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소몰이
“호열 씨. 좀 어떠세요?”
“여긴 정말 훌륭한 분들이 많네요!”
김시후의 물음에 지원팀에 맡겨졌었던 남호열은 살짝 상기된 얼굴로 답했다.
선발대로 출발한 지원팀에 장비를 제작하는 대장장이는 그를 포함하여 약 11명.
모두가 남호열보다 몇 년 이상의 경력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이들과 장비 제작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것은 그에게 적지 않은 도움이 되고 있었다.
“여러 노하우도 알려 주시고, 새롭게 발견된 소재들에 대한 정보도 듣고. 몇 시간 만에 도움 되는 정보를 많이 얻었어요.”
“그거 잘됐네요.”
“주사위와 레드홀의 대장장이분들은 주기마다 한 번씩 모임도 한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원한다면 몇 주 뒤의 모임에 저도 초대를 해 주신다고 해서 참여해 볼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얼마든지요. 휴가는 언제든 사용하셔도 돼요.”
“감사합니다!”
유지한은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는 남호열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를 이번 원정에 데려온 것은 올바른 판단이었던 것 같았다.
“거래가 예정된 물건입니다. 절대로 깨뜨리지 말아 주세요.”
“맡겨만 두세요.”
유지한이 찾아낸 무정란 앞에 서 있는 박재경은 그것들을 자신의 길드원에게 맡겼다.
이번 원정이 끝날 때까지는 근처에 있는 주사위의 창고에 보관해 둘 셈이었다.
구조해낸 민간인들도 창고 근처에서 보호하는 방향으로 결정되었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박재경은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화면에는 여전히 신호가 닿지 않는다는 표시가 떠올라 있었다.
그때 때마침 전주역으로 보냈던 인원들이 돌아왔다.
“부길드장님! 전주역에 다녀왔습니다.”
“어떻던가요?”
“중요한 내용만 간추리자면, 기관사 한 분과 역에 대기 중인 마력부상열차가 있었습니다.”
“기관사와 열차가 있었다고요?”
“네. 운전실에서 불이 들어오는 것도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전주역 내에는 숨어 있는 기관사와 출발하지 않고 대기 중인 열차가 있었다.
창문을 통해 들여다본 운전실에는 당장이라도 출발할 수 있을 것처럼 불빛도 들어왔다.
당장이라도 열차를 타고 출발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기관사분은 같이 오지 않으신 거예요?”
“그게……. 불안 증세가 심한 분이셨습니다. 몬스터 때문에 역 밖으로 나오시는 걸 극도로 꺼리시더군요.”
“열차 운전이 가능하긴 한 건가요?”
“열차에 타는 건 괜찮으시다고 합니다.”
“…….”
기관사와 운행이 가능한 열차가 있다는 소식에 박재경은 고민에 빠졌다.
“부길드장님! 먼저 간 레드홀과 합류하셔야죠!”
“연락이 닿지 않으니 최대한 빠르게 가시죠.”
“어쩌면 저희가 정기준 님보다 먼저 도착할 수도 있어요.”
몇몇 영웅들이 박재경의 결정을 부추기는 가운데.
유지한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말했다.
“열차는 타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네?”
“차라리 선로를 따라 이동하죠. 지원팀은 여유가 되는 분들이 업고 가고요.”
“흠…….”
“또 공간 왜곡에 빠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유지한은 열차에 타서 이동하는 도중에 다시금 공간 왜곡에 빠지는 걸 걱정했다.
주변의 영웅들은 그에게 반발하듯 말했다.
“그러면 도착 시각이 몇 배는 느려질 겁니다! 아무리 빨라도 해가 다 저문 뒤에나 도착할 거라고요.”
“오늘 출발해서 내일 도착하게 되더라도 최대한 안전하게 가는 편이 맞습니다.”
“열차에서 공간 왜곡을 감지하면 되잖아요.”
“마법을 감지한 뒤에 고속 열차가 멈추는 건 너무 늦습니다.”
“아니, 이봐요! 난 2급 영웅이에요! 그깟 마법 하나 찾아내지 못할 것 같아요?”
“외람된 말씀이지만 못하실 것 같습니다.”
“……!”
유지한의 확답에 어느 여자 마법사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자신을 무시하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유지한은 그런 반응에 개의치 않으며 말을 이어갔다.
“몇몇 분들은 알고 계시겠지만, 첫 번째 열차에서 환각 및 정신 마법을 가장 먼저 깨달은 건 접니다.”
