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습격 (8)
“허억, 허억…….”
IUPC의 은신처가 공격받았던 당시.
자리에 함께 있던 이세계인은 박재경에게 공포를 느끼고 몰래 장소를 빠져나왔다.
단단한 외피를 가진 몬스터의 몸까지 통째로 베어 버리는 무시무시한 힘!
그건 그들이 그토록 경계했었던 1급 영웅들과도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
그는 한 건물 옥상에 숨어서 은신처의 상황을 살폈다.
모든 영웅들이 그곳을 탈출하여 입구를 봉쇄하기까지.
일련의 과정을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다.
“빠, 빨리 이 사실을 알려야 해!”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반지를 붙잡고 다른 이세계인들과의 통화를 시도했다.
반지에서 보석에서 빛이 점멸하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비상사태임을 알렸다.
“괴물! 그건 정말로 괴물이었어요!”
—박재경이 그 정도였다고.
“흐으윽! 흐으윽……!”
평범한 검 하나로 셀 수 없을 정도의 목숨을 앗아 간 박재경.
다시금 호박을 떠올린 남자의 아랫도리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그럼에도 그에게 창피하다는 감정은 없었다.
단지 무서울 뿐.
“한국에 그런 괴물이 있을 줄 알았다면 전 이 모든 일에 반대했을 겁니다!”
—일단 진정하고……. 안전한 곳에 숨어서 대기해.
통화를 받은 상대방은 흥분한 남자를 진정시켰다.
약 5분간 이어진 통화를 끝난 뒤.
이세계인들이 모여 있는 공간에서는 잠시 무거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시간제한이 있으니 자리에서 달아난 거겠지.”
“고작 한 명의 영웅에게 이런 꼴을 보일 줄이야!”
몬스터 생산 라인이 연달아 공격받았을 때부터 계속 불안했지만.
결전의 날을 앞두고 IUPC 회원들과 몬스터가 대량으로 학살당했다.
모두가 죽은 것은 아니겠으나, 그렇게나 압도적인 힘을 경험한 이들은 고기 방패가 될 수 있을지언정 의미 있는 전력이 되어 줄 수는 없었다.
“여수에 많은 공을 들였었는데…….”
“회원들을 지금처럼 한 곳에 몰아넣은 게 문제야.”
“영웅들은 대체 거길 어떻게 찾아낸 거지?”
미간을 찌푸린 한 남자가 IUPC의 부장 임민수를 돌아봤다.
그는 속보를 접하고 생각에 깊게 빠진 얼굴이었다.
회원들을 늘리고 몬스터를 모으는 데 많은 노력을 쏟았던 그였으니 심적 충격이 적지 않을 터였다.
쾅쾅!
누군가가 주먹으로 책상을 치며 소리쳤다.
“내가 뭐랬어! 박재경, 그년도 제외시켰어야 했다니까!”
“그래……. 네 말을 귀담아들었어야 했다.”
이세계인들은 모든 계획에 앞서 한국의 1급 영웅들을 지구에서 완전히 추방시켰다.
10인의 영웅을 서로 다른 10개의 이세계로 날려 보낸 것이었다.
한국의 수호신, 진정한 영웅이라고도 불리는 그들의 힘이 커다란 위협이 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리해서라도 강행한 결정이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이나마 그들과 비슷한 수준의 능력을 선보인 박재경 덕분에.
이세계인들의 과거의 결정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늦었어.”
“제길!”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이건 기회이기도 해.”
“그게 무슨 말이지?”
“다들 잘 생각해 봐! 지금 한국에 남은 영웅 중에 그만한 잠재력을 가진 영웅은 없어.”
“흠…….”
박재경의 [잭 오 랜턴]은 지극히 예외적인 고유 스킬이었다.
그녀 외에 다른 2급 영웅들은 전체적인 수준이 뛰어나긴 하지만, 딱 그 정도일 뿐.
1급 영웅에 비견될만한 영웅은 없었다.
“IUPC가 우리의 방파제가 되어 준 거라고.”
이번 일의 주역인 박재경 또한 고유 스킬의 여파로 며칠 간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한다.
커다란 위협, 또는 장애물이 없어져 버린 셈이었다.
“그 말이 맞습니다.”
“임민수 씨?”
“소중한 회원들이 만들어 준 이 기회, 절대로 그냥 흘려보내서는 안 됩니다.”
