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사고 (3)
유지한 파티가 전력 질주로 이동하기 시작한 지 15분째.
허공에서 꼬물거리는 실은 계속 앞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유리 씨!”
“네!”
중간에 마주치는 괴아지풀에게는 민유리가 마력 화살을 쏘아냈다.
[형태 변화 - 큐브]
화살은 날아가던 도중에 정육면체의 형상으로 변하여 괴아지풀의 머리를 감쌌다.
단순하게 얇은 면을 만드는 단계에서 어느덧 입체적인 형상을 구현할 수 있게 된 그녀였다.
“계속 이동하겠습니다.”
유지한 파티는 몬스터를 사냥하지 않고 잠시 자리에 묶어 두기만 했다.
당장의 체력과 마력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일행 중 가장 마력이 많은 민유리만 공격에 나서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호열 씨, 불편하진 않으세요?”
“아뇨! 전혀요.”
“찍찍!”
“저 혼자 업혀 가서 죄송합니다…….”
칠라는 남호열을 등에 업고서 달리고 있었다.
녀석이 짊어진 방패 위에서 털을 잡고 납작하게 드러누운 남호열은 뛰어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옆에서 함께 달리던 민유리가 말했다.
“정말 끝이 안 보이네요.”
“이 많은 괴아지풀은 다 어떻게 가져다 놓은 건지…….”
천장이 막혀있지 않은 넓은 하늘과 발을 디딜 수 있는 초원이 동시에 구성된 공간.
땅에 보이는 건 초록색 풀뿐으로 어찌 보면 무성의할 정도였으나 그 넓이는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민유리가 시력 및 동체 시력이 상승하는 [이글 아이]를 계속 사용 중임에도 초원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부웅!
김시후가 휘두른 지팡이의 궤적을 따라 마력이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 나갔다.
처음에는 파랗게 보일 정도로 짙은 마력이었지만, 김시후와 그 부채꼴 마력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색은 점점 옅어져 갔다.
마력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투명해진 뒤 김시후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역시 이상해요.”
“뭐가?”
“지금 저희가 서 있는 땅과 거의 같은 형태의 지형이 이어지는 것 같아요.”
김시후가 의문을 느끼는 건 앞으로 계속 이동해도 이상할 정도로 똑같은 지형이 반복된다는 것이었다.
마치 열차에서 창문으로 같은 풍경이 반복되던 것처럼 말이다.
“바닥의 굴곡 같은 것도 거의 동일해요. 저희가 밟고 지나간 발자국만 없을 뿐이지.”
“왜곡된 공간 자체에도 마법이 걸려 있는 건가.”
“그럴 지도요. 아무래도 이세계인들은 정신과 공간 계열의 마법을 잘 다루는 것 같아요.”
유지한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세계인들이 윤도하와 백강천을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어딘가로 강제 이동시키는 것을 직접 눈으로 봤을 때부터 그런 의심을 품고 있었다.
이런 규모의 마법을 구현할 걸 보면 거의 확실한 정보가 분명했다.
“공간 왜곡을 전문으로 활동하는 마법사들이 이세계인일 가능성도 있겠어.”
“그렇네요.”
“어? 그러면 승급 시험 때 그 돌덩이도…….”
“……!”
민유리는 던전에서 마주쳤던 커다란 돌덩이를 언급했다.
영웅부에서도 설계 미스라고 인정하고 보상금까지 지급했던 그 함정이 이세계인들의 작품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쓰읍, 그거 꽤 말이 되는데요?”
김시후가 그렇게 의심하는 순간이었다.
파방!
어디선가 폭죽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소리가 들려온 방향에서 불그스름한 빛의 기둥이 하늘 높게 솟아올랐다.
유지한 파티는 그 기둥을 올려다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건…….”
“누가 그 신호탄을 사용했나 봐요.”
유지한은 빛의 기둥과 허공에 떠 있는 실을 번갈아 바라봤다.
샘플링을 통해 그의 눈에만 보여지는 경로는 기둥이 솟아오른 곳과 완전히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출구가 있는 방향은 이쪽인데?’
저 기둥이 보이는 곳으로 가더라도 출구는 없을 터.
그와 달리 실을 조금만 더 따라가면 출구가 나올 것이었다.
막연한 추측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었다.
“일단 가보자.”
유지한 파티는 이내 누군가가 신호탄을 쏘아 올린 방향으로 달렸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도착한 장소에 출구는 없었다.
그 대신 한 남자가 몰려드는 사람들을 향해서 허리를 연신 숙여 대고 있었다.
“여러분 정말정말 죄송합니다!”
“…….”
“아, 진짜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레드홀에서 지급한 것이 처음 보는 형태의 아티팩트이다 보니 누군가가 실수로 사용해 버린 모양이었다.