“그건……!”
“제가 아니었다면 선발대는 아직도 열차에 있지 않았을까요?”
“큿!”
여러 반발에도 불구하고 유지한은 끝까지 자신의 의견을 관철했다.
“지한 씨말대로 하죠. 지금은 안전을 최우선으로 두는 게 맞습니다.”
끝내 박재경은 유지한의 편에 섰다.
뒤이어 곱지 않은 시선들이 유지한을 향했다.
하지만 정작 그는 아주 여유로운 태도를 보였다.
무의식중에 샘플링이 발동된 덕분이었다.
‘이쪽이 정답이야.’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상대가 3급이든, 2급이든, 아니면 김현태처럼 아주 잘 나가는 영웅 일지더라도.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일에는 쉽게 물러서지 않는 그였다.
“열차의 선로와 도로를 따라가되 경사가 높지 않은 평지는 가로지르는 것으로 하죠.”
“여긴 주택들이 밀집된 지역입니다. 얼마든지 가로질러 갈 수 있어요.”
“지원팀이 뒤에서 따라오는 것도 생각을 해야…….”
열차에 타지 않고 이동하자는 의견에 따라 지도를 제법 볼 줄 아는 영웅들은 서로 머리를 맞댔다.
그 결과 중간중간 열차의 선로와 도로를 벗어나는 것으로 대략적인 이동 경로가 완성되었다.
“다시 출발하겠습니다.”
“네!”
박재경은 주변에서 쉬고 있던 영웅들을 모두 일으켜 세웠다.
여유가 남는 영웅들과 테이머의 펫들은 지원팀을 한 명씩 업었다.
그중에서 남호열의 자리는 칠라의 등이었다.
칠라의 보송보송한 털에 몸을 맡긴 그가 말했다.
“한 번 더 부탁할게.”
“찍찍!”
자기만 믿으라는 듯 짧은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는 칠라였다.
*****
“1분마다 주변 탐색 부탁드립니다.”
“저부터 할게요.”
모두가 선로 위쪽으로 돌아온 뒤.
각 파티의 마법사들은 다시금 공간 왜곡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서로 번갈아 가며 앞쪽을 탐색하기로 했다.
그리고 원정대가 선로를 따라 이동을 시작한 지 30분쯤 지났을까.
그 결정은 아주 탁월한 결정이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앗! 앞에 왜곡된 공간이 있습니다!”
“다들 정지!”
박재경이 지시하자 모든 영웅들이 자리에 멈춰 섰다.
뒤이어 마법사들이 앞쪽을 향해 마력을 퍼뜨렸다.
“진짜로 있었군요.”
“역시 하나가 아니었구나.”
“아직 입구가 닫혀 있는 것 같습니다!”
열리지 않은 왜곡된 공간의 입구.
마법사들은 힘을 합쳐 그것을 파괴했다.
“크흠! 뭐가 있긴 있었네요.”
기차에 타자고 주장했었던 여자 마법사는 유지한을 힐끔거리며 헛기침을 했다.
입구를 완전히 파괴한 뒤에는 원정대의 이동이 재개되었다.
그때 유지한은 선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너무 조용하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누군가 땅속에 무언가를 심어 놓은 밭이 보이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초록색 나무로 뒤덮인 이름 모를 산이 보였다.
번잡한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시골의 한적함.
이상한 건 풀냄새가 가득한 구역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흔한 벌레의 울음소리,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그게 잠깐이라면 이해를 하겠지만, 정적이 20분도 넘게 이어지고 있어 유지한은 의문을 느꼈다.
“여기서 쉬었다가 출발하죠.”
전주부터 쉬지 않고 달려온 원정대의 위치는 어느덧 임실.
지원팀을 업고 달리는 사람들과 펫들의 상태를 살피던 박재경은 휴식을 선언했다.
“흠.”
바로 자리에 앉아 버리는 사람들과 달리.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유지한은 근처에 있는 한 카페를 향해 걸어갔다.
땅바닥에 앉아 있던 김시후는 그를 보며 말했다.
“형! 어디 가세요?”
“먹을 것 좀 찾으러. 칠라 너도 따라와.”
“찍!”
쾅!
잠겨 있는 카페의 문을 부숴 버린 뒤 안쪽의 창고로 입장했다.
