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소집령
장소를 옮긴 뒤, 유지한은 니로치에게 자신이 겪었던 신비한 현상에 대해서 설명했다.
묵묵히 그의 설명을 듣고 있던 니로치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요약하자면 다른 존재의 마력을 통해서 과거의 기억을 들여다본 거구나.”
“과거의 기억을 봤다라……. 그렇게 설명할 수 있구나.”
“그건 오빠가 가진 샘플링의 효과가 분명해. 달리 설명할 방법은 없어. 그런데 실프가 마석을 먹은 뒤에 그 현상이 벌어졌다는 건.”
니로치가 유지한의 머리 위에 있는 실프를 바라봤다.
“실프가 확실히 오빠의 힘을 알아보는 모양이야. 그걸 이용하는 방법까지도 알고 있는 것 같고. 역시 쟤가 오빠와 계약을 맺은 이유도 샘플링 덕분이겠네.”
몇 년씩이나 김시후의 지팡이에서 잠들어 있다가.
갑자기 밖으로 튀어나와 유지한과 계약을 맺은 실프.
그 계약의 이유를 샘플링으로 추측하는 니로치였다.
“최근에 확률을 알아본 적은 없지?”
“전혀 없어.”
“그 덕분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 같아. 하지만 겨우 이게 끝은 아닐 거야. 내가 조금이나마 들여다봤던 힘은 그것과는 많이 달랐거든.”
정확한 전제 조건은 알 수 없으나 마력을 통해 단편적인 과거의 기억을 볼 수 있다는 건 아주 놀라운 능력이다.
하지만 니로치가 고유 스킬을 통해 샘플링을 감정하던 순간.
그녀가 느꼈던 공포와 압도감을 설명하기에는 크게 모자랐다.
“아오, 답답해! 말로 설명해 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어! 하여간 앞으로도 고유 스킬에 변화가 생기면 나한테도 알려 줘. 꼭이야?”
“알았어.”
“……그나저나 한국이 엄청 시끄러워지겠어. 보아하니 오빠도 거기에 휘말린 것 같으니까 마음 단단히 먹어두는 게 좋을걸.”
*****
양지철은 영웅부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이번 사태에 대한 단서를 찾았다는 소식에 많은 관계자가 놀라는 분위기였다.
“정말로 믿을 수 있는 정보인가?”
“니로치를 통해서 모든 정보가 사실임을 확인했습니다.”
“난 그 이종족을 믿을 수가 없는데…….”
“그녀가 가진 능력에 대한 검증은 이미 철저하게 진행된 바 있습니다.”
“거짓말을 해서 한국에 혼란에 일으키려는 수작일지도 모르지.”
“…….”
나이든 임원의 말에 양지철은 마음속으로 참을 인(忍)을 그렸다.
철저한 사상 검증은 물론이고 능력 검증까지 끝난 인물을 두고서 음모론을 펼치다니.
저런 사고방식으로는 이종족뿐만 아니라 세상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을 터였다.
‘믿을 수 없는 건 이종족이 아니라 같은 인간이지.’
양지철은 머릿속 생각과는 달리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정보의 출처는 어디까지나 한국의 영웅인 유지한 씨에게서 나온 것임을 생각해 주십시오.”
“흠…….”
“한시라도 빨리 비상사태를 선포해야 합니다!”
“지철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해.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이미 1급 영웅들의 실종 이후 대응을 준비하고 있던 영웅부였지만.
유지한이 가져온 정보로 인해 그 대응안이 조금씩 변경되었다.
그렇게 몇 시간가량의 회의가 진행된 이 날 오후.
영웅부는 언론에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는 한편.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모든 길드에 협조 공문을 보냈다.
꿀잼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길드장인 김시후의 휴대폰에도 이번 사태에 협조를 바란다는 내용의 공문이 도착했다.
<……와 같은 이유로 영웅들을 소집하고자 하오니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부드러운 어조로 협조를 구하는 내용의 공문.
하지만 그걸 자세히 들여다보면 불시에 3급 이상의 영웅들을 불러 모으겠다는 강제성이 담긴 소집령임을 알 수 있었다.
한편, 속보로 올라오는 뉴스에는 이세계의 인간들이 언급되기도 했다.
[영웅부 “1급 영웅들의 실종은 이세계의 인간들 때문”]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결계 밖 몬스터의 출현 빈도가 급격히 상승…….]
다만 영웅부의 공식 발표가 나왔음에도.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영웅부가 책임 회피를 위해 이세계인을 핑계로 삼았다는 의견이 많았다.
아직은 다들 이세계인의 존재를 믿지 않는 분위기였다.