그 실수로 인해 여기저기로 흩어졌던 영웅들이 하나둘 자리에 모여들었다.
“죄송합니다, 부길드장님…….”
“사과는 됐습니다.”
실수를 저지른 영웅은 주사위의 길드원이었다.
머리가 조금 아픈 듯 손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러대던 박재경은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기왕 모인 김에 각 파티장들은 짧게 상황보고 부탁드립니다. 뭐든 말할 게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이지연 파티, 특별하게 발견한 건 없습니다.”
“동수철 파티, 이하 동문입니다.”
“정영욱 파티, 이하 동문…….”
각 파티의 리더를 중심으로 짧은 상황보고가 이뤄졌다.
하지만 이 장소에서 무언가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보고가 반복될 뿐이었다.
“주변 탐색에 적어도 1, 2시간 이상은 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왜곡된 공간에서 날씨가 변하기도 하나요?”
“해가 지면 출구를 찾기 힘들 것 같은데…….”
“여기서 대체 얼마나 더 있어야 하는 건지.”
대다수의 영웅들이 보고를 마치고 한숨을 내쉬는 찰나.
들려오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유지한이 말했다.
“유지한 파티, 출구를 찾은 것 같습니다.”
“네?!”
“뭐라고요?”
“……!”
자리의 모든 영웅들이 유지한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의 바로 옆에 있던 파티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원정대를 이끄는 사람 중 하나인 정기준은 황급히 그의 앞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출구를 찾았다고요?”
“정확히 말하자면 출구에 거의 근접했던 것 같습니다.”
“정말 확실한 정보입니까?”
“직접 눈으로 본 것이 아니기에 ‘확실’까지는 모르겠지만, ‘확신’은 하고 있습니다.”
출구를 완전히 찾아냈다는 건 아니라는 말.
정기준은 잠시 유지한의 눈을 바라봤다.
작은 흔들림도 없이 아주 차분한 유지한의 눈동자.
한국 최고의 영웅 중 하나와 정면으로 마주하면서도 딱히 긴장하는 기색은 없었다.
‘나쁘지 않군.’
첫 전투에서부터 드러났던 그의 태도는 정기준으로 하여금 신뢰감을 불러일으켰다.
뒤이어 박재경이 그에게 물었다.
“출구에 도착하기까지 예상 시간은요?”
“힘껏 달려간다면 대략 25분 정도입니다.”
“그럼 모두 유지한 파티를 따라갑시다. 30분 후에도 출구를 찾지 못하면 다시 흩어지겠습니다.”
“여유 있는 분들은 지원팀 한 명씩 업어주세요!”
모두의 동의를 얻어낸 박재경은 유지한 파티를 가장 앞으로 세웠다.
유지한은 곧 그들을 이끌고서 앞으로 달려나갔다.
옆에서 김시후가 조용하게 말했다.
“진짜로 찾았어요?”
“따라와 봐. 아까는 나만 믿는다며.”
“아니, 못 찾으면 분위기 진짜 싸해질 거 같아서 말이죠…….”
김시후는 뒤쪽을 힐끔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세간의 주목을 받는 처지라 그들을 주시하는 영웅들이 많았다.
여기서 실수라도 했다가는 어떤 반응이 나올지 뻔했다.
‘여기다.’
중간에 멈춰섰던 지역을 더 넘어갔을 무렵.
마침내 유지한은 빛의 실이 끊어지는 지점에 도착했다.
허공에 떠 있던 실은 제 목적을 다 한 듯 스르르 사라져 버렸다.
“도착했습니다.”
“도착이라고요?”
“여기가 출구라고요?”
“예. 분명히 이 근처에 출구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몇 분째 이동했던 푸른 초원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장소.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출구는커녕 벽이나 건물조차 하나 없이 휑했다.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정령사라고 해서 기대했더니…….’
‘시간 낭비였군.’
말로 표현하지만 않을 뿐이지 유지한을 향한 실망이 이어지는 가운데.
유지한은 그런 반응을 신경조차 쓰지 않고 주변을 살펴보기에 바빴다.
그런데 그때였다.
“찍! 찍찍찍!”
“어어? 여기 뭐가 있습니다!”
칠라의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녀석의 등에 업힌 남호열이 주변에 신호를 보냈다.
바로 근처에 있던 박재경이 그쪽으로 달려갔다.
“찍!”
네 발로 땅을 짚은 칠라는 손으로 바닥을 두들겼다.
쿵! 쿵! 쿵!
흙 땅을 두들기는 것으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소리.
칠라가 자리를 비키자 박재경은 검을 휘둘러서 땅을 뒤덮은 기다란 잡초들을 잘라냈다.
“오!”
“저건…….”
“문이다!”
