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공항
“파라스에게 연락이 오지 않는군.”
“표식이 사라졌잖아. 이미 죽은 거 아냐?”
“아니요!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건 확실합니다.”
“그러면 왜 소식이 없는 건데?”
여수에 근접한 영웅들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순천의 생존자들 사이로 숨어들었던 파라스.
그의 탁월한 임무 수행 능력을 믿고 있던 이세계인들이었지만.
약속된 시간을 훌쩍 넘었는데도 그에게서 원격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다.
소식을 기다리던 이들 중 한 명은 표정을 찡그리며 말했다.
“정확히는 연락을 못 하는 거겠지. 그 마력 수갑 같은 것에 당했을 확률이 높아.”
“대체 그런 물건은 어떻게 만들어낸 건지…….”
“지구의 수준을 너무 얕보지 마.”
살아 있는 생명체의 마력을 강제로 억제하는 기구.
차라리 범죄자를 죽였으면 죽였지, 아제시아에는 그런 기능을 하는 물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듯 지구에서는 일반인들도 흔하게 접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된 마공학이, 아제시아에서는 높은 권력을 가진 고위층도 접하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
두 세계가 서로 다른 역사를 쌓아 왔기 때문이었다.
“저 영웅들은 일반인들과 우리를 구분할 수 있는 듯해.”
“쯧! 이렇게 되면 파라스는 포기해야겠군.”
“성격은 더러워도 제법 괜찮은 녀석이었는데…….”
멸망한 아제시아부터 지구에 도착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했던 동료를 포기하는 건 쉽지 않은 일.
그렇지만 별다른 방도가 없음을 깨닫고 침묵하는 이들이었다.
쾅!
그때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팔과 다리부터 시작해서 온몸에 피칠갑을 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피로 적셔진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
“얍얍! 제리가 돌아왔지롱!”
“제리! 그 피는 또 뭐야!”
“아니, 있잖아요? 돌연변이 중에 제 말을 너무너무 안 듣는 놈들이 있는 거 있죠? 그래서 그만…….”
제리라고 불린 여성은 손끝에 묻은 핏물을 혀로 핥았다.
불만을 토로하는 것치고는 꽤 즐거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몬스터 양산을 맡겨 뒀더니 몬스터를 죽이고 오면 어쩌냐.”
“21마리밖에 안 죽였는데!”
“21마리나 죽였다고?!”
한 남자가 입을 쩍하고 벌렸다.
몬스터 양산이 아니라 학살을 하고 온 셈이었으니.
“IUPC를 건드린 건 아니겠지?”
“죽이진 않았어요.”
“건드렸다는 얘기군.”
“데헷!”
윙크하며 V자를 그린 손을 눈 옆으로 가져가는 제리.
그런 가벼운 행동에 안에서 대화를 나누던 이세계인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그녀에게 얻어맞고 중상을 입은 IUPC 회원만 7명이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항상 그 이상의 성과를 가져오니 크게 나무랄 수도 없었다.
“그나저나 여기 분위기가 왜 이리 칙칙해요?”
“……파라스가 영웅들에게 당한 것 같다.”
“헤에?”
파라스가 잡혔다는 소식에 제리는 눈을 크게 떴다.
“파라스가 잡혔어요? 뒈진 건 아니고요?”
“아직 죽진 않았습니다.”
“확실해?”
“네.”
벽에 걸린 지도를 관리하는 케인은 영웅들의 표식이 몰려 있는 순천 지역을 바라봤다.
어느 순간부터 순천 쪽에서 파라스의 표식이 보이지 않았지만.
케인은 미리 파라스와 맺어 둔 결속 마법을 통해 그의 생명이 끊어지는 순간을 포착할 수 있었다.
“저쪽에 제법 눈썰미가 좋은 놈이 있나 봐요?”
“공간 왜곡을 빠져나온 건 절대로 요행이 아닐 거다.”
“흐응? 그런데 저놈들 왜 점점 흩어지는 거 같죠?”
“……?!”
갑작스러운 제리의 지적에 이세계인들의 시선이 지도로 향했다.
그녀의 말대로 순천에 몰려 있던 영웅들의 표식이 서로 각기 다른 방향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서로 다른 지역으로 가려는 건가?”
“아니. 애초에 여수로 가기 위해서 모인 거였으니 그건 아닐 거야.”
“이러면 더 귀찮아지겠는데.”
원정대에서 벌어진 변화에 이세계인들이 수군거리는 사이.
손가락에 묻은 피를 쪽쪽 빨며 지도를 바라보던 제리가 말했다.
“제가 잠깐 올라가서 살펴보고 올게요.”
“뭐?”
혼자 위로 올라가서 영웅들을 처리하고 오겠다는 제리였다.
