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반격
정체가 탄로된 이세계인의 처분은 주사위 길드에게 맡겨졌다.
박재경은 이번 사태가 모두 마무리될 때까지 그를 살려 놓을 예정이었다.
살아 있는 상태에서 다른 이세계인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게 할 거라나.
그녀가 마주했던 끔찍한 경험들을 그대로 돌려주겠다는 것이었다.
“직장 동료는 평범한 시민이었군요.”
파라스의 동료라고 나섰던 여성은 틀림없는 한국인이었다.
그가 이번 사태를 일으킨 이세계인이었다는 말에 여성은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회사에서는 철저하게 위장 신분을 내세운 덕분이었다.
“그래서 지한 씨가 알아낸 정보가 뭔가요?”
박재경은 유지한이 파라스로부터 캐낸 정보를 궁금해했다.
이세계인의 마력으로부터 끌어낸 기억들.
어쩌면 거기에 이 상황을 타개할 답안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에 유지한이 말했다.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제가 모든 걸 알아내지는 못했다는 겁니다.”
유지한이 타인의 마력을 통해 기억을 엿보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누군가가 긴 세월 동안 쌓아 올린 기억들을 전부 들여다볼 수는 없는 것이었다.
“재경 씨께서 가장 궁금해하실 윤도하 씨의 현재 위치는 모릅니다. 그렇지만 놈들의 목적은 알아냈습니다.”
“그게 뭔가요?”
“한국을 점령하는 것.”
“……!”
그의 대답에 박재경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이세계인들이 원래 살고 있던 세계의 이름은 아제시아. 그 아제시아가 멸망의 위기에 처한 이후 최후의 선택으로 차원 이동을 시도했더군요.”
“차원 이동이라는 게 가능한 겁니까?”
“구체적인 방법은 저도 모릅니다.”
“아제시아가 멸망한 이유는요?”
“다량의 운석 충돌 때문입니다. 황폐해진 땅에서 살아남기가 어려웠던 모양이에요.”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져 내린 작은 운석들로 인해 멸망의 위기를 겪은 아제시아.
그런 위기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힘을 합쳐 차원 이동을 시도했고, 성공하여 지구에 도착했다.
“몬스터 변이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몬스터와의 공생을 원하는 IUPC와는 서로 뜻이 맞았죠. 더욱이 한국으로 넘어왔던 그들이 아시아인을 닮은 덕분에 주변의 의심 없이 사회에 스며들 수 있었고요.”
“……어떤 사정인지는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침략이라는 선택을 한 걸까요?”
박재경은 이세계인들이 한국을 노리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차라리 자신들의 정체를 털어놓고 국가의 협조를 구했다면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리라.
이종족들과 달리 지구의 인간들과 외모도 똑같은 덕분에 차별을 당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이세계인들은 지구를 이용해서 멸망한 아제시아를 재건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네?”
“재경 씨. 플로른이 특정 지역에서만 자라나는 건 알고 계시죠?”
“한국과 일본, 독일, 미국의 일부 지역에서만 자랄 수 있는 거로 알아요.”
최고의 아티팩트 소재로 손꼽히는 나무 플로른의 재배 지역은 전세계에서도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그 수가 적었다.
그 외의 지역에서는 싹조차 틔울 수 없었는데, 이유에 대해서는 제대로 밝혀진 게 없었다.
“그만큼 특별한 땅 중에서 인구수나 면적으로 생각했을 때 가장 만만해 보이는 나라는 한국이고요.”
“조금 분하지만 그렇죠…….”
“한국을 시작으로 지구에 잠재된 힘을 모조리 끌어내어 멸망한 아제시아를 복구한다. 이게 놈들의 최종 목적입니다.”
“…….”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달받은 박재경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
박재경과의 대화를 마친 유지한은 마트의 2층으로 돌아왔다.
그를 발견한 시민들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트의 생존자들에게 유지한은 난데없이 사람을 후려친 사람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었다.
유지한은 그런 주변의 반응을 무시한 채 마트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찍찍!”
“오셨어요.”
민유리와 칠라는 어두운 밤 중에도 다른 영웅들과 함께 옥상에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아직 전기가 들어오는 마트와는 다르게 주변에는 불빛이 꺼져 있는 건물들이 많이 보였다.
