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습격
제리가 여수 공항을 떠난 뒤 원정대는 빠르게 출발할 채비를 마쳤다.
공항에서 잠깐 합류했던 영웅들과는 전략적 합의를 통해 다시금 헤어지고.
여수시청을 향해 각기 다른 경로를 이용하여 이동했다.
‘여기 진짜 한국 맞아?’
유지한은 몸을 숨긴 채 길 위를 지나가는 몬스터들을 바라봤다.
여수로 깊게 진입하면 진입할수록 동물보다는 몬스터들이 제집인 것마냥 여수를 활보하고 있었다.
“앞으로 10분만 더 이동하면 도착입니다.”
일행은 몬스터와의 충돌을 최대한 피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끝내 시청 근처에 도착했을 때.
그 앞에 먼저 도착해 있던 파티를 만날 수 있었다.
“부길드장님, 무사하셨군요!”
“언제부터 여기에 계셨던 거죠?”
“15분 전에 도착했습니다.”
“왜 안 들어가고 계신 거예요?”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유지한은 주변 사람들을 돌아봤다.
그를 포함하여 시청 앞에 도착한 사람들의 수는 약 40명.
공항에서 지체된 시간을 고려하면 흩어졌던 원정대가 이미 시청에서 모이고도 남았을 만한 시간대임에도, 절반조차 채 되지 않은 인원만이 이 자리에 모여 있었다.
아마도 추적을 당하지 않은 사람들만이 먼저 도착한 것일 터.
“들어갑시다.”
여수시청은 텅 비어 있었다.
비어버린 주차장만큼이나 공허한 공간.
시의 행정을 관할하는 역할을 제외하면 별 쓸모가 없는 곳이지만.
굳이 이곳을 찾아온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여수시청에는 관계자에게만 공개되는 숨겨진 기능이 있기 때문이었다.
[시장실]
시장에게 제공되는 시장실로 들어가자 고풍스러운 사무실이 나왔다.
거기서 박재경이 주시한 것은 벽 한쪽에 놓인 책장이었다.
그 앞으로 다가간 그녀는 제목이 붙어 있지 않은 검은색 책 하나를 살짝 앞으로 뽑았다.
드르륵!
톱니바퀴 따위의 장치가 서로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멀쩡하던 책장이 양쪽으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오오!”
“이런 게 있었군요!”
“보안 때문에 미리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비밀 공간으로 들어선 박재경은 작은 책상에 놓인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그 가방 안에는 벽돌만 한 크기의 휴대폰이 들어 있었다.
전파를 이용하지 않고 100% 마력으로만 동작하며 고정된 위치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영웅부의 직통 전화기였다.
“주사위의 박재경입니다. 영웅부 응답하세요.”
—……박재경? 박재경 님?!
전화기의 스피커는 몇 초간 지직거리는 소리만을 뱉어내다가 영웅부와 연결되었다.
영웅부 측에서도 미리 대기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에 한시름을 놓은 박재경이 말했다.
“여수시청의 핫라인을 통해 전화드렸습니다. 현황 공유 부탁드립니다.”
—서울을 떠난 원정대 중 절반 이상이 연락이 닿지 않는 상황입니다!
전화를 받은 영웅부 관계자는 그들에게 간략한 상황을 전했다.
열차나 개인 차량으로 지방을 향해 내려가던 이들 중 대다수가 연락이 끊겼다는 내용이었다.
그나마 먼저 연락이 닿은 건 논산 쪽에 머무르던 그림자 길드.
주사위에서 보냈던 원군 덕분에 공간 왜곡을 파괴하고 빠져나온 것이었다.
“후발대는요?”
—선발대의 소식이 없어서 계속 대기 중입니다.
“늦어도 지금으로부터 2시간 내로 출발해 달라고 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 그리고 한 가지 알려드려야 할 것이…….
“뭔가요?”
—저희 임원진 중에 적들이 심어 놓았던 스파이가 색출되었습니다.
“…….”
스파이가 나왔다는 말에 박재경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영웅부에서 준비한 열차에서 사고가 벌어졌을 때부터 그럴 것 같다고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사태가 모두 마무리되면 영웅부도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몇 분간의 통화를 마친 박재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수까지 내려오면서 피해야 할 위치는 따로 전달했으니 후발대는 더 편하게 내려올 수 있으리라.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던 때였다.