그에 누군가가 우려하듯 말했다.
“괜찮겠어?”
“에이, 나 못 믿어요?”
“…….”
“날 안 믿으면 대체 누굴 믿을 건데에에?”
정신에 살짝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제리는 아제시아의 멸망으로부터 살아남은 이들 중에서도 재능이 넘치는 인물.
뛰어난 전투 능력은 물론이고 몬스터를 부리는 능력이 대단했기에 중요한 일에만 투입되는 편이었다.
“가는 김에 겸사겸사 파라스도 데려올게요. 뭐, 이미 죽었으면 어쩔 수 없고.”
제리가 지도를 바라보며 활짝 미소 지었다.
*****
“다들 목적지에서 뵙겠습니다.”
“네!”
마침내 박재경의 입에서 여수 진입이 선언된 직후.
유지한 파티는 박재경이 이끄는 윤도하 파티의 뒤를 따랐다.
그 뒤로는 정영욱 파티가 따라붙었다.
원정대의 다른 영웅들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3개 파티의 조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칠라의 등에 매달려 있던 남호열은 유지한에게 물었다.
“정말로 산을 넘는 건가요?”
“예.”
일행의 이동 경로는 박재경의 지시에 따라 유지한이 설계하게 되었다.
그 결과 멀쩡한 길을 놔두고 작은 산을 몇 개씩이나 넘어가며 빙 돌아가는 경로가 세워졌다.
“산 위에서도 등산로가 아니라 오직 정돈되지 않은 길로만 이동합니다.”
소모되는 체력이나 시간으로 생각했을 때는 매우 비효율적이었지만.
유지한은 이러한 방향이 옳다고 믿었다.
아무리 준비를 많이 했더라도 인적이 드문 산에 함정을 파놓지는 못했으리라.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완전히 맞아떨어졌다.
박재경이 이끄는 일행은 순천을 벗어나 여수 공항 근처에 도착하기까지.
단 한 차례의 위협이나 몬스터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유지한은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며 생각했다.
‘여긴 추적당하는 사람이 없는 모양인데.’
추적이 붙어 있던 건 순천에서 떨어져 나간 영웅들인 듯했다.
아마 지금쯤 그들은 다른 사고에 휘말렸으리라.
“공항에 잠깐 들렀다가 시청으로 가죠.”
흩어진 원정대가 모이기로 예정한 곳은 여수 시청.
공항은 사람이 많이 몰릴만한 공간인 만큼 확인 차 들리는 것이었다.
“부길드장님!”
“아, 여러분도 여기 계셨군요.”
그때 순천에서 헤어졌던 한 무리의 영웅들이 박재경에게 다가왔다.
그런데 그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잠깐 저쪽을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네?”
벽에 몸을 숨긴 그들이 가리킨 곳은 공항의 정문 앞으로 길게 이어지는 일자 도로.
평소에는 차량들이 길게 늘어서 있을 그곳에.
지금은 몬스터들과 인간들이 함께 늘어서 있었다.
“IUPC다.”
모두 몸에 약물을 꽂은 IUPC 회원들.
벽 뒤에 몸을 숨긴 유지한은 그들의 행색을 살폈다.
머리카락 전체를 염색한 사람도 있었으나 서로 같은 일행이라는 게 티가 났다.
꼴을 보아하니 여수 공항은 이미 놈들의 손에 넘어간 듯했다.
“저쪽에 시민들이 있습니다.”
“……정말이군요.”
공항의 주차장 한쪽에는 끈으로 양팔이 구속된 사람들이 놓여 있었다.
박재경은 하나같이 고개를 숙이고 있거나 겁을 집어먹은 그들을 보며 이를 갈았다.
“어떡할까요?”
“모든 영웅은 공격 준비.”
박재경의 지시가 떨어지자 딜러들은 각자 공격을 준비했다.
석궁과 활시위에 화살이 장전되고, 마법사들의 주위로 마력이 모여들었다.
그때 유지한이 말했다.
“저희 파티가 시민들 쪽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알겠어요.”
박재경은 유지한의 요청을 검토해 보지 않고 곧장 수락했다.
이제는 그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열 씨를 부탁합니다.”
“맡겨 두세요.”
동행한 지원팀을 보호하는 역할은 정영욱 파티가 맡았다.
이윽고 모든 공격 준비가 끝났을 때.
“발사!”
공항의 정문을 향해 공격이 쏟아져 내렸다.
콰과과과과광——!
선제공격은 가장 위협이 될 만한 몬스터들에게 적중했다.
예고 없는 습격에 IUPC 회원들은 크게 당황한 모습이었다.
소란을 듣고 공항 밖으로 빠져나오는 이들도 있었다.
