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잡았다
“앞으로 절대 좁은 지형으로는 가지 않을 겁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박재경의 뜻에 따라 원정대는 길을 조금 돌아가게 되더라도 넓은 지형을 통해서 이동하기로 했다.
목적지에 빠르게 도착하는 것보다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옳았던 것인지.
터널을 빠져나와 이동 경로를 조금씩 변경한 뒤에는 별다른 말썽이 일어나지 않았다.
‘벌써 저녁인가.’
유지한은 검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시간은 어느덧 해가 저물은 저녁.
선로와 고속도로, 평지 등을 오가며 이동하던 원정대는 본래 열차의 목적지였던 순천에 거의 다다랐다.
아마 지금쯤이면 논산에서 연락이 끊어졌다는 다른 선발대나 길드들도 현실로 돌아오지 않았을까.
그렇기를 바랄 뿐이었다.
“아직 통화되시는 분 없죠?”
“없습니다!”
“예정했던 대로 순천역으로 이동하죠.”
본래의 계획은 여수에 남겨 둔 팀과 연락을 취한 뒤 주변 지역 조사를 벌일 예정이었으나.
원거리 통신이 막혀 있는 지금은 별도의 계획을 세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지원팀! 조금만 더 힘내 주세요!”
“알겠습니다!”
원정대는 속도를 조금 더 높여 선로를 따라 달렸다.
하천이 보이는 곳을 넘어가자 마침내 순천역의 건물이 보였다.
그런데 순천역에 가까워질수록 영웅들의 표정에는 조금씩 금이 갔다.
“이, 이건…….”
“이럴 수가……!”
영웅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순천역을 바라봤다.
역 건물 대부분이 와르르 무너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역의 간판이 보이는 정문 쪽은 처참했다.
‘순천역’이라고 적혀 있어야 하는 파란색 간판은 ‘역’이라는 글자 하나만을 남겨 둔 채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고.
그 간판 아래의 입구는 무너져 내린 건물의 잔해로 뒤덮여 있었다.
그나마 멀쩡한 건 멀리서 바라봤던 건물의 측면뿐.
“저쪽에 사람이 죽어 있습니다!”
“저기에도!”
정문 앞 광장에는 여기저기 인간과 몬스터의 시체가 떨어져 있었다.
긴 더듬이같이 생긴 몬스터의 일부를 발견한 유지한은 과거의 기억을 헤집었으나.
그것이 한 번도 마주친 적 없었던 몬스터라는 사실에 도달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먼저 출발했던 정기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자리의 모두가 처참한 광경을 마주하고 말을 잇지 못하는 가운데.
양쪽 귀를 쫑긋거리던 칠라가 갑자기 네발로 어디론가 달려갔다.
“찍찍!!”
무너진 관광안내소 건물을 바라보던 녀석이 큰 목소리로 울어 재꼈다.
칠라를 따라간 민유리는 그 건물의 작은 틈새 사이로 사람 한 명을 찾아냈다.
“여기 기절한 사람이 있어요!”
옆으로 달려온 사람들이 건물 잔해를 안전하게 치워 냈다.
다행히 건물에 갇혔을 뿐, 몸이 완전히 눌려 있던 것은 아니었다.
구조된 남자는 복장으로 보아 관광안내소의 직원처럼 보였다.
주변의 소란을 느낀 것인지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헉! 허어억!”
“진정하세요!”
남자는 눈을 뜨자마자 겁을 집어먹은 듯이 손으로 머리를 보호하며 몸을 잔뜩 웅크렸다.
박재경은 그의 심호흡을 유도하며 최대한 진정시켰다.
이내 정신을 차린 남자는 떨리는 손으로 역을 가리키며 말했다.
“모, 몬스터들이 나타나서 이 주변 사람들을 다 죽였어요!”
“어떤 몬스터였죠?”
“엄청나게 큰 바퀴벌레처럼 생겼었는데…….”
커다란 바퀴벌레라는 말에 많은 사람들이 표정을 확 굳혔다.
민유리도 그중의 하나였다.
“세상에! 정말 끔찍한 걸 만들어 냈네요.”
“절대로 탄생해서는 안 되는 생명체가 나와 버렸나…….”
유지한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더듬이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그것은 바퀴벌레의 더듬이였던 모양이었다.
“새로운 소재인가?”
