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습격 (7)
“호박?”
“웃기지도 않는 장난을…….”
IUPC 회원들은 할로윈에나 나올법한 호박을 뒤집어쓴 박재경을 비웃었다.
주위에 수많은 인간들과 몬스터들이 영웅들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
인원수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으니 자신감이 가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비웃음의 대가는 무거웠다.
후웅!
박재경이 가로로 검을 한번 휘두르자.
검의 궤적을 따라 실처럼 얇은 오러가 앞으로 퍼져 나갔다.
“어?”
“……?”
따끔한 감각을 느끼고 자신의 목을 붙잡는 사람들.
이내 같은 자세를 취한 IUPC 회원 11명의 머리가 절단면의 경사를 따라 미끄러지듯이 땅으로 떨어졌다.
박재경의 앞에 있던 코뿔소 및 각종 몬스터 15마리가 반으로 갈라져서 죽는 건 덤이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모두가 입을 쩍 벌린 채 굳어 버리는 찰나.
한 남성의 비명으로 정적이 깨졌다.
“우와아아악!!”
“저건 대체 뭐야!”
“서, 설마……!”
그제야 호박의 정체를 알아본 누군가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박재경이라는 여성이 주사위의 2인자로 올라설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
그녀가 고유 능력을 사용 시 일정 시간 동안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능력을 선보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수준은 일찍이 그녀의 상관인 윤도하가 직접 자신의 힘에 버금간다고 증언했던 적이 있었다.
“트릭 오어 트릿(Trick Or Treat)?”
박재경의 호박 속에서 주황색 안광이 번쩍였다.
피비비빗!
IUPC 회원들에 몸에 실선이 그어지는 건 죽기 직전의 신호와도 같았다.
상처를 인지하기 전까지는 자신이 베였다는 사실조차 모르지만.
통증이 느껴지는 순간, 그들의 의식은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 버렸다.
“흐아아아!”
“도망쳐!”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강함에 겁을 집어먹고 구석으로 도망가는 사람들.
간이 책상에 놓여있던 술병 따위가 와장창 깨져 나가며 공기 중으로 독한 알코올 향이 퍼져 나갔다.
박재경은 주변의 소란에 전혀 개의치 않고 눈앞의 적들을 쫓았다.
‘역시 엄청나군.’
호박이 등장한 지 단 3분 만에 피바람이 몰아쳤다.
머릿수로 따지자면 지하에 숨어있던 IUPC 회원 100명과 몬스터 200마리는 족히 죽었다.
바로 뒤에서 직접 그 현장을 지켜보고 있자니.
유지한은 조금 압도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쫄지 마! 쫄지 말라고!”
“우리가 훨씬 유리해! 그냥 몰아붙이면 돼!”
IUPC 회원들 사이에서 조금씩 반격을 모의하는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힘의 격차가 명백하다고 한들 상대의 숫자는 고작 10명 남짓.
고유 스킬이 매우 강력한 만큼 시간제한이 걸려 있다는 건 감출 수 없는 사실.
죽기 살기로 덤비면 승산이 있을 거라고 보는 것이었다.
‘슬슬 온다.’
인간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각양각색의 몬스터들이.
땅, 벽, 하늘, 천장 등 지하의 모든 환경 요소를 이용하여 박재경을 향해 쇄도했다.
후웅! 후웅! 후웅!
박재경은 거의 정지한 상태에서 온 방향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로 인해 죽어 가는 몬스터들은 마치 세찬 소나기가 떨어지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아직 살아 있는 녀석들은 다른 몬스터의 사체를 방패로 삼아 점점 그녀와의 거리를 좁혔다.
[세계수의 축복]
그때 유지한이 나섰다.
고유 능력을 사용하는 박재경과 서포터를 자처한 유지한을 제외하고 다른 인원은 퇴로를 확보 중인 상황.
유지한의 머릿속은 [잭 오 랜턴]의 남은 시간 동안 박재경을 전력으로 서포트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의 의지에 따라 실프가 동그란 몸 전체에서 환한 빛을 내뿜었다.
“부엉!”
뒤에서 날아드는 커다란 올빼미, 모울(Mowl)을 단칼에 베어 넘기고.
박재경의 앞에 쌓인 산더미 같은 사체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윈드 밤]
퍼엉!
한 점에 모인 바람이 해방되며 죽은 몬스터들을 반대쪽으로 날려 버렸다.
어느덧 주력 스킬이 되어 버린 마법을 정확한 위치에 심어서 터트리는 것으로.