“시후는요?”
“아까 아래로 내려갔어요.”
고개를 끄덕거리던 유지한은 실프와 함께 칠라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녀석에게 등을 기대자 보들보들한 연회색의 털이 유지한의 피부를 간지럽혔다.
‘피곤하다.’
샘플링을 사용한 대가가 찾아오는 것인지, 몸이 조금 나른하고 피곤했다.
그렇지만 그는 이번 사태의 핵심이 되는 정보를 파악하는 데 성공했다.
반항하는 적에게서도 정보를 끌어내는 사기적인 능력!
그럼 능력을 사용했으니 이 정도의 대가는 감당할 수 있었다.
“유리 씨.”
“네.”
유지한은 민유리에게 이세계인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를 전했다.
마트에 모여 있는 원정대에게는 내일 날이 밝으면 공개될 것들이었다.
그걸 전해 들은 민유리는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만약 그 계획이 성공하면 여긴 어떻게 되는 거죠?”
“글쎄요. 힘을 다 빼앗기면 지구가 멸망하지 않을까요.”
다른 세계를 복원하는 대가로 지구가 멸망해 버리는 것.
충분히 예상이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풋!”
그때 민유리가 뜬금없이 입에서 웃음을 내뿜었다.
유지한은 슬쩍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제가 그때 꿀잼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도 모른 채 괴냥이나 잡고 있었겠죠?”
“글쎄요……. 그건 모르는 일이죠.”
그녀의 말에 유지한은 머리를 긁적였다.
민유리가 자신의 길드를 해산하고 꿀잼에 합류한 것으로 그녀의 인생에 많은 변화가 생긴 것은 사실이었으니.
합류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 전과 비슷한 삶을 보내지 않았을까.
“분명 그랬을 거예요. 주변에서 뭐라고 하든지 말든지 그저 칠라와 함께 괴냥이를 사냥해서 팔고, 돈을 벌고……. 참 지루하고도 쓸모없는 세월을 보냈겠죠.”
“1인 길드로 활동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예요. 쓸모없다고 비판할 정도는 아니라고 봅니다.”
“절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거 아니에요?”
“이게 과대평가라면 4급 영웅 중에 절반 이상은 나가떨어져야겠네요.”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는…….”
민유리는 너무 과장하지 말라며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유지한은 이제껏 단 한 번도 그녀를 과대평가한 적이 없었다.
신체에 풍부한 마력을 보유한 민유리는 사실상 총알이 넘쳐나는 병기와도 같다.
조건만 갖춰진다면 후방에서 끝없이 공격을 가할 수 있는 원거리 딜러를 누가 무시할 수 있겠는가.
“이번 일이 잘 마무리되면 동생이신 민소연 씨의 치료 방법도 더 조사해 보기로 하죠.”
“어떻게요?”
“새로운 몬스터들이 많아졌으니 그에 따라 파생되는 부산물도 늘어날 겁니다. 예를 들면 임실에서 마주쳤던 젖소들의 우유 같은 거요. 그것들을 연구실에 맡겨서 조사를 의뢰하면 뭔가 단서가 나올지도 모릅니다.”
“아…….”
새로운 몬스터의 등장은 곧 새로운 소재의 발견으로 이어진다.
운이 좋다면 도움이 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터.
“그렇다고 그놈들에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고요.”
“알고 있어요.”
민유리는 입술을 일자로 다물었다.
IUPC에서 의도적으로 몬스터와 돌연변이를 만드는 행위가.
동생을 치료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에 묘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었다.
“유리 씨, 저 잠깐 눈 좀 붙이겠습니다.”
“네. 편히 쉬세요.”
유지한은 칠라에게 등을 맡긴 채 눈을 감았다.
민유리는 눈을 감은 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역시 피곤하신가 봐.’
오늘 하루 원정대에서도 단연코 가장 많은 활동량을 보인 영웅은 유지한이었다.
이제껏 그가 지치지 않았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내가 지한 씨를 너무 의지하고 있는 건 아닐까.’
홀로 활동할 때는 칠라 외의 누군가에게 의지한다는 건 상상조차 하지 않았거늘.
민유리는 이제 유지한에게 정말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었다.
