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추격 (3)
유지한이 실프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실프는 동그란 구체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볼링공과 같은 크기에서 작은 구슬 크기로 바뀌는 등 크기 조절에는 자유로웠지만.
언제나 둥근 형태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두근! 두근! 두근!
실프가 몸 전체에서 일정한 주기로 커다란 진동을 내보이며.
진동이 울릴 때마다 그 형체가 괴이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유지한을 뒤따라 온 김시후가 그 광경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형! 저건 대체……?”
“마결정을 대량으로 흡입하더니 이상해졌어.”
초대 계약자인 에르나 하스가 죽은 후 유지한이 새로 계약을 맺을 때까지.
실프가 지팡이에 들어가 있었던 그 기간을 제외하면 김시후는 10년이 넘는 세월을 녀석과 함께했다.
그런 그조차 이런 일을 겪는 건 처음이었다.
‘단기간에 많이 흡수해도 효과가 없을 거라더니.’
윤도하는 마결정을 입수하거든 그것을 장기간에 걸쳐 흡수시키는 걸 권했다.
이를테면 폭식이 아니라 균형 잡힌 식사를 하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 윤도하조차 놓친 게 하나 있었다면.
자신의 정령에게 지금처럼 넘쳐날 정도로 많은 마결정을 한 번에 먹여 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전례가 없는 일인 만큼, 자칫 잘못하면 부작용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
“실프! 실프!”
실프는 계약자인 유지한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외부로 밝은 빛을 뿜어냈다.
화아아악——!
시야가 온통 초록빛으로 물들어갔다.
너무나도 눈이 부셨던 나머지 유지한과 김시후는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어?’
‘시원하다?’
빛과 함께 터져 나온 시원한 바람이 두 사람의 몸을 부드럽게 감쌌다.
괴래의 위장에서 피어오르는 불쾌한 냄새 따위를 저 멀리 날려 보내는 건 덤이었다.
그리고 얼마쯤 지났을까.
위장 전체를 환하게 밝히던 빛과 바람이 조금씩 사그라들자 그들은 손을 아래로 내렸다.
“엥.”
“뭐야.”
그런데 실프는 다시 원래의 동그란 형체로 돌아와 있었다.
마결정을 흡수하고 갑자기 벌어졌던 이변은 전부 사라져 버린 상태였다.
우웅!
식사를 모두 마친 실프가 유지한의 앞으로 날아왔다.
유지한이 재빨리 외관을 살펴보니 특별한 변화가 생긴 것 같지는 않았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녀석을 바라보던 김시후가 말했다.
“딱히 문제는……. 없어 보이죠?”
“그런 것 같네.”
마결정으로 인한 부작용이라도 일어나는 줄 알았더니.
딱히 그런 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유지한은 내심 안도하면서도, 조금 화가 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실프, 너 계약자 말 무시할 거야? 이렇게 멋대로 행동할 거면 나랑 계약은 왜 맺었어?”
—미, 미안해!
“후우……. 그래도 미안한 걸 알고 있으면 됐다. 다음부터는 절대로 그러지 마.”
—다음에는 안 그럴게!
유지한은 실프의 확답을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령이 아무리 큰 힘이 되어 주는 동료라고 한들, 제어할 수 없다면 양날의 검이 된다.
당장이야 마결정 섭취를 막지 못했다는 것에 불과했지만.
잠재적인 위험 요소가 될 여지가 있는 것이었다.
“어? 어어?!”
그때 김시후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지팡이를 든 채로 몸이 굳어버린 그는 실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커다란 위화감을 눈치챈 유지한이, 마찬가지로 실프를 올려다봤다.
“실프?”
—응!
“…….”
정령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
유지한은 말문이 트인 실프와 함께 일행에게 돌아왔다.
—안녕, 안녕!
“뭐야?”
“말을 하잖아?”
사람들은 한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실프의 목소리를 듣고서 매우 놀라워했다.
그것이 마치 10대 소녀의 청량한 목소리와도 같았기에.
어딘가에 몰래 스피커를 숨겨 둔 것이 아닌지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조잡한 장치 따위는 발견되지 않았다.
“정말 축하드려요.”
박재경은 소식을 접하고서 유지한에게 축하를 건넸다.
정령과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건.