“조사해 볼 가치가 있군.”
남호열을 비롯한 대장장이들의 시선이 더듬이로 향했다.
그때 박재경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남자가 말했다.
“얼굴이 조금 익숙한데……. 혹시 주사위에서 오셨나?”
“네. 맞습니다.”
“아까 역 안으로 들어간 영웅들도 주사위 소속이라고 하셨는데?”
그의 대답에 박재경은 몸을 돌려 무너진 순천역을 바라봤다.
빠르게 그 앞으로 달려간 그녀가 오러가 담긴 검으로 건물을 잘라 냈다.
설마 하는 심정이었다.
“아…….”
잠시 후 역 안에서는 죽은 몬스터들과 사람의 시체가 발견됐다.
그것도 얼마 전, 여수에서 박재경과 잠깐이나마 함께 행동했었던 3급 영웅 중 한 명이었다.
——영광입니다, 부길드장님!
항상 존경하는 박재경을 멀리서 바라만 보다가.
처음으로 작전을 함께하게 되어 영광이라고 말했던 여자 영웅.
땡그랑!
바닥에 검을 내던진 박재경은 처참한 심정으로 죽은 길드원의 몸을 끌어안았다.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부길드장님…….”
빠드득!
박재경이 이빨을 가는 소리가 주위에 울려 퍼졌다.
서울부터 순천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큰 피해 없이 내려온 원정대가.
비로소 유지한이 언급했던 전쟁이라는 단어를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
역 안에 죽어 있던 영웅의 숫자는 총 4명.
모두가 같은 파티에 소속된 주사위의 영웅들이었다.
그중 양쪽 발목이 잘려져 있는 시체의 주머니 속에는 구겨진 종이가 들어 있었다.
[이 종이를 보거든 꼭 주사위 길드나 영웅부에 전달해 주세요.]
[주사위의 특수작전 팀은 몬스터가 폭증한 여수에서 시민들을 데리고 순천으로 올라왔습니다.]
[순천역에서 선발대가 오기를 기다렸으나, 열차가 도착하지 않은 관계로 위에서 또 일이 벌어졌다는 걸 깨달았고…….]
…….
…….
[아버지 어머니 죄송합니다.]
[내 유산의 절반은 고아원에 기부해 주세요.]
순천역으로 올라온 것에 대한 상황 설명으로 시작하여 유언까지 적어 놓은 종이였다.
자신의 시체를 발견하는 이들을 위해 남겨 놓은 것이다.
“……죽인다. 죽일 거야.”
“반드시 죽여 버릴 거야. 그 개새끼들.”
“한 놈도 살려 둬선 안 돼.”
죽은 이들과 안면이 있던 영웅들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동료들의 안식을 위해 복수를 다짐하는 인원은 늘어만 갔다.
그때 박재경이 말했다.
“제가 허락하기 전까지 IUPC 회원을 살해하는 건 금지입니다.”
“아니, 왜죠?”
“산 채로 데려가서 죽음보다 더 끔찍한 형벌을 내릴 겁니다.”
검을 쥔 박재경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그렇게 주사위의 영웅들이 흉흉한 분위기를 풍기는 가운데.
그들을 배려하여 거리를 둔 레드홀의 영웅들과 유지한 파티는 주변을 조사하고 있었다.
“이쪽은 뭐가 없네요.”
“이쪽도요.”
“찍찍!”
유지한 파티는 역 근처에 있던 하천을 살폈다.
혹시라도 물속에 몬스터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김시후가 마법까지 이용하며 탐색에 나섰지만, 딱히 발견된 건 없었다.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다.”
몬스터는 커녕 작은 동물 하나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순천역을 습격했다던 몬스터들은 어디론가 떠나 버린 모양이었다.
유지한은 이내 근처에 있던 편의점에서 사탕이 가득 들어 있던 상자 하나를 챙겨서 역 앞으로 돌아왔다.
“받으세요.”
“네?”
그에게 상자를 건네받은 박재경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사탕은 왜요?”
“울적할 때 단 음식을 먹으면 좀 낫습니다.”
“아…….”
“길드원 분들에게도 하나씩 나눠주세요. 복수를 한다고 해도 컨디션 조절은 필수입니다.”
유지한에게 설득당한 박재경은 상자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어 입에 넣었다.
“달다.”
“꽤 괜찮죠?”