[파이어 월]
구속된 시민들과 IUPC 회원들 사이로 김시후가 소환한 커다란 불의 벽이 세워졌다.
적들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찍!”
“커억!”
앞을 가로막는 남자를 칠라가 방패로 멀리 날려 버린 뒤.
유지한 파티는 묶여 있는 시민들에게 도달했다.
영웅들을 마주한 시민들의 얼굴에는 희망이 서렸다.
“까악!”
“까아악!”
그때 [파이어 월] 위로 넘어오는 몬스터들이 있었다.
날개 달린 돌연변이 괴마귀들이었다.
“유리 씨!”
“네!”
민유리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녀석들을 향해 마력 화살을 쏘아 냈다.
그러자 몇 마리의 괴마귀가 화살에 맞고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공격을 잘 피해 내는 개체가 있었다.
등에 사람이 타고 있는 놈들이었다.
‘굳이 타고 다니는 이유가 있던 건가.’
조종자와 몬스터와 붙어 있을수록 움직임이 더 빠르고 날렵해지는 듯했다.
괜히 위험을 부담하는 게 아닌 것이었다.
퍼드득!
퍼드드득—!
괴마귀들이 날개를 힘차게 휘저을 때마다 검은 깃털이 땅으로 날아들었다.
텅! 텅! 텅!
유지한과 칠라는 주변 사람들을 노리고 떨어지는 깃털들을 걷어냈다.
뒤이어 김시후와 민유리가 괴마귀를 하나씩 처치해 갔다.
그렇게 공격과 방어가 안정적으로 이뤄지는 구도로 대치가 이어지고.
다른 영웅들의 활약에 힘입어 공항 앞이 정리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때 검을 갈무리하는 유지한의 시야에 바닥에 떨어진 하얀색 물체가 들어왔다.
“저쪽에 널려 있는 뼈는 뭐지?”
“…….”
“…….”
“…….”
그의 질문에 살아남은 IUPC 회원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누가 보더라도 사람의 뼈였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아직 채 마르지 않은 피가 묻어있는 뼈.
“이 미친 새끼들이!!”
“야야, 진정해.”
“부길드장님도 가만히 계시잖아.”
시민들이 몬스터에게 잡아먹힌 것을 눈치채고 분노하는 영웅들이 등장했지만.
그들은 정보 파악이 우선이라는 걸 깨닫고 냉정을 되찾았다.
“재경 씨. 이놈들 어쩌실 거죠?”
“데리고 갈 여유는 없습니다.”
검을 쥐고 있는 박재경은 사로잡은 IUPC 회원들을 차가운 얼굴로 내려다봤다.
그들 중 이미 반절은 죽어 나간 상황에 그녀는 당장이라도 남은 잔당들을 쓸어버릴 분위기였다.
“제가 처리해도 되겠습니까.”
“그러세요.”
박재경의 허가를 쉽게 따낸 유지한이 한 남자의 앞으로 다가갔다.
영웅들에게 사로잡힌 상황에서도 얼굴에 반항기가 가득한 사람이었다.
분을 참지 못하고 숨을 씩씩대는 그에게 유지한이 물었다.
“공항에서 뭘 하고 있던 거냐?”
“크큭! 그걸 알려 줄 것 같아?”
서걱!
딱 1번.
1번의 대답을 거부한 남자의 목이 단번에 잘려나갔다.
구태여 생사를 확인할 필요도 없는 즉사였다.
유지한을 비웃는 표정으로 생을 마감해 버린 남자의 목은 바닥으로 데굴데굴 굴러떨어졌다.
“히익!”
그 광경에 IUPC 회원들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반면, 검에 묻은 핏물을 털어 낸 유지한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말했다.
“끝까지 의리를 지키고 싶다면 그렇게 해.”
“…….”
“다만 우리가 지금 인내심이 바닥난지라 너희를 곱게 대할 수가 없다는 건 알아 두고.”
유지한은 다른 IUPC 회원에게 검을 겨눴다.
똑같은 질문이 떨어지자 그는 크게 고뇌하는 표정으로 침묵했지만.
서걱!
유지한은 대답을 나오는 걸 기다리지 않고 그의 목을 쳤다.
“다음.”
2명의 목을 베어낸 검이 3번째 인물을 가리키는 때였다.
잠자코 있던 어느 여성이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 악독한 살인마가……!”
“칠라!”
“찍!”
꽝!
김시후의 외침에 칠라가 주먹으로 여성의 머리를 내리쳤다.
하이톤의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그녀를 본 유지한이 말했다.
“한 가지 규칙을 정해 줄게.”
“……?”
“내가 질문하고, 너희는 대답한다. 이 간단한 규칙을 어기는 사람은 죽는다. 이상.”
싸늘함마저 느껴지는 그의 선언에 IUPC 회원들이 모두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