한 사람의 정령사로서 커다란 성장을 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설마 이런 곳에 마결정이 가득했을 줄이야…….”
“도하 씨가 마결정을 찾기 위해 되게 많이 노력했다고 들었어요.”
“온 세상을 다 조사했었죠.”
한국을 벗어나 세계 곳곳에 전문 탐색 인원을 고용하기까지.
정령사 윤도하가 이끄는 주사위 길드는 지구에서 마결정을 찾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미 발견된 마결정을 구매하고 생산지를 찾아내기 위해 투입된 시간만 몇 년에 달했다.
“마결정은 깊은 심해에 존재하는 것일 수도 있겠네요.”
“흐음, 향후 자세하게 연구해볼 만한 내용이에요.”
괴래의 위장에 마결정이 있었다는 것은.
괴래가 섭취한 음식 중에 마결정과 관련된 음식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 구조를 파악해낸다면 이세계가 아닌 지구에서도 마결정을 채취할 수 있으리라.
—끼하하!
토옹! 토옹!
실프는 칠라의 두툼한 배 위에서 자신의 몸을 튕기며 놀고 있었다.
의사소통은 가능해졌으나 성격은 전혀 달라지지 않은듯했다.
이젠 목소리가 들려오니 더 신이 난 것처럼 보일 뿐.
‘물어보고 싶은 건 많지만…….’
유지한은 실프와 말이 통하게 된다면 묻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과거의 녀석이 가지고 있던 힘이나 이전 계약자인 에르나 하스와 관련된 일 따위.
하지만 당장 급한 건 이번 원정대의 일이었으니.
개인적인 궁금증은 조금 미뤄 두기로 했다.
“시후야! 결과는?”
“약 50%요.”
“절반?”
“[실드]로 호열 씨의 안전을 장담할 수가 없어요.”
느리게 이동 중인 괴래의 몸속에서 탈출하는 계획.
마법사들은 유일한 일반인인 남호열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을 확률을 약 50% 정도로 평가했다.
“이럴 거면 제가 따라오는 게 아니었는데!”
“그나마 호열 씨가 계셔서 저희 장비가 멀끔한 거죠.”
“하지만…….”
남호열은 매우 우울한 목소리였다.
나름대로 수제 장비를 갖춰 입긴 했으나 영웅들을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인 탓이었다.
유지한은 그에게 작은 위로를 건네면서도, 속으로는 고민에 빠졌다.
‘도박을 해야 하나.’
지금 탈출을 감행하려면 남호열이 큰 위험을 부담해야만 했다.
물속으로 나가서 다시 육지로 돌아가기까지 맨몸으로 견뎌야 하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도박을 하자니 거부감이 몰려왔지만.
이대로 괴래를 가만히 뒀다가는 더 깊은 심해로 이동하게 되어 문제가 커질 것이었다.
‘……어쩔 수 없다.’
그는 끝내 여기서 탈출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내 무기를 든 일행이 굳게 닫힌 괴래의 입 앞으로 모였다.
피를 뒤집어쓰더라도 강제로 입구를 열어서 빠져나갈 셈이었다.
그런데 그때, 실프가 유지한에게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한! 내가 도와줄까?
“응?”
—도와줄게! 돕고 싶어! 돕게 해 줘!
일행이 괴래에게서 탈출하는 걸 돕겠다는 실프였다.
아주 적극적인 녀석의 태도에 유지한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어떻게 도와줄 건데?”
—이렇게!
실프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순간.
휘이이잉!
갑자기 불어온 바람이 일행 전체의 몸을 감쌌다.
“엇?!”
“이게 뭐지?”
깜짝 놀란 영웅들이 자신의 몸을 살폈다.
아주 기분 좋은 바람이 살색 피부 위를 스치고 있었다.
전신의 피부 위로 5cm 정도를 무언가가 감싸고 있는 듯한 감각.
유지한은 그것이 실프가 걸어준 마법임을 알아보았다.
“후우우! 하아아!”
“공기가 엄청 깨끗해졌는데요?”
“신기하다. 냄새가 하나도 안 나.”
입과 코로 들이마시는 공기마저 아주 상쾌해졌다.
조금 전까지 느껴지던 꿉꿉한 괴래의 입 냄새와는 차원이 달랐다.