주변에 빨랫감처럼 널려 있던 몬스터의 사체들을 멀리 치워 나갔다.
‘저쪽이 좋겠어.’
주변 시야를 확보하는 것은 물론이고.
몬스터들이 같은 몬스터의 사체를 방패로 사용할 수 없도록 차단할 뿐더러.
박재경의 이동 방향까지 미리 설계하는 것이었다.
퍼어엉!
길이 조금 막힌다 싶으면 유지한이 나서서 사체를 치웠다.
박재경은 자연스럽게 그가 유도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트릭 오어 트릿?”
그러자 매우 신기하게도 박재경은 전투가 훨씬 편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착각이라고 여기기에는 몸으로 체감될 정도로 큰 변화였다.
“믿을 수가 없군…….”
“정말 대단해.”
오랜만에 [잭 오 랜턴]을 사용하는 박재경을 보며 윤도하 파티원들은 감탄사를 뱉었지만.
그녀를 서포트하는 유지한을 보면서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저게 3급이라고?”
“그 말을 누가 믿겠어.”
박재경의 공격이 닿는 범위 안에 유지한이 들어가 있음에도.
그의 모든 행동은 그녀를 단 1도 방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편하게 만들어줄 뿐이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것만을 위해서 태어난 사람인 것처럼.
유지한은 박재경의 움직임을 이해하고, 또 그녀를 배려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윤도하 파티의 힐러는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우아하다.’
마치 잘 짜여진 뮤지컬을 보는 것처럼.
참으로 우아한 서포팅이라고.
‘크, 저게 추방된 영웅이라니?’
유지한을 직접 영입했던 길드장 김시후는.
항상 그렇듯 인재를 땅에 버려버린 케로즈에게 그저 감사를 느낄 뿐이었다.
피융! 피융! 피융!
입구 근처에서 기다리는 민유리는 적들에게 공격을 쏟아 냈다.
화살을 활시위에 걸고, 시위를 당기고, 놓는다.
그 작업을 반복한 끝에 활과 몸이 하나가 된 착각이 들기도 했다.
——유리 씨는 천장에 붙은 놈들과 비행형 몬스터를 맡아 주세요.
유지한의 지시에 따라 그녀가 맡은 건 전사들이 대처하기 힘든 몬스터들.
그 과정에서 남호열이 제작해준 아티팩트의 스킬 사용 횟수는 순식간에 동이 나고 말았지만.
그녀는 손가락에 박힌 굳은살이 아려올 정도로 연사를 이어 나갔다.
‘그러고 보니 호열 씨는?’
민유리는 고개를 돌려가며 남호열을 찾았다.
아무리 적이라고는 해도 살아 있는 사람들이 대량으로 죽어 가는 상황.
유일한 일반인인 그가 느낄 감정을 걱정하는 것이었다.
“우와……!”
하지만 그녀의 걱정과는 달리.
남호열은 칠라의 곁에서 눈을 크게 뜬 채 박재경과 유지한을 지켜보고 있었다.
수준 높은 그들의 전투에 그만 마음을 홀려버린 것이었다.
‘10분이군.’
[잭 오 랜턴] 사용 후 10분째.
박재경이 머리에 쓰고 있던 호박은 열이 달아오른 것처럼 불그스름한 색깔로 물들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10분.
그 10분 안에 어떻게든 이 전투를 마무리 짓고 자리를 벗어나야만 했다.
박재경의 [잭 오 랜턴]은 유지 시간이 끝나면 1시간가량 몸을 아예 움직일 수 없을뿐더러.
7일 동안 모든 신체 능력이 절반 이하로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매우 강력하긴 하지만, 혼자서는 사용하기 힘들 정도로 위험성이 큰 고유 스킬이었다.
“트릭 오어 트릿?”
심지어 고유 능력 사용 중에는 말을 통한 의사 표현이 불가능하고.
박재경은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 잘 인식하지도 못했다.
그 때문에 꼭 다른 사람이 그녀를 이끌어 줘야만 했다.
바로 지금처럼.
탁!
유지한은 박재경의 어깨를 세게 치는 것으로 그녀에게 남은 시간을 알렸다.
그의 뜻을 이해한 박재경은 공격 속도를 높였다.
“끄아아악!”
“사, 사람 살려!”
“괴물! 저건 괴물이야!”
몬스터들과 IUPC 회원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갔다.
바닥에 쓰러진 몬스터와 IUPC 회원들의 시체가 차지하는 면적이 땅의 전체 면적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대학살의 현장!
