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실종 (3)
—요호호! 처음 뵙겠습니다.
중절모를 착용한 남성이 윤도하와 백강천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들 사이에서 잠시 정적이 이어지는 가운데.
몸이 하늘에 떠 있던 유지한은 천천히 그들의 옆으로 내려앉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유지한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손의 형체가 얼추 보이기는 했지만, 반투명한 손을 뚫고 바닥이 비쳐 보였다