타고 온 배 외에 딱히 영양가 있는 정보를 가져오지 못했다.
밤중에 이세계인들과 몬스터 무리가 단체로 움직였을 텐데도 발견하지 못한 걸 보면, 마법을 통해 모습을 숨긴 모양이었다.
“지금보다 수색조를 더 넓게 풀어야 합니다!”
“이럴 게 아니라 아예 자리를 옮겨 버리죠.”
“맞습니다. 터미널에 계속 모여 있어 봤자 달라질 게 없으니까요.”
…….
…….
내부 회의에서 원정대의 행동 방향에 대해 의견이 오갔다.
수색조를 더 풀어보자는 사람들과 아예 다른 장소로 이동하자는 사람들.
그 외에도 여러 방법이 제시되었지만.
이렇다 할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지는 않았다.
그때 박재경과 잠시 시선을 교환한 유지한이 말했다.
“제가 놈들의 은신처를 알고 있습니다.”
“실례지만 누구시죠?”
“이 바보야! 그 정령사잖아.”
“아, 저 사람이…….”
유지한을 알아본 사람들이 작게 수군거렸다.
그 사이에서 한 남자가 말했다.
“당신이 뭔데요?”
“예?”
“뭐 하는 사람이길래 그놈들 은신처를 알고 있냐고요.”
유지한의 말을 의심하는 그였지만.
박재경이 재빠르게 나섰다.
“저분을 믿을 수 있다는 건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박재경 씨가요?”
“유지한 씨는 저와 같은 여수 원정대의 공동 리더입니다.”
“……?”
유지한이 원정대장이라는 그녀의 선언에.
몇몇 사람들이 미간을 찌푸리거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말을 꺼낸 남자도 그와 같은 반응이었다.
“레드홀의 정기준 씨는 어디로 가고요?”
“기준 씨는 지한 씨께 자리를 양보하셨습니다.”
“왜요? 저 사람은 3급이잖아요! 급이 좀 낮은데?”
“그만큼 기준 씨도 저분을 인정하신 거죠.”
“원정대가 놀이터도 아니고, 참 이해가 안 되네…….”
그는 자신보다 못나 보이는 사람이 더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번 원정이 끝나면 각자의 기여도에 따라 국가에서 포상금 따위의 보상이 주어질 텐데.
그때 유지한이 더 좋은 보상을 얻어가는 것에 불만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래서요?”
“……네?”
민유리가 던진 한마디에.
이의를 제기한 남자는 잠시 벙쪘다.
“이해가 안 돼서 어쩌라고요? 그쪽은 여수에 없었잖아요.”
“아니…….”
“지한 씨는 영웅부와 원정대가 인정한 리더에요. 당신이 뭐라 말할 사안이 아니라고요.”
민유리의 지적에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뒤이어 그녀가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 파티장을 함부로 깔보지 마세요.”
“찍!”
조금 화가 난 듯한 민유리와 칠라의 태도에.
내심 유지한을 무시하던 사람들은 동시에 움찔했다.
“저도 그와 완전히 똑같은 의견입니다.”
심지어 박재경까지 민유리에게 크게 동조했다.
두 명의 여인이 만들어 내는 살벌한 분위기에 회의실이 잠시 조용해졌다.
‘박재경까지 이렇게 나올 줄이야.’
‘평소에 저런 성격이 아닐 텐데?’
‘다들 감싸는 걸 보니까 진짜 뭐가 있긴 하나 봐.’
두 사람 덕분에 유지한은 편하게 말을 이어갈 수 있었다.
*****
유지한의 주도로 진행된 회의가 마무리되고.
터미널을 떠나기 전 주어진 잠깐의 여유 시간 동안 유지한은 파티원들과 대화를 나눴다.
향후 전투에서 서로의 호흡을 어떻게 맞출 것인가에 대한 내용들이었다.
“지, 지한 씨!”
그때 칠라의 곁에서 머무르던 남호열이 유지한을 호출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파티원 모두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다들 그를 보고서 화들짝 놀랐다.
“헉!”
“세상에!”
“손! 호열 씨 오른손 어디 갔어요?!”
남호열의 오른손이 마치 잘려나간 것처럼 손목까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때 남호열이 왼손으로 허공을 만지작거리자 다시 오른손이 나타났다.
유지한은 그의 손에 들린 물건을 보고서 눈을 크게 떴다.
“설마…….”
“그 깃털입니다!”
인비저블 버드의 깃털로 만들어진 반지 아티팩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