잡초가 베여 나간 땅에서는 지하실로 이어지는 듯한 초록색 문이 등장했다.
문 전체가 위장색인 것처럼 땅의 잡초와 똑같은 색으로 칠해진 덕분에 가까운 거리에서 들여다보지 않는 한 구분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잘했어, 칠라!”
“찍찍!”
민유리는 우쭐거리는 칠라의 옆구리를 쓰다듬었다.
그사이 다른 사람들은 무거운 문을 열어 재꼈다.
“밖으로 이어지는 출구가 맞습니다.”
“유지한 씨 말이 맞았네요!”
“하지만 대체 어떻게…….”
문 근처로 몰려든 영웅들은 의문이 담긴 시선으로 유지한을 바라봤다.
그러자 유지한은 아주 자연스럽게 실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수고했어, 실프.”
우웅?
뜬금없는 칭찬에 초록빛을 반짝이며 의문을 드러내는 실프였지만.
그 모습은 다른 사람들에게 실프가 출구를 안내해 준 것처럼 보였다.
“역시 정령의 힘은 대단하군요.”
“왜 정령사가 특별한 대우를 받는지 알 것 같습니다.”
“바람의 정령은 탐색에 뛰어난 걸까요?”
“아쿠아! 너는 저런 거 못 해?”
—못해! 쟤가 이상한 거야!
실프를 향한 칭찬과 부러움을 드러내는 영웅들.
현장에 있던 다른 정령들은 의사소통도 불가능한 실프와 비교되기도 했다.
“빨리 여기서 나갑시다.”
“이 안에 남겨진 열차는 어떡하죠?”
“마법사들이 밖에서 공간 왜곡을 파괴하면 열차는 원래대로 돌아올 겁니다.”
“그 열차는 다시 타고 싶지 않네요…….”
박재경을 비롯한 영웅들은 이곳에서 빠져나간 이후의 행동 방향을 논의했다.
그 대화에 끼어들지 않은 유지한은 실프를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편하구만.’
정령은 어떤 일이든 핑계로 삼기가 좋았다.
앞으로 샘플링을 사용하거든 거기서 발생하는 모든 공을 실프에게 돌려 버릴 셈이었다.
‘샘플링이 아주 큰 도움이 되고 있어.’
영웅들이 실종되자 실종되기 전의 상황을 보여 주고.
수백 명의 영웅이 속아 넘어간 환각을 깨뜨리고.
처음 보는 낯선 공간에서 탈출하는 출구를 안내했다.
서로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것들이지만.
그 모든 것이 그의 고유 스킬에서 비롯되었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니로치는 이게 세상의 모든 진실과 연결된 능력이라고 했지.’
무언가가 필요한 상황마다 샘플링은 필요한 도움을 제공했다.
그걸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니로치의 거창한 설명도 전혀 과장된 게 아니리라.
‘평생 모르고 살 뻔했군.’
귀한 보물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자에게는 큰 의미가 없다.
하지만 만약 그 가치를 알아본다면…….
그 보물의 주인에게 어마어마한 이득을 안겨줄 것이었다.
*****
“젠장…….”
“…….”
벽에 걸린 한반도 지도를 두고 이세계인들은 경악했다.
공간 왜곡에 의해 지도에서 사라졌던 수많은 영웅 중.
적지 않은 수의 영웅이 다시 현실로 돌아온 덕분이었다.
“고작 하루조차 버티지 못했다고?”
“아무리 빨라도 4일은 갇혀 있어야 했어.”
“심지어 저긴 대장님께서 직접 검토하셨던 구역이잖아!”
한국의 주력 영웅들이 사라진 틈에 서울까지 치고 올라가려던 계획.
거기에 가장 방해가 될 1급 영웅들을 먼저 치워 버렸음에도.
일이 쉽게 풀리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그만큼 공을 들인 마법이 고작 몇 시간 만에 깨질 줄은…….”
“한국에 쓸만한 영웅들이 더 남아 있는 모양이지.”
“우리가 저들을 너무 얕잡아봤다.”
“그만! 이 이상 분위기 처지게 하지 마.”
“대장님이 회복 중이니까 우리까지 흔들리면 안 돼.”
공간 왜곡 마법이 파괴된 것으로 발생한 소란이 줄어들고.
그들은 다음 계획에 대한 논의를 이어 갔다.
아직 한국을 장악하기 위해 사용할 카드는 많았다.
“케인! 지금 왜곡에서 빠져나온 영웅들을 따로 강조해 줘.”
“표식을 바꾸겠습니다.”
지도 위에 반짝이는 동그란 점 중에서 일부가 별 모양으로 변했다.
주사위와 레드홀을 중심으로 구성된 영웅들이었다.
“저것들 절대로 놓치지 마. 어쩌면 가장 방해가 될 놈들이 저기에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