하지만 유지한은 조금 걱정스러운 눈길로 박재경을 바라봤다.
‘재경 씨의 움직임이 둔해진다.’
전력을 다해서야 뒤늦게나마 따라갈 수 있었던 박재경의 움직임이 눈에 띌 정도로 느려지고 있었다.
이제는 유지한이 크게 무리하지 않고도 그녀를 따라잡을 정도였다.
물론 눈앞의 적들을 물리치기에는 충분했으나, 서서히 한계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타다닷—!
따라서 유지한은 박재경이 느려지는 만큼 본인의 속도를 높였다.
서포터라는 역할에서 벗어나 딜러의 역할을 침범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김현태 파티에서는 감히 시도조차 하기 힘들었던 행동.
그러나 지금은 누구도 그에게 불만을 토할 사람이 없었다.
“재경 씨!”
“트릭……. 오어 트릿?”
“호박이 깨지는 즉시 자리에서 이탈하겠습니다.”
유지한은 조금씩 균열이 일어나는 호박을 주시했다.
점차 불안정해지는 그녀의 오러.
고유 능력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후웅!
후우웅—!
박재경은 멀리서도 잘 보이게끔 검을 더 요란스럽게 휘둘렀다.
자신이 힘이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한 위장행동이었다.
그리고 마주한 적들이 감히 대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끔.
그들 사이에 공포라는 감정을 심어 놓으려는 것이었다.
“주, 죽을 거야! 우린 다 죽을 거야!!”
“으으……!”
그녀의 의도는 아주 잘 먹혀들어 갔다.
IUPC 회원들 사이에서 일어난 동요는 잔잔한 수면 위에서 퍼져 나가는 파동처럼 그들 사이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결국에는 조종하는 몬스터들을 방패로 삼아 박재경의 접근을 막아서는 방식으로 대응이 이어졌다.
피비비비빗!
몬스터들의 몸 위로 실선이 그어지고.
살아 있는 생명체가 꿈틀거리는 고깃덩어리로 변하는 데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바닷물처럼 쏟아져 내리는 핏물과 사체를 처리하던 유지한은 박재경의 팔이 덜덜 떨려오는 것을 보았다.
삐걱거리는 어깨와 붉어진 전신의 피부.
박재경의 한계가 찾아온 것이었다.
쩌적!
결국, 20분이 흘렀을 때.
박재경의 머리에 씌워져 있던 호박 전체에 커다란 균열이 일어나며 완전히 깨져 버렸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IUPC 회원들은 몸을 움찔하며 그녀를 경계했다.
탁!
유지한은 옆으로 쓰러지려는 박재경의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온몸에 힘이 쭉 빠진 박재경은 반쯤 감긴 눈으로 유지한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미안해요.”
“이동하겠습니다.”
유지한은 동료들이 확보해 놓은 퇴로를 향해 달려나갔다.
잠시 멍하니 있다가 그들이 달아난다는 걸 눈치챈 IUPC 회원들이 소리쳤다.
“잡아! 잡아야 해!”
“절대로 놓치면 안 돼!”
조종당하는 몬스터들이 박재경을 업은 유지한에게 쇄도했다.
하지만 퇴로를 확보해둔 동료들의 견제로 그리 쉽게 접근할 수는 없었다.
개중에는 운 좋게 견제를 뚫고 다가온 놈들이 있었지만.
우웅!
[루어 오브 브리즈]
곁에 맴돌던 실프가 직접 마법을 사용하여 녀석들의 발을 묶었다.
유지한은 자리에 멈춘 그들을 힐끔거리며 속으로 흠칫 놀랐다.
‘나보다 더 잘 하잖아?’
계약자가 습득한 마법을 실프가 직접 사용했다는 점도 충분히 놀라운데.
눈으로 보여지는 마법의 효과 또한 매우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마법의 연산을 오롯이 실프에게 넘기는 거예요.
김시후에게 마법을 배울 당시 언급됐던 일이 지금 벌어지는 것이었다.
그걸 깨달은 유지한이 실프에게 말했다.
“앞으로 마법은 나 대신 네가 써라!”
드드드드!
유지한은 알겠다는 듯이 진동하는 실프와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폭파합니다!”
쿠구구구구궁—!
마지막에는 적들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입구를 무너뜨리는 것으로 마무리.
유지한은 와르르 무너진 지반을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녀석들, 약 좀 오르겠군.’
단 20분간의 공격으로 절반이 훨씬 넘게 궤멸된 여수의 병력들.
서울 침공을 꿈꾸던 이들의 표정이 어떠할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