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추격
“…….”
“…….”
전투가 벌어지던 장소에서 서로 무기를 겨눈 채 어색한 침묵이 오갔다.
무너진 통로쪽에서는 건물의 잔해가 들썩거리고 있었다.
갇혀 있는 몬스터들이 뚫고 나오려는 것이었다.
유지한은 검으로 그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당장 저놈들을 멈추지 않으면 대화는 없어.”
“이 사람이 죽어도 상관이 없나?”
“같잖은 협박 집어치워.”
유지한은 상체를 낮추고 당장이라도 앞으로 뛰어들 듯한 자세를 취했다.
설령 정영욱이 살해당하더라도 눈앞의 적들을 쓸어버릴 기세였다.
잠깐이나마 그의 검을 경험했던 이세계인들은 몸을 움찔했다.
‘호락호락한 놈이 아니다.’
결국, 정영욱을 붙들고 있는 남자가 말했다.
“전부 다 멈추게 해.”
이세계인들의 지시에 따라 몬스터들은 행동을 멈췄다.
유지한은 주변의 진동이 전부 멎은 것을 확인한 뒤에야 자세를 풀었다.
하지만 이내 위화감을 감지하고는 표정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거기 너.”
“……?!”
그에게 지목당한 여성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유지한은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방금 저 통로 위에 환각을 씌웠군.”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당장 제거하지 않으면 너부터 제거해 버리겠어.”
유지한은 검을 움켜쥔 채 으르렁댔다.
그녀가 몬스터들이 멈춘 것처럼 보이도록 환각 마법을 깔았다는 것을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대체 어떻게 안 거지?’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던 여성은 주변 동료들의 눈치를 살폈다.
결국, 누군가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취소해.”
“……알겠습니다.”
스르륵—
환각까지 모두 걷어낸 뒤에야 유지한은 기세를 거둬들였다.
그런 그를 보며 정영욱에게 칼을 겨눈 남자가 말했다.
“여긴 무슨 방법으로 찾아낸 거냐?”
이세계인들이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어떻게 영웅들이 그들이 숨은 장소를 정확히 찾아내어 공격했는가, 였다.
설령 배신자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애초에 이곳의 위치를 알고 있는 사람의 수가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답할 이유가 있나?”
“고작 10명이 쳐들어온 주제에 태도가 너무 건방지군.”
“그 10명이 너희의 계획을 여럿 망쳐 버렸지.”
“……네 뒤에 있는 박재경은 당분간 힘을 쓰지 못할 텐데?”
“그게 뭐가 어쨌다는 거지?”
“뭐?”
“내가 여기에 있는데.”
우웅!
유지한은 몸의 크기를 최대한으로 부풀린 실프를 어깨 위로 불러들였다.
자신이 정령사임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세계인들은 발끈하며 말했다.
“정령사 유지한! 우린 이미 너를 알고 있다.”
“그 말도 통하지 않는 정령으로 대체 뭘 하겠다는 거냐?”
유지한의 기본 정보에 대해서는 이미 세간에 알려져 있었다.
단지 그의 등급과 초보 정령사라는 점으로 이세계인들의 경계 대상에 오르지 않았을 뿐.
커다란 위협이 되기에는 영향력 따위가 모자란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지한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희의 허접한 환각은 다 꿰뚫어 보고 있다만.”
“……!”
그의 말에 이세계인들은 하나 같이 유지한을 주시했다.
여수로 내려오는 원정대에게 어째 마법이 잘 통하지 않는 것 같더니 그 원흉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이었다.
‘저놈이었군.’
‘저 새끼 때문에…….’
‘일이 크게 틀어졌다.’
제리가 부디 생포해달라고 떼를 쓰던 영웅!
그의 존재는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툭 튀어나온 가시처럼 거슬리기 짝이 없었다.
“케팔이라는 마법사를 알고 있나?”
“네가 그 이름을 어떻게……?”
“내가 죽였다.”
“……!”
유지한에게 기억을 읽힌 뒤 심장이 뚫려 죽은 엘리트 마법사.
엄밀히 따지자면 그의 목숨을 끊은 건 박재경이었지만.
그걸 알 길이 없는 이세계인들은 수군거릴 뿐이었다.
죽은 그가 아제시아에서 넘어온 인물 중에서도 꽤 인정받는 마법사였기 때문이었다.
‘케팔 님이 죽었다고?’
‘어찌 그럴 수가!’
‘연락이 닿지 않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어.’