민유리는 살짝 굳은 얼굴로 말했다.
“전부 다 지한 씨가 말한 대로 흘러가네요.”
“저희도 곧 내려가야 합니다.”
1급 영웅들이 실종된 장소는 목포, 고흥, 여수 등 한반도에서도 주로 하단에 위치한 지역들.
그에 따라 영웅부는 그 근방에서 활동하는 영웅들에게 경계 강화를 요청했고, 동시에 수도권에 집중된 영웅들까지 아래로 내려보낼 예정이었다.
‘나는 발을 뺄 수가 없다.’
기본적인 치안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 만큼 모든 영웅들을 소집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 사태의 정황을 파악해낸 유지한만큼은 반드시 참여해야만 했다.
인원수가 적은 유지한 파티는 박재경과의 협의를 통해 주사위의 대열에 합류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길드에 대출이 있으면 소집된 기간 동안 이자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고 보상금도 주겠대요.”
“마냥 공짜로 부려먹지는 않겠다는 거지.”
3급 이상의 영웅들은 대체로 몸값이 비싼 편이다.
그런 이들을 반강제로 불러들이는 만큼 적당한 보상안도 마련되었다.
‘대피 권고도 나왔군.’
급격한 출산율 감소에 따라 인구 소멸 직전에 처할 정도로 사람이 줄어든 지역.
그 일대에 거주하는 시민들에게는 즉각 다른 지역으로 대피하라는 권고가 내려졌다.
“호열 씨께는 뭐라고 하죠?”
“주사위에서 이동식 간이 대장간을 빌려줄 수 있다니까 동행할 의사가 있는지 여쭤보기만 하자.”
한순간에 길드의 대표를 잃어버린 10대 길드를 중심으로 꾸려지는 원정대.
일이 생각보다 길어질 수 있는 만큼 대장장이를 비롯한 여러 지원팀도 동행하게 되어 있었다.
현재 사용 중인 장비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남호열인 만큼, 그가 따라와 준다면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소집일은 아직 안 잡힌 거죠?”
“아무리 늦어도 3일 내로 잡히겠지.”
“승급하자마자 이게 무슨 난리람.”
“찍찍…….”
“시간 날 때 가족들에게 미리 말씀들 해두세요.”
김시후는 곧장 아버지 김건오와의 통화를 위해서 사무실을 나섰다.
그를 따라 사무실 밖으로 나온 유지한은 고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고모. 저예요.”
—그래. 어쩐 일이냐.
가끔 나누는 메시지와는 달리 몇 달 만에 이뤄진 통화.
그럼에도 그의 고모는 상당히 쿨한 반응을 보였다.
“지방에서 몬스터가 나왔다는 소식 들으셨어요?”
—방금 들었다.
“그것 때문에 저도 내려가야 할 것 같아요.”
—나라를 위한 것이라면 응당 그래야지.
소수 정예 여군으로만 이뤄진 특수부대에서 활동했던 고모.
퇴역 군인인 그녀는 국가를 위한 영웅의 노고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훈련은 소홀히 하지 않았겠지?
“당연하죠.”
—잘 해라. 내가 널 직접 가르쳤던 보람이 있어야 할 거야.
“그건 걱정 마시고. 이번에 일 끝나면 한번 뵈러 갈게요.”
—됐다. 조만간 상황 봐서 내가 그쪽으로 가마.
*****
한국의 여러 길드에 소집령이 내려진 뒤.
현역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파티가 활동을 멈췄다.
그중에서도 2급 파티는 현장에서 눈에 띌 정도로 그 수가 줄어들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건 하늘이 주신 기회야.”
“마침내 우리도 1급으로 올라갈 때가 왔구나.”
“정말 긴 기다림이었다!”
그들은 이번에 발생한 사건을 두고 파티가 1급으로 올라갈 기회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영웅부에서 직접 소집령을 선포할 정도라면 부정할 수 없는 국가 위기급 재난.
오랫동안 등급 상승을 노렸으나 2급에서 정체하던 영웅들로서는 이런 예외적인 상황이 반갑기 그지없었다.
국가의 위기가 그들에게는 승급의 기회가 되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덕분에 영웅부로서는 새로운 고민이 생겨 버렸다.
“서울에 주소지를 둔 2급 파티 중 72% 이상이 소집에 응하겠다고 합니다.”
“경기도 용인 쪽 MA에 영웅들이 너무 부족하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이렇게나 적극적일 줄이야…….”
“이대로라면 지방으로 내려가는 영웅이 너무 많습니다.”
보상금이 주어진다고는 하지만 평소 버는 돈에 비교하면 턱없이 모자란 데도 아주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는 영웅들.
