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터널 (2)
영웅들에 의해 팔다리가 꽁꽁 묶인 본부장이 소리 질렀다.
“빨리 이거 풀지 못해?! 풀라고!”
“가만히 계세요. 움직이면 더 아플 테니까.”
“너, 너 이 자식……!”
속박을 풀기는 커녕 더 단단하게 묶는 영웅들의 행동에 본부장은 이를 악물었다.
이내 그가 양지철을 바라보며 말했다.
“양지철! 너 내가 누군지 몰라?”
“설마 모르고 왔겠습니까?”
“네가 차관님과의 연줄이 생겼다는 건 들었다. 하지만 나한테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 있습니다.”
촤락!
양지철은 손에 들고 있던 문서를 펼쳤다.
영웅부 차관과 요양 중인 영웅부 장관의 직인이 동시에 찍혀있는 문서였다.
그 내용은 양지철에게 임원 전체를 포함한 영웅부 내부 조사 권한을 부여하겠다는 것.
“특별 지시 사항입니다.”
“네가 그걸 대체 어떻게…….”
“제가 일을 좀 열심히 했죠.”
서기관급 공무원에게 부여되는 권한치고는 너무나도 강력한 권한.
빠져나갈 구멍이 사라져 버린 본부장은 애타게 말했다.
“다, 다들 조금 더 냉정하게 생각해! 지금 나한테 질문한 게 누구야? 이종족! 이종족이잖아!”
“…….”
“지금 저년이 한 말을 100% 믿는 거야? 인간도 아닌 이종족이 말하는 걸 믿는 거냐고!”
이종족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는 발언이었다.
하기야 지금 같은 위기 상황이 아니었다면 사람들이 이종족의 능력을 활용한 사상 검증에 동의할 리가 없었다.
영웅부 내부에도 내심 이종족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그에 몹시 불쾌해진 니로치가 말했다.
“요즘은 쓰레기가 말도 하네.”
“이 시건방진 년이!”
“그 시건방진 년한테 한번 맞아 볼래?”
“큭!”
본부장은 천천히 걸어오는 니로치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거기까지만 해라.”
“저 쓰레기가 자꾸 꼴 받게 하잖아.”
“……그런 표현은 대체 어디서 배운 거지?”
니로치의 보호자로 따라온 카지미르가 그녀를 만류하는 가운데.
양지철이 영웅들에게 말했다.
“그 사람 주머니 속 물건은 그게 전부인가요?”
“네.”
“그만 데리고 나가 주세요.”
“크아악! 이거 놔!!”
스파이로 들통 난 본부장이 밖으로 끌려나간 뒤.
자리에 남은 인원은 사무실의 물건을 조사했다.
양지철은 본부장의 주머니에서 나온 가죽 지갑을 뒤적거렸다.
지갑 속에는 돈과 명함, 주민등록증 따위의 잡다한 물건이 들어 있었다.
“……?”
그런데 지갑을 요리조리 살펴보던 와중.
잘 보이지 않는 쪽에 작은 구멍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양지철은 그 구멍 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안에 있던 물건을 꺼냈다.
“허허.”
잠시 후 손가락에 잡혀 나온 물건은 IUPC의 회원증이었다.
그것도 평범한 회원증이 아니라 번쩍번쩍 빛이 나는 금색의 회원증.
너무나도 쉽게 증거를 찾아낸 그는 허무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코를 킁킁거리던 카지미르가 말했다.
“그게 뭐지?”
“IUPC의 회원 중에서도 골드 이상의 회원임을 증명하는 회원증입니다.”
“거기서 약하게 피 냄새가 나는군.”
“그래? 잠깐 줘 봐.”
홱!
니로치는 양지철의 손에 들린 회원증을 뺏었다.
뒤이어 명함 크기인 회원증의 모든 것을 꼼꼼하게 살폈다.
“……!”
잠시 후 그녀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분위기가 달라진 걸 눈치챈 카지미르가 말했다.
“왜 그러지?”
“이거 그냥 종이가 아니라 마법 스크롤이야.”
“마법 스크롤이라면……. 특수한 종이에 마법식을 새겨 넣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었나?”
“그래. 저번에 오빠한테 말해 준 거.”
IUPC의 회원증이 그런 물건이었다니.
새로 접한 소식에 양지철이 다급하게 말했다.
“무슨 마법인지 알아볼 수 있겠어요?”