창고에는 뜯지 않은 생수와 초콜릿 등 가게에 필요한 재료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유지한과 칠라는 물건 중 일부를 꺼내 들고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민유리는 그가 짊어진 것들을 보며 말했다.
“이건 뭐예요?”
“계속 움직이려면 뭐라도 먹어 둬야죠. 받으세요.”
“앗, 감사합니다.”
“요금은 나중에 영웅부에 청구하라고 하고, 여러분도 하나씩 가져가세요!”
열량이 높은 초콜릿과 치즈 따위의 간식들.
유지한은 그것들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서포터로서 다른 파티원들을 챙길 때의 습관이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치즈 맛이 좋네.”
“임실 치즈가 맛있다잖아.”
그렇게 사람들이 잠깐의 휴식을 즐기던 때였다.
두두두두…….
뜬금없이 땅이 약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손에 든 간식들을 입으로 집어넣던 모두가 행동을 멈췄다.
두두두두두!
지면에서 느껴지던 진동의 세기는 점점 커졌다.
유지한은 문득 커다란 돌이 굴러오던 던전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다만 지금 느껴지는 건 그때의 것과 사뭇 달랐다.
우웅!
그때 실프가 임실역의 정문으로 이동했다.
물의 정령 아쿠아와 몇몇 펫들 또한 실프의 뒤를 따랐다.
‘저쪽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영웅들은 정령들을 따라 역 안으로 입장했다.
그리고 열차가 지나다니는 선로를 넘어 맞은 편의 길가로 빠져나왔을 때.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음머어!”
“음머어어어—!”
“음메에에!”
몸에 하얗고 검은 얼룩이 존재하는 젖소들.
턱에 수염이 나 있는 염소들.
몬스터로 변해 버린 두 무리가 합쳐진 소떼가 흥분한 채 임실역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쾅! 콰과광!
콰과과과과광—!
마릿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끝없이 이어지는 젖소들.
덩치는 2마리가 나란히 달리는 것만으로 폭이 넓은 길을 꽉 채워 버릴 만큼 컸다.
크기 탓에 길 밖으로 밀려난 녀석들은 전봇대나 건물을 터프하게 들이받으며 앞으로 돌진해 왔다.
‘사람이 꽂혀 있어.’
목장에서 자신들을 사육한 인간들에게 증오를 드러내는 것일까.
유지한은 소의 커다란 뿔에 사람들의 몸이 꽂혀 있는 걸 발견했다.
그중에는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무슨 전차가 몰려오는 것 같네!”
“헛소리들 말고 빨리 자리 잡아요!!”
처음 보는 몬스터에 당황한 모두가 황급히 진형을 갖추던 그때.
냉정하게 상황을 살피던 유지한은 역 근처에 펼쳐져 있던 대형 천막을 주시했다.
황급히 그쪽으로 달려간 그가 천막에서 프레임을 걷어내고 붉은 천을 손으로 뜯어냈다.
그 광경을 본 박재경은 눈을 크게 떴다.
“뭐 하는 거예요?”
“제가 소들을 밭으로 유인하겠습니다.”
“네?!”
저렇게 많은 소들을 정면에서 상대하다가는 난투가 벌어진다.
이 주변 어딘가에는 전주처럼 아직 대피하지 못한 시민들이 가슴을 졸이고 있을 터.
그들을 위해서라도 흥분한 몬스터들은 한곳에 묶어 두는 편이 안전했다.
“그걸 왜 유지한 씨가 해요!”
“기동력 하나만큼은 여기서 가장 좋으니까요.”
차마 부정할 수 없는 대답에 박재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뒤이어 유지한이 그녀를 안심시키고자 말했다.
“예전에 몬불(MonBull)에게 비슷한 걸 해본 적이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뭐라고요?”
“아.”
몬불은 2급 몬스터로 변해 버린 황소를 가리키는 단어.
저도 모르게 김현태 파티에서의 일을 언급한 유지한은 흠칫했지만.
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척 다른 곳을 바라봤다.
“잠깐 그 친구 좀 빌려주세요!”
“짹짹?”
커다란 참새가 유지한의 어깨를 붙잡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높이가 적당히 올라간 뒤, 유지한은 손에 쥐고 있던 천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음머!”
“음머어어!”
“음머어어어——!”
잔뜩 흥분한 소들이 갑자기 등장한 새빨간 물체를 보고 울부짖었다.
유지한은 그런 녀석들을 더 크게 흥분시키고자 손에 쥔 붉은 천을 펄럭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