쿠웅!
건물 밖에서 커다란 진동이 울렸다.
깜짝 놀란 모두가 시장실의 창문 앞으로 달려갔다.
시청 정문 앞에서 몬스터와 인간들이 서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음?”
밖을 주시하던 유지한은 이내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챘다.
전주에서 헤어졌던 레드홀의 정기준 일행이었다.
*****
시청에서 벌어진 전투가 마무리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박재경과 정기준은 서로의 생존에 기뻐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또 함정에 빠졌습니다.”
방패를 내려놓은 정기준이 아주 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전주에서 따로 떨어져 나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함정에 빠졌다.
실제와 전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설계된 환각.
이전과 비슷한 방식으로 환각을 깨닫고 공간 왜곡을 벗어나기까지는 생각보다 시간이 더 오래 소요되었다.
“그마저도 계속 주변을 경계하고 있던 게 다행이었습니다. 그게 아니었다면 아마 며칠은 헤맸을 겁니다.”
“어찌 됐건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박재경과 대화를 나누던 정기준은 그녀에게 발생했던 일들을 전해 들었다.
전주와 임실에서의 사건부터 시민들 사이에 숨어든 이세계인을 사로잡았던 일까지.
그리고 그 모든 일에 유지한이 얽혀 있다는 것마저도.
“거 참 대단한 사람이군요.”
“정말로요.”
정기준은 파티원들과 함께 있는 유지한을 바라봤다.
그 시선을 느낀 유지한은 정기준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인사를 받은 정기준은 조금 복잡한 심경이었다.
‘저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 시간에 여수까지 오는 건 절대로 불가능했다.’
몇 번이나 함정에 빠진 뒤에야 그것들을 꿰뚫어 봤던 유지한의 진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사실상 원정대가 빠르게 여기까지 올 수 있던 건 모두 그 덕분이었다.
정기준은 그러한 사실을 박재경 이상으로 뼈저리게 깨달았다.
“재경 씨.”
“네?”
“한 가지 제안할 게 있습니다.”
“어떤…….”
그의 짧은 제안을 전해 들은 박재경은 놀란 토끼 눈을 했다.
“정말로요? 진심이세요?”
“모두를 위한 결정입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마법사 백강천의 파티원이자 탱커.
본인이 따로 나와 길드를 만들더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정기준.
그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더 진지했다.
박재경은 어쩔 수 없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다들 모여주세요!”
박재경은 시청에 모인 사람들을 시장실로 불러들였다.
재개된 영웅부와의 통화에서 새로 합류한 정기준이 말했다.
“저는 원정대의 리더 자리를 내려놓겠습니다.”
—네?!
원정대를 이끄는 역할에서 스스로 내려오겠다는 정기준이었다.
영웅부 관계자들은 물론이고 뒤에서 대기하던 영웅들도 크게 당황한 목소리를 냈지만.
정기준은 그에 크게 개의치 않으며 말했다.
“박재경 씨와는 합의를 끝냈습니다. 그 대신 다른 사람이 자리를 이어받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누구죠?
“꿀잼의 유지한 씨입니다.”
정기준은 몸을 돌려 유지한을 바라봤다.
뜬금없이 그에게 지목당한 유지한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자리에서 자기 이름이 튀어나올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탁월한 판단력과 더불어 적들의 함정을 가장 먼저 꿰뚫어 본다는 점을 높이 샀습니다.”
—하지만 유지한 씨는 경력도 길지 않고 3급 영웅인데…….
“소속이나 사회에서 규정한 등급 따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환각이나 공간 마법에 취약한 현재 유지한 씨는 원정대에게 돌파구를 제시할 수 있는 영웅이에요. 리더에게 필요한 희생정신도 가지고 있고요.”
임실에서 몰려오는 소떼를 혼자서 밭으로 유인했던 일.
좁은 터널 안에서 가시 달린 열차가 달려옴에도 앞으로 나섰던 행동.
그 모든 것은 자기 자신보다도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결정이었다.
본인의 능력과 더불어 자기희생의 의지를 가진 사람이 리더를 맡는 게 훨씬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정기준이었다.
그에게 지목당한 유지한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이게 과한 칭찬처럼 들렸습니까?”