“괜히 기분이 나빠지는 걸 보니 정신 계열의 마법일 거야.”
“헉!”
“맨손으로 만지지 마. 평범한 사람이 이런 걸 들고 있다가는 정신이 오염되어 버릴걸.”
IUPC의 모든 회원들에게 회원증이 지급된다는 걸 알고 있는 양지철은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었다.
“등급마다 회원증의 색깔이 달라지는 거지?”
“네.”
“특정 등급 이상의 회원증만 이런 형식일 거야. 스크롤이 그리 넘쳐나지는 않을 테니까.”
“그, 그렇군요.”
“그러니까 지철 오빠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렇게 말씀하셔도 전혀 위안이 안 되는데요…….”
“어찌 됐건 스파이를 하나 찾았잖아? 이제 다른 임원들도 찾아가기만 하면 돼.”
한국에 비상사태가 발생한 건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이번 기회에 자신의 능력을 통해 영웅부 내에서 입지를 다질 수 있게 된 니로치는 붉은 혀를 날름거렸다.
*****
“잘 따라오세요.”
눈에 보이는 것과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의 위치가 서로 다른 공간.
터널의 벽으로 들어온 원정대는 유지한의 등을 따라 이동했다.
“거, 신기하네.”
“저 사람은 길을 대체 어떻게 찾는 거야?”
“정령이 도와줬대잖아.”
유지한이 꽉 막혀 있는 벽으로 달려가는 걸 보면 미친놈 같다 싶다가도.
정작 그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면 이제껏 지나온 곳과 비슷한 터널이 이어졌다.
모두가 신기해하는 와중에 유지한은 앞을 향해 거침없이 전진하기만 했다.
그의 뒤에 있는 김시후가 말했다.
“도로로 갔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요?”
“모르지. 더한 일이 생겼을지도.”
적들이 굳이 이런 터널에다 함정을 설치해 뒀다는 건.
영웅들이 지금과 비슷한 경로로 이동할 거라고 예측했던 것임이 틀림없었다.
산을 돌아서 가거나 뛰어넘었더라고 하더라도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았을 거라는 게 유지한의 생각이었다.
“레드홀도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수 있겠네요.”
“그게 마음에 좀 걸려.”
전주에서 헤어졌던 정기준은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을까.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슬슬 출구가 나올 때도 됐는데…….’
이동한 거리를 생각하면 출구가 보일 때도 된 것 같지만.
아직도 환각이 시야를 가리는 탓에 어디까지 온 것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이쯤에서 디스펠을 사용하는 게 좋겠습니다.”
“마법사들은 앞으로 나와 주세요!”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들이 앞쪽으로 나왔다.
그런데…….
“어, 씨! 이거 간단하지가 않은데요?”
“잠시만요. 계산 좀 할게요.”
열차에 걸려 있던 마법보다 파훼하기가 훨씬 더 복잡한 듯.
마법사들은 머리를 부여잡거나 지팡이를 흔들어 대며 생각에 빠졌다.
그중에는 박재경이 명령을 내리기 전부터 디스펠을 시도하던 사람도 있었다.
파앙!
그때 가장 먼저 디스펠에 성공한 마법사가 있었다.
모든 마법사들의 시선이 마력을 뿜어낸 쪽으로 향했다.
유지한 파티의 김시후였다.
“언제부터 준비하고 있던 거예요?”
“박재경 씨가 앞으로 나오라고 할 때부터요.”
“……!”
마법사들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고작 1분도 안 되는 시간에 이 복잡한 마법을 깨뜨렸다니.
“마력을 되게 잘 다루시네.”
“그런 소리 종종 듣습니다.”
자신감 넘치는 대답에도 불구하고 마법사들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등급을 벗어나서 그를 인정해 주는 분위기였다.
근처에 있던 딱 한 명의 마법사만 빼고.
“여기는 제가 처리할게요.”
김시후는 유지한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디스펠을 흩뿌렸다.
그러자 환각이 조금씩 걷히며 마침내 출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있다!”
“……응?”
그런데 어째서일까.
상행과 하행 열차 2대만이 오고 갈 수 있는 이 터널에.
출구에서부터 2대의 열차가 영웅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누군가가 다급하게 외쳤다.
“다른 열차 운행은 전부 중단된 거 아니었어요?!”
“중단된 게 맞아요!”
“그럼 저건 뭐야!”
서로 나란히 달려오는 2대의 마력부상열차.