당황하여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리는 사람들.
감정을 숨기려고 해도 잘 숨기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다.
저들 모두가 마트에서 마주쳤던 파라스와 같은 연기력을 보유하고 있지는 않은 것이었다.
유지한은 동요하는 이세계인들을 눈으로 훑으며 생각했다.
‘여기서 약해 보이면 안 된다.’
약육강식.
약한 동물은 포식자에게 물어뜯길 뿐이었다.
적들이 아무리 그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대략적인 정보에 불과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마치 박재경과 비견될 정도의 영웅인 것처럼 행동함으로써.
상대의 경계심을 끌어내고자 했다.
“점점 더 마음에 들잖아!”
제리는 유지한을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쌍단검을 역수를 쥔 그녀의 손아귀가 부들부들 떨려왔다.
안면이 있는 동료들이 눈앞에서 죽었든 말든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그와 실력을 겨루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아.”
꾸우욱!
단검의 날이 정영욱의 피부를 찢어내자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어디까지나 인질을 잡고 있는 건 자신들이라는 걸 알려 주는 행위였다.
덜컥 놀란 정영욱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저게……!”
김시후는 크게 분노한 눈으로 단검의 주인을 노려봤다.
하지만 유지한은 평점심을 유지하며 그에게 말했다.
“당신 이름이 뭐지?”
“리우스.”
“리우스! 그 마법사와 함께 있던 사람들은 지금 어딨어?”
“다 죽었다.”
“…….”
정영욱 파티는 정영욱을 제외하고 몰살당한 모양이었다.
길드원의 죽음을 접한 박재경이 리우스를 죽일듯한 눈으로 노려봤으나 그는 코웃음을 쳤다.
이미 힘이 빠질 대로 빠진 그녀에게 겁을 집어먹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원하는 게 뭐야.”
“너희의 죽음.”
“그거 재밌네. 나도 똑같은 걸 원했는데.”
서로가 서로의 죽음을 원하는 입장.
아무리 인질이 잡혀 있다고 한들, 인질을 위해서 대신 죽어 주는 상황이 나오지는 않을 터.
유지한의 의중을 한번 떠봤던 리우스도 그걸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그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죽는 게 싫다면 당장 여길 떠나라.”
“그 사람을 돌려받기 전까지는 그럴 수 없어.”
“너희가 먼저 여길 떠나면 살려서 보내 주겠다.”
영웅들이 떠난 뒤에 정영욱을 풀어 주겠다는 리우스였다.
하지만 유지한은 고개를 저었다.
“먼저 넘겨주고서 그런 말을 해야지.”
“내가 너희의 뭘 믿고?”
“반대로 우리는 뭘 믿고 여길 떠나야 하는데?”
“인질을 잡은 건 이쪽이다.”
“그렇다면 나는 너희 전원을 인질로 삼겠다.”
“……뭐라고?”
이 자리의 이세계인 전원을 인질로 삼겠다는 유지한.
반짝거리는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제리는 너무나도 즐거웠던 나머지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그 사람 내놔.”
화아악!
유지한의 검에 초록빛 오러가 서렸다.
다시금 충돌하기 일보 직전의 상황.
“자기라면 그렇게 나올 줄 알았어!”
“……하.”
기다렸다는 듯이 자세를 취하는 제리를 보며 리우스가 한숨을 내뱉었다.
‘조금 귀찮지만……. 어쩔 수 없겠어.’
리우스가 품속에서 투명한 액체가 든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수상한 물건을 본 영웅들은 그 즉시 리우스를 경계했지만.
촤악!
유리병의 뚜껑을 딴 리우스는 정영욱의 상처 위로 그 액체를 뿌렸다.
약 5초 후, 정영욱은 발작하듯 전신을 덜덜 떨어대며 입에서 투명한 거품을 뿜어냈다.
“커어억!”
“영욱아!”
유지한은 앞으로 튀어나가려는 김시후를 제지한 뒤.
눈동자가 하얗게 까뒤집힌 정영욱을 보며 말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1시간 내로 체내의 모든 마력이 폭주하여 죽음에 이르는 독이다.”
“……!”
“해독제는 오직 나만 가지고 있지. 그러니 이 마법사를 살리고 싶다면 당장 여길 떠나라.”
유지한은 팍 인상을 썼다.
설마 이런 방식으로 선택을 강요할 줄이야.
그가 뒤에 있는 윤도하 파티의 힐러를 바라봤지만, 힐러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지금 상태로 정영욱을 데려온다고 한들, 잘 알지도 못하는 독에 중독되어 치료할 방법이 없었다.