“…….”
“본인의 수준을 너무 낮게 평가하는 것도 그리 좋은 자세가 아닙니다.”
결정을 바꿀 마음이 전혀 없어 보이는 정기준의 태도.
하나같이 쟁쟁한 영웅이 있음에도 외부인에 해당하는 자신에게 원정대장의 자리를 맡기겠다니.
정기준이 보통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유지한이었다.
“이 시간부로 원정대의 리더는 영웅 박재경과 유지한입니다. 이에 대해 불만이 있는 사람은 나중에 저를 따로 찾아오십시오.”
“아니면 제게 찾아오셔도 좋습니다.”
정기준과 박재경의 묵직한 선언에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영웅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사위와 레드홀의 부길드장 2명이 함께 승인한 사안이니 대놓고 반발하는 인원은 없었다.
얼떨결에 원정대장이 된 유지한은 자신의 파티원들을 힐끗거렸다.
‘이 장면은 카메라로 잘 찍어 둬야겠어.’
민유리는 아주 흐뭇한 표정으로.
‘형이 원정대장이 되는 거네?’
길드장 김시후는 기대감이 잔뜩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실프마저도 핑그르르 돌면서 흥분된 몸짓을 보이고 있었으니.
끝내 유지한은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예, 까짓거 한번 해보죠.”
*****
“드디어 빠져나왔다.”
해남으로 향하던 도중 공간 왜곡에 휘말려 버린 원정대는.
운 좋게 외부에서 공간 왜곡을 감지한 영웅들의 도움으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씨바, 더럽게 길었네…….”
김현태는 선로를 내려다보며 짜증을 냈다.
결국, 왜곡된 공간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시간만 축냈기 때문이었다.
미리 챙겨온 간식들이 아니었다면 가축처럼 풀을 뜯어 먹어야 했으리라.
“이봐, 당신이 리더잖아! 어떻게 설명 좀 해봐!”
“저보고 설명하라고 한들…….”
주변에서 들어오는 항의에 해남 원정대의 리더를 맡은 스노우볼의 부길드장은 난감한 얼굴이었다.
그도 이런 사태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기 때문이었다.
외부에서 도와준 영웅들조차 대략적인 정보만 알고 있고, 휴대폰도 작동하지 않는 상황.
모두가 제대로 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던 때였다.
‘이건 이용할 수 있겠는데?’
주위의 반응을 살피던 김현태가 목을 가다듬고서 외쳤다.
“잠시 주목!”
“……?”
“저는 원정대원으로서 원정대장의 교체를 요구합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죠?”
“이런 비상 상태에 발 빠른 대응을 하지 못한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특히 저쪽 분은 흘러가는 상황에 따라가기만 바쁠 뿐 아무런 방법도 제시하지 못했죠!”
리더의 자리에서 한 사람을 끌어내리려는 김현태였다.
그에 처음부터 자기 역할이 부담스러웠던 스노우볼의 부길드장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를 대신하여 원정대를 지휘하실 분이 있다면 얼마든지 넘겨드리겠습니다.”
“그 자리, 제가 이어받도록 하겠습니다.”
“김현태 씨가요?”
“우리가 지금 여기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한시라도 빨리 고통받는 시민들을 도와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 김현태가 그 일에 가장 앞장서겠습니다.”
그리 길지 않은 대화가 오간 뒤.
끝내 먼저 말을 꺼낸 김현태에게 원정대의 리더 자리가 넘겨졌다.
평소 그의 높은 인지도 덕분인지 거부감을 드러내는 사람들은 없었다.
‘드디어 날 위한 완벽한 무대가 준비되었구나!’
한순간에 원정대장이 되어 버린 김현태는 크게 만족한 얼굴이었다.
가장 주목받는 자리에서 사람들을 대표하는 역할.
김현태는 영웅 영화 속에 비춰질 자신의 영웅적인 면모를 상상하며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케로즈에게 고용된 카메라맨은 조금씩 포즈를 잡는 김현태의 모습을 영상으로 담아냈다.
‘김현태가 이런 사람이었을 줄이야…….’
하지만 김현태의 실제 성격을 알게 된 카메라맨은.
김현태의 곁에서 입을 다물고 있는 이미아만큼이나 그의 말이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