열차와 터널의 벽 사이에는 사람이 서 있어도 괜찮을 정도로 여유 공간이 있었지만.
문제는 다가오는 열차의 외벽 전체에 식물의 것처럼 보이는 가시와 동물의 것처럼 보이는 발톱들이 빽빽하게 부착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카가가가각!
터널의 벽을 깎아내면서도 형체가 멀쩡한 가시와 발톱이었다.
강도만 따져 보자면 철보다 훨씬 단단한 정도일까.
피융!
어느 궁수가 쏘아 낸 마력 화살이 고속 열차의 앞 유리를 때렸다.
하지만 운전실 안에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다.
쾅! 쾅! 쾅! 쾅!
마법사들이 황급히 열차의 앞을 막아서는 마법들을 사용했으나.
마력으로 보호되는 열차를 멈춰 세우기에는 부족했다.
“열차를 부숴 버리죠!”
“안 돼! 잘못하면 이 터널이 무너진다고!”
“제기랄! 다들 벽으로 붙어요!”
열차의 속도를 뛰어넘어 뒤로 물러나기에는 이미 늦었다.
영웅들은 무기를 꺼내 들고 벽에 몸을 바짝 붙였다.
화르륵!
화르르륵!
각양각색의 불마법이 생성되어 달려오는 열차를 뒤덮었다.
뒤이어 궁수를 포함한 원거리 딜러들이 앞으로 공격을 쏟아 냈다.
“모든 딜러들은 가시를 최대한 잘라 내고, 탱커들은 주변 사람들을 지켜요! 지원팀은 최대한 뒤쪽으로!”
“부길드장님도 뒤로 오세요!”
“그럴 수 없습니다!”
점점 가까워지는 열차를 두고 고성이 오가던 그때였다.
“잠깐 실례.”
“……?!”
유지한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세계수의 축복]
열차를 향해 날아가는 그를 보며 박재경이 경악했지만.
원정대와 거리를 벌린 유지한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침착했다.
곧 무수히 많은 가시로 뒤덮인 열차가 그의 바로 옆에 도달했다.
촥!
실프의 오러가 실린 검으로 가시를 잘라 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단지 그 수가 조금 많을 뿐.
촤좌좌좌작!
촤좌좌좌좌작—!
유지한은 특유의 반응 속도를 최대한으로 끌어내며 검을 쉴 새 없이 휘둘렀다.
그를 스쳐 지나가는 열차에 달린 가시들이 우수수 잘려나갔다.
“흡!”
유지한의 검이 주로 잘라 내는 건 가시처럼 생긴 동물의 발톱들.
뒤에서 감당하기가 힘든 것만을 최우선으로 공격했다.
잔가시들을 그냥 무시해 버리는 탓에 팔다리에 상처가 늘어났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저거 미친 거 아니야?!”
“지원팀은 다들 엎드려요!”
일렬로 서 있는 영웅들은 옆으로 지나가는 열차에 남은 가시들을 잘라 냈다.
유지한이 원정대와 거리를 충분히 벌려 두었기에 뒤에서 마법이나 원거리 공격을 쏘아 내는 것도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열차가 영웅들을 지나쳐 갔다.
“살았다.”
“허어어…….”
벽 쪽에 붙어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지원팀이 모두 고개를 들었다.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진 가시들이 그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홀로 앞으로 튀어나갔던 유지한은 뒤로 합류했다.
“힐러!”
힐러들은 앞으로 달려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유지한을 치료했다.
박재경은 치료받는 그를 크게 나무랐다.
“제발 무모한 짓 좀 그만하면 안 돼요?!”
“전혀 무모하지 않았습니다.”
“……!!”
땅에 앉아 있던 유지한은 담담한 눈으로 박재경을 올려다봤다.
“치료도 이쯤이면 됐습니다. 다른 열차라도 오기 전에 여길 빠져나가죠.”
“당신 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유지한입니다.”
“아니, 그건 나도 알고 있어요!”
어이가 없어진 박재경은 그의 파티원들을 돌아봤다.
김시후와 민유리 또한 크게 걱정하는 표정으로 유지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유지한을 크게 나무라거나 야단치지는 않았다.
그만큼 파티장의 결정을 존중하는 것이었다.
‘진짜 특이한 파티야.’
파티장에 대한 믿음이 확고한 파티.
박재경은 돌발 행동을 보여 주는 그들이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