임민수는 하얀 손수건으로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제 꿈을 펼치지 못하고 죽어 버린 회원들에게 안타까움을.
다른 한편으로는 감사를 느끼는 것이었다.
“계획은 변경 없이 그대로 진행하는 거로 하죠.”
“저도 거기에 동의합니다.”
“좋습니다!”
여수의 병력이 회복이 어려울 정도로 타격을 입은 건 아쉬운 일이지만.
그들은 서울을 정복한다는 계획을 이어 나가기로 했다.
그때 반지를 통해 또 전화가 걸려왔다.
—영웅들을 제압하고 주방에서 납치된 동료들을 확보했습니다!
“오호!”
축 처진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끌어올리는 소식이었다.
“어떤 영웅들이지?”
—주사위 길드인 것 같습니다. 죽일까요?
“아니! 꼭 살려서 데려와. 선발대의 영웅이라면 어딘가에 쓸모가 있을 거야.”
*****
“내려 주세요.”
파티원의 등에 업혀 있던 박재경은 그의 등에서 내려왔다.
다리가 조금 후들거렸지만, 충분히 두 발로 움직일 수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제부터가 고생이죠.”
가장 급한 불이라고 생각했던 IUPC에 커다란 피해를 줬지만.
그것조차도 전체의 일부분에 불과할 뿐.
이세계인들과 IUPC 연합의 행동을 완전히 막아 낼 수는 없을 것이었다.
‘어렵다.’
모든 조건을 검토한 유지한은 고민을 거듭한 끝에 입을 열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이제 한발 뒤로 물러나서 후발대와 합류하는 편이 맞습니다.”
“하지만 지한 씨가 놈들의 위치를 알고 계시잖아요.”
“그렇긴 합니다.”
“지금처럼 기회가 있을 때 이세계인의 뿌리를 뽑아야 해요!”
박재경의 말대로 유지한은 이세계인들이 숨어있을 위치를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원정대의 핵심이었던 박재경이 고유 스킬의 부작용으로 힘의 절반 가량을 잃어버린 상황.
적어도 7일이 지나기 전까지 그녀는 적극적으로 행동할 수 없었다.
결국, 남은 인원만으로 이 상황을 돌파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번 일이 좋게 끝나더라도 이세계인들이 살아남으면 그건 끝이 아니에요.”
“……언젠가 그들 때문에 또 오늘 같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죠.”
“그러니까 제 걱정은 마시고 놈들을 쫓아가요.”
거듭된 박재경의 요청에 유지한은 결국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다면 다들 제 지시에 따라 주셔야 합니다.”
“네.”
“알겠어요.”
일행은 곧 어두운 밤길을 가로지르며 빠르게 달렸다.
목적지는 낚싯배 따위가 나열되어 있는 어느 선착장.
그 뒤에 존재하는 2층짜리 민박집.
‘설마 거길 찾아내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겠지.’
그곳은 약물을 생산하는 주방, 혹은 IUPC 회원들이 대기하는 장소가 아니라.
엘리트에 해당하는 이세계인들이 모여 있는 여수의 본부였다.
“저기라고요?”
“예.”
본래대로라면 여수 전체를 샅샅이 훑어보더라도 찾아내기 어려운 장소.
유지한은 거길 몇 번이나 방문했던 것처럼 능숙하게 찾아냈다.
“…….”
“…….”
마법사들에 의해 공간 왜곡의 존재가 확인된 뒤.
말없이 서로 간 시선을 교환한 유지한 일행은 그 입구로 들어섰다.
이내 그들이 도착한 곳은 벽에 반투명한 문이 달려 있는 단칸방.
바스락—
유지한은 품속에서 투명한 비닐을 꺼냈다.
사전에 챙겨 뒀던 엘리트 마법사의 손가락과 그의 마력을 뽑아냈던 마석이 담긴 비닐이었다.
띠링!
2개의 물건을 특정한 위치로 가져가자 지문과 마력 인식 기능이 동시에 작동했다.
그와 동시에 반투명한 문이 스르륵 열렸다.
“오, 신기하다.”
“이런 걸 다 알아내신 거구나.”
입장부터가 상당히 만만치 않은 조건이었다.
하지만 길이 뚫렸으니 망설일 건 없었다.
“진입!”
온몸에 버프를 두른 유지한은 활짝 열린 문으로 입장했다.
문 안쪽에는 일자로 이어지는 넓은 복도가 있었다.
난생처음 들어오는 곳임에도 그에게는 매우 익숙했다.