흡사 전혀 다른 공간에 온 느낌이었다.
—이젠 물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어.
“정말로?”
심지어 물속에서 호흡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한다.
가장 걸림돌로 여겼던 문제가 한 번에 해결되어 버린 것이다.
마력을 사용하여 1명도 아니고 10명에 달하는 인원에게 지속적으로 산소를 공급하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지속 시간은?”
—30분!
“……!”
30분이라면 수면 위로 올라가기에는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되면 안전하게 탈출할 가능성이 매우 커진다.
“대단한데?”
—에헤헤! 이런 건 별거 아니거든!
부끄러운 듯 몸을 이리저리 굴려대는 실프의 행동에 유지한은 피식하고 웃었다.
저 정도의 자신감이라면 일단은 믿어 볼 수밖에.
“갑시다!”
서걱!
유지한은 괴래의 매우 질기면서도 두툼한 피부를 세로로 크게 베었다.
초록빛 오러가 담긴 검날은 덩치 큰 몬스터의 살을 막힘없이 잘라 냈다.
“뿌우우우——!!”
입안의 살점이 잘려나가는 고통을 견디지 못한 괴래의 울음소리가 고막을 두드렸다.
녀석은 춤을 추듯 이리저리 몸부림쳤지만, 그럼에도 굳게 다문 입술을 열지 않고 버텼다.
공격을 가하던 일행은 몸의 균형을 잡기에 바빴다.
푸슉!
이리저리 흔들리는 몸속에서 유지한은 고양이처럼 유연한 움직임을 보이며 같은 부위에 공격을 가했다.
그로 인해 괴래의 상처가 벌어지고, 흘러나오는 붉은 피가 바닥을 적셨다.
갑작스럽게 얼굴로 튀어 오르는 핏물도 있었다.
산성과 미약한 독이 담겨 있는 피였기에 유지한은 거기에도 크게 주의를 기울였다.
“오호.”
그런데 실프가 몸에 씌워 준 바람 마법은 그 핏물마저도 모두 옆으로 흘려보냈다.
핏물로 인한 피해마저도 무시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나 유용한 마법이라니!
덕분에 유지한은 길을 뚫어내는 데만 집중할 수 있었다.
푸슈우우우—!
이윽고 완전히 뚫려 버린 괴래의 상처를 통해 바닷물이 흘러들어왔다.
괴래의 입속은 순식간에 피가 섞인 바닷물로 가득 차 버렸다.
그럼에도 유지한 일행은 물속에서도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었다.
“다들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와, 진짜 신기하네요.”
소리가 조금 줄어들었을 뿐이지 대화에도 큰 문제가 없었다.
유지한은 모두의 안전을 확인한 뒤에 뚫린 상처 쪽으로 전진했다.
이내 상처를 비집고 나오자 어두운 바닷속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뿌우우우!!”
괴래는 영웅들을 밖으로 빠져나온 걸 보고 크게 분노했다.
굳게 닫혀있던 입을 쩍하고 벌린 녀석은 다시 사람들을 먹어치우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물속에서 행동이 자유로워진 영웅들은 결코 상대하기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쿵! 콰앙! 쾅!
거리를 벌려가며 커다란 괴래를 공격하는 딜러들!
입속에서 이미 충분한 상처를 만들어 두었기 때문에.
괴래는 시간이 갈수록 피를 왈칵 쏟아 냈다.
“뿌우우우……!”
머리를 집중으로 공격당한 괴래는 끝내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주변 상황을 보아하니 다른 몬스터가 등장할 낌새는 없었다.
뒤이어 김시후는 괴래에게 먹히기 전 민유리가 이세계인들의 배에 심어 둔 아티팩트를 추적했다.
“찾았어요!”
아티팩트는 다행스럽게도 마법이 닿는 범위 안에 존재했다.
낚싯배로 추격할 때보다는 훨씬 멀어졌지만 충분히 따라갈 수 있을 거리였다.
‘감히 우리를 고래밥으로 사용했겠다.’
괴래의 몸속에 영웅들을 가둔다는 발상은 꽤 참신했다.
아마도 일행에 일반인이 포함되어 있다는 걸 알고서 벌인 짓이겠지.
하지만 그 시도가 되레 정령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어 버렸으니.
유지한으로서는 입가를 조소를 머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