“……지한 씨는 뭐랄까, 우리 엄마 같아요.”
“좋은 뜻인가요?”
“보통 엄마를 싫어하진 않겠죠.”
“그럼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후훗.”
사탕을 먹으며 미소를 짓는 박재경이었다.
잠시 후 자리의 모든 이들이 입안에서 사탕을 굴려 댔다.
그 덕분에 살벌하던 분위기가 조금씩 풀어지는 듯했다.
“박재경님!”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레드홀의 영웅들이 다른 생존자를 찾아냈다는 소식을 전했다.
순천역 앞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들을 따라 이동했다.
도착한 곳은 역 인근에 있는 대형마트였다.
“어디 계시는 거죠?”
“2층 식품 코너입니다.”
멈춰 있는 에스컬레이터를 모두가 힘차게 뛰어 올라갔다.
음식 냄새가 풍기는 2층에 도착하자 여러 명의 생존자가 한데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우와!”
“유명한 영웅들이다!”
“이제 우린 살았어!”
“휴우우…….”
나름 인지도를 쌓은 영웅들의 등장에 사람들은 크게 안도하는 분위기였다.
“부길드장님.”
“앗!”
2층 안쪽에서 상처 입은 주사위의 영웅들이 걸어 나왔다.
다리를 다친 이들은 주변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정말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아니요! 살아있는 것만으로 다행입니다.”
박재경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시민들을 지켜 낸 길드원들을 위로했다.
“다른 파티들은 어딨죠?”
“적들을 따돌리기 위해 서로 찢어졌습니다.”
“어디로 간 건지는 모르고요?”
“적어도 다시 여수로 내려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설마 위로 올라갔다는 건가요?”
“아마도…….”
“하아…….”
박재경의 입에서 탄식이 절로 나왔다.
아무래도 서로 길이 엇갈린 모양이었다.
한 가지 확실해진 건 전주에서 헤어졌던 정기준이 아직 순천에 도착하지 못했다는 것.
“상처 보여 주세요.”
“끄으으!”
새로운 부상자들이 힐러들에게 치료받는 사이.
마트 2층을 둘러보던 유지한은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 여수에 들어가면 더 힘들어지겠어.’
현재 원정대의 전력과 앞으로 등장할 적들을 생각했을 때.
상대를 압도할 수 있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정기준이 이끄는 무리가 합류한다면 부담이 크게 덜어지겠지만.
당장은 지켜야 할 시민들까지 늘어난 상황이라 썩 좋은 조건이라고 볼 수 없었다.
‘내가 더 잘하자.’
실프에게 잠재되어 있는 힘은 윤도하의 정령인 무무만큼이나 폭발적이다.
그 힘을 끌어내고 제대로 다룰 수만 있다면 불리한 전세를 뒤집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어?”
유지한은 2층에서 쭈그려 앉아 있던 한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그 남자는 주위의 다른 사람들처럼 밖에서 발생한 싸움 때문에 마트로 대피한 것처럼 보였다.
가만히 그의 행동을 주시하던 유지한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서 그의 앞에 섰다.
“왜, 왜 그러시죠?”
남자는 코앞으로 다가온 유지한을 보고 흠칫 놀랐다.
시민으로서는 지극히 평범한 반응이었다.
영웅이 자신에게 개인적인 관심을 갖는 일 자체가 드물 테니까.
하지만 유지한은 정확히 그를 향해서 말했다.
“나 알아요?”
“모르겠습니다.”
“진짜 몰라요?”
“모, 모릅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몰라도 괜찮습니다.”
“아, 네.”
“그리고 기왕이면 평생 몰랐으면 좋겠는데.”
“네? 그게 무슨…….”
퍼어억!!
유지한은 남자의 아래턱에 아주 화끈한 어퍼컷을 꽂아 넣었다.
앞니를 포함하여 이빨이 한 번에 5개나 부러져 버릴 정도로 강력한 공격이었다.
곧바로 기절해 버린 그를 보며 다른 시민들은 화들짝 놀랐다.
“우와아악—!”
“영웅이 사람을 팬다!”
소란이 벌어지자 박재경이 유지한에게 달려왔다.
그녀는 쓰러진 남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건 대체 무슨 일이죠?”
“제가 이 남자를 팼습니다.”
“……왜요?”
“왜긴요.”
이세계인.
한 놈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