“누, 누구냐!”
서걱!
상시 입구를 지키는 경계병을 처리한 뒤.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뛰어오는 인원에게 딜러들이 원거리 공격을 쏟아 냈다.
“무슨 소란이지?”
“저건……!”
이세계인들은 소란을 듣고서 하나둘 밖으로 빠져나왔다.
본부로 침투한 영웅들을 발견한 뒤에는 하나같이 경악한 표정으로 무기를 꺼내들었다.
[어스퀘이크]
[록 버스터]
콰아아앙!!
김시후와 윤도하 파티의 마법사는 통로 한쪽을 오갈 수 없도록 완전히 무너뜨렸다.
이곳에서는 차량을 주차하듯이 데려온 몬스터를 별도의 공간으로 몰아두는 구조를 갖추고 있는데.
길을 틀어막아 그 몬스터들의 접근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미리 내부 구조를 파악해 둔 유지한이 있었기에 가능한 전략이었다.
“이 자식들이!”
“흡!”
힘이 줄어든 박재경을 후방으로 보내 둔 상황.
유지한은 가장 앞장서서 적들을 쓰러뜨렸다.
‘그때 본 얼굴들이 보이는군.’
다른 이들의 기억 속에서 마주쳤던 얼굴들이 여럿 보였다.
그저 그런 잔챙이가 아니라 이 집단에서도 꽤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적들.
이곳에서 최대한 많은 이들을 저지해야만 했다.
“우앗! 자기 왔구나!”
“……!”
그때 등장한 제리가 사랑에 빠진 얼굴로 유지한에게 달려들었다.
동료들이 여럿 죽어 나가고 있었지만, 그녀의 시야에는 오로지 유지한밖에 보이지 않았다.
카가각!
단검으로 공격을 흘려보낸 그녀가 말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건 어떻게 알고 찾아왔을까? 이것이 사랑의 힘?”
“전혀 몰랐는데.”
“어휴, 튕기기는! 우리 자기밖에 없다니까!”
유지한은 원하는 말만 지껄이는 제리를 보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왜 자신에게 호감을 갖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도저히 정상적으로 말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전력으로 간다.’
쿵!
제리와의 충돌이 이뤄진 직후.
곧바로 김시후의 마법이 이어졌다.
[윈드 네일]
쒜애액!
정확한 위치, 정확한 타이밍에 위에서 아래로 꽂혀버리는 얇은 바람의 못.
제리가 재빨리 몸을 옆으로 회전시키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정수리를 뚫어 버렸을 마법이었다.
뒤이어 날아오는 민유리의 화살에 위협을 느낀 그녀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자기야! 내 취향 몰라? 난 일대일이 좋은걸.”
“놀러 온 게 아니라서 말이지.”
두두두두두……!
무너뜨린 통로에서 몬스터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시간을 끌면 불리해지는 건 영웅들이었다.
그런데 유지한이 제리를 뚫고 넘어가려던 그때였다.
“모두 멈춰라!!”
새롭게 난입한 한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그는 누군가의 머리채를 쥐고 앞으로 거칠게 들어 올렸다.
“헛!”
“정영욱?!”
유지한 일행은 모두 눈을 크게 떴다.
이세계인에게 머리를 붙잡힌 사람이 다름 아닌 정영욱이었기 때문이었다.
적지 않은 상처를 입은 그를 보고서 유지한은 그 즉시 발을 멈췄다.
“지금부터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인다면 이 녀석을 죽이겠다.”
“윽!”
정영욱의 목에 단검을 가져다 대고 인질극을 벌이는 남자.
자신의 길드원이 붙잡힌 광경을 보며 박재경은 이를 부득 갈았다.
반면, 동료들을 발견한 정영욱은 차마 할 말이 없는 듯.
고개를 떨군 채 다른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살아 있었군.’
정영욱의 상태를 멀리서 확인한 유지한은 검 끝을 바닥으로 늘어뜨렸다.
당장은 그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것이었다.
이내 유지한이 정영욱의 머리채를 쥐고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이쪽에서도 경고하지.”
“뭐?”
“그 사람을 죽인다면 너도 죽는다.”
“……!”
담담하게 죽음을 예고하는 유지한.
그의 타겟이 된 남자의 표정이 와락 찌푸려졌다.
그저 말뿐인 경고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우, 쒯! 박력 있어!”
제리는 그런 유지한의 태도가 무척이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