그에 수도권 치안에 공백이 생길 정도가 되자, 영웅부는 어쩔 수 없이 2급 파티 중에서도 소집할 영웅들을 따로 선발해야만 했다.
“이분들은 어쩌죠?”
“안 돼. 최근 1달간 활동이 뜸했던 파티잖아.”
“이분들은요?”
“거긴 파티장이 얼마 전에 음주운전으로 걸렸었지.”
영웅부는 기본적인 실력부터 자질구레한 평가 요소까지 모두 끌어다가 파티를 실시간으로 빠르게 선별했다.
선택받지 못한 파티에게는 미안하지만 모든 이들을 데려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특별한 평가를 받지 않고 프리패스로 선발되는 파티가 있었으니.
“문제없이 통과했군.”
케로즈의 사장실.
길드장 박중섭은 길드를 대표하는 영웅인 김현태를 자리에 불러다 놓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죠. 얼굴에 눈깔이란 게 달렸으면 우릴 거부할 리가 없어요.”
손님용 테이블 위에 꼬아놓은 다리를 올려놓은 김현태는 아주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들은 이번 일에 2급 파티가 몰리는 상황이 벌어지는 걸 예상했었기에.
친분이 있는 영웅부의 관계자를 통해서 미리 김현태 파티의 참가를 확정받은 상황이었다.
“네가 요청했던 대로 다른 2급 파티는 평소처럼 활동하기로 했다.”
“잘 하셨습니다. 거기서 주목받는 건 저희만으로 충분해요.”
김현태는 케로즈의 다른 2급 파티가 소집령에 응하지 못하게끔 했다.
같은 길드에서 동급의 파티가 여럿 나서는 것으로 이목을 분산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욕심이 반영된 요청이었지만, 박중섭을 그것을 받아들였다.
길드에서도 단 하나의 파티에만 집중하는 편이 맞다고 생각한 것이다.
“영화감독 섭외는 어떻게 됐어요?”
“재작년 영웅 영화 시상식에서 대상을 수상했던 감독이 맡기로 했다.”
“역시 길드장님! 영상에 저를 담아내려면 그 정도 급은 돼야죠.”
“촬영 계획에 관해서 논의를 나눠 봐야 하는데……. 현태야. 이번 기회에 찍어 보는 건 어떠냐?”
“마침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단순히 MA에서 몬스터를 사냥하는 장면을 촬영하는 게 아니라.
한국에서 발생한 위기를 극복하는 장면을 영화로 담아내는 것.
같은 생각을 한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잘하면 이번에 촬영하는 영화가 1급으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되어 줄 거다.”
“분명 그렇게 될 겁니다.”
김현태는 휴대폰을 위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입가에 조소를 머금었다.
‘이딴 쓰레기를 뛰어넘는 명작이 탄생할 테지.’
그 화면 속에는 유지한 파티에서 촬영한 영화의 정보가 띄워져 있었다.
*****
유지한 파티는 가벼운 훈련 도중 파티의 영화를 제작했었던 하성태의 연락을 받았다.
—실프가 출현한 쿠키 영상의 조회수가 생각보다 더 높았습니다!
“그거 다행이네요.”
유지한이 정령사임을 밝힌 이후, 하성태는 실프가 등장하는 미공개 영상을 뷰튜브에 풀어놓았다.
유지한 파티의 첫 영화였던 는 적당한 흥행 이후 점차 관심이 줄어들고 있던 상황이었지만.
정령이 출현한 영상 덕분에 하락세였던 영화의 조회수가 잠시나마 상승세로 바뀌기도 했다.
—영웅들에게 소집령이 떨어졌다고 들었습니다.
“저희도 참가할 예정입니다.”
—그럴 것 같아서 미리 연락드렸습니다.
하성태는 유지한 파티에게 이번 사태를 주제로 한 2번째 영화 촬영을 제안했다.
—사람들이 즐겨보는 영화이기 이전에 역사에 기록될 훌륭한 영상이 될 겁니다.
영화를 만들어서 수익을 창출한다는 목적보다는 한국의 역사에 기록될 만한 기록물을 만들자는 의견이었다.
하성태는 첫 작품부터 남다른 모습을 보여 준 유지한 파티에게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유지한은 영화 촬영에 기꺼이 동의했다.
취지도 나쁘지 않을뿐더러, 뭐든 처음이 어렵지 그 이후부터는 쉬워지는 법이었다.
“성태 씨.”
—네?
하성태와의 통화가 이어지는 가운데.
유지한은 추가로 선언했다.
“기왕이면 걸작 하나 만들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