좋게 말하자면 파티의 리더를 신뢰하는 것이지만.
이것이 마냥 긍정적인 변화인지는 알 수 없었다.
“찍찍.”
칠라는 민유리를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또 쓰잘때기 없는 생각을 하고 있구나, 라는 눈빛이었다.
순간적으로 마음을 읽힌 듯한 느낌에 민유리가 칠라를 째려보며 말했다.
“……너 왜 눈을 그렇게 떠.”
“찍, 찍찍. 찍찍찍.”
“뭐라는지 모르겠거든?”
“찍!”
말이 통하지 않아서 답답하다는 듯 주먹으로 가슴을 콩! 하고 치는 칠라였다.
*****
다음 날 아침.
판매용 텐트가 진열된 곳에서 휴식을 취하던 유지한이 눈을 떴다.
‘너무 잘 잤네.’
원래대로라면 밤사이에 순번을 나누어 주변을 경계하는 일을 맡아야 했겠지만.
순천까지 안전하게 도착한 것에 유지한이 큰 역할을 했다는 걸 알고 있는 주변의 배려로 유지한 파티는 경계 근무에서 빠질 수 있었다.
그가 파티원들을 데리고 2층 식품코너로 내려가자 아침 식사 중인 사람들이 있었다.
유지한 파티는 그사이에 껴서 시리얼 따위로 간단하게 식사를 진행했다.
“한국을 점령한다고?”
“어딜 감히!”
식사 이후에는 다른 원정대원에게도 유지한이 알아낸 정보가 전달되었다.
이세계인들의 목적을 전해 들은 사람들은 부쩍 화를 내는 분위기였다.
“부길드장님. 앞으로 어떻게 움직이실 겁니까?”
“오전 10시까지만 정기준 씨를 기다리겠습니다.”
먼저 출발했었던 정기준과 나머지 레드홀의 길드원은 밤사이 순천역에 도착하지 못했다.
박재경은 이곳에서 짧게나마 그들을 기다리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점심식사가 끝나기 전까지 정기준 씨가 도착하지 않으면 곧바로 여수로 이동합니다. 물론 레드홀 분들은 여기 남아 계셔도 좋습니다. 그 대신 이곳 생존자들의 보호를 맡아 주세요.”
“알겠습니다.”
레드홀의 길드원들은 순천역 앞에 직접 나가면서까지 정기준 일행을 기다렸다.
하지만 정해진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음에도 그들은 자리에 도착하지 못했다.
한편, 그 시각 유지한은 박재경과 여수 진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파티를 3개씩 나누자고요?”
“예. 인원을 최대한 쪼개서 서로 다른 경로를 통해 이동하시죠.”
“하지만…….”
원정대를 잘게 쪼개어 따로 움직이자는 유지한의 의견에 박재경은 난감을 표했다.
처음 예정했던 대로라면 순천에서부터 인원을 나누는 게 맞겠지만.
현재 원정대의 인원이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을뿐더러 여기까지 오는 동안 겪었던 여러 사고들 때문에 크게 걱정이 되는 그녀였다.
인원이 분산된다는 것은 곧 전력의 약화로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지한은 계속해서 그녀를 설득했다.
“놈들은 이미 원정대의 동선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모종의 방법으로 저희를 추적하고 있는 거죠. 그렇다고 이곳의 모두를 추적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인원을 나눠서 움직인다면 적들에게 큰 혼란을 가져다줄 수 있을 겁니다. 잘하면 저희 중에 누가 추적을 당하고 있는 건지도 구분할 수 있을 테고요.”
“합당한 의견이지만, 어쩌면 더 위험해질 거예요.”
“이번 원정에 뛰어든 이상 다들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습니다.”
“으음…….”
박재경은 끝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지한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앞서 그랬던 것처럼 유지한 파티는 저와 함께 이동합니다.”
“예.”
박재경의 지시에 따라 원정대는 서로 친분이 있는 2급 파티와 3급 파티의 조합으로 쪼개져 갔다.
유지한은 바쁘게 움직이는 영웅들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지금부터는 반격이다.’
적들과 정보의 격차가 크게 좁혀진 상황.
저 어딘가에서 지시를 내리고 있을 놈들에게는.
지금껏 당한 것의 몇 배로 돌려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