“그 사람을 어떻게 넘겨줄 건데?”
“1시간 뒤에 이곳으로 다시 찾아와. 우리가 여길 떠나기 전에 해독제를 먹이고 남겨 둘 테니까.”
“……그 약속, 지키는 게 좋을 거야.”
유지한 일행은 적들에게 등을 보이지 않으며 들어왔던 입구 쪽으로 천천히 물러났다.
무기를 겨눈 채 숨 막히는 긴장감이 계속되는 상황.
활시위에 마력 화살을 물려둔 민유리는 마지막까지 리우스의 머리를 겨냥하고 있었다.
“형! 이제 어쩌죠?”
“숨어서 대기하자.”
공간 왜곡을 빠져나오는 데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유지한은 사람들을 이끌고 선착장 근처에 있던 횟집의 옥상으로 이동했다.
몸을 숨기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칠라. 허리 좀 숙여 봐.”
“찍?”
“조금만 더.”
“그냥 눕혀 버리죠.”
몸집이 커서 멀리서도 눈에 띄는 칠라를 아예 옥상 바닥에 눕혀 버린 뒤.
옥상의 벽 뒤에 숨어서 방금 빠져나온 민박집을 관찰했다.
“찍찍…….”
칠라가 다소곳이 누운 채로 30분쯤 지났을까.
[이글 아이]를 사용 중인 민유리가 민박집을 우르르 빠져나오는 이세계인들을 발견했다.
“나왔다.”
“영욱이도 저기에 있어요.”
뒤따르는 몬스터들에게는 눈에 잘 보이지 않도록 환각을 씌워 둔 상황.
유지한은 조명 아래에서 유독 몸집이 큰 남성이 등에 업고 있는 보따리를 발견했다.
그 안쪽에 사람이 들어가 있는 듯했다.
그런데 저 보따리에서 느껴지는 매우 독특하고도 이질적인 마력은…….
‘대장이다.’
무무의 기억 속에서 마주쳤던 이세계인들의 리더.
윤도하와 백강천을 여수에서 사라지게 한 인물.
어쩌면 이 모든 사태를 일으킨 원흉이 어째서인지 미동조차 없이 보따리 안에 들어가 있었다.
“IUPC의 고위 관계자도 있군요.”
“흐음…….”
“배에 타는데요?”
민박집 앞에서 대화를 나누던 이세계인들은.
선착장에 정박해 있던 커다란 어선에 탑승하기 시작했다.
덩치가 큰 비행형 몬스터들은 날지 못하는 놈들을 등에 업거나 발톱으로 잡고 날아올랐다.
‘저 큰 기린을 들어 올리네.’
IUPC 회원들이 다루던 몬스터보다 조종이 훨씬 세밀했고, 수준도 높았다.
표정이 한결 편안해진 채로 눈을 감고 있는 정영욱은 맨땅에 남겨졌다.
그에 박재경이 의외라는듯 말했다.
“약속은 지키고 가는군요.”
“……아닙니다.”
“네?”
유지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저거 가짜에요.”
“뭐라고요?”
“베개에 환각을 씌운 겁니다.”
“이럴 줄 알았어!”
“졸렬한 새끼들!”
사람 크기의 베개를 정영욱처럼 보이도록 한 환각 마법.
이세계인들은 끝까지 영웅들을 속이려 들었다.
그들이 도저히 정영욱을 넘겨줄 것 같지 않았기에.
유지한 일행은 즉시 옥상에서 내려와 배가 있는 곳으로 달렸다.
“온다!”
“타! 빨리 타!”
속임수가 들통 난 이세계인들은 잽싸게 어선에 탑승했다.
이내 정박해 있던 배와 비행형 몬스터들이 밤바다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어두운 밤에 환각까지 겹쳐지자 코앞에서 지켜보던 배라도 인지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유지한은 조금씩 멀어지는 배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놓칠까 보냐!’
배에 실린 커다란 보따리들.
정영욱은 그 사이에 섞여 있는 것이 분명했다.
“배 조종할 줄 아는 사람 있습니까?”
“저, 저쪽의 배는 제가 조종할 수 있습니다!”
“호열 씨가요?”
과거의 언젠가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낚시에 빠져 있던 남호열.
그는 직접 낚싯배를 몰았던 경험도 가지고 있었다.
유지한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쫓아갑시다. 방향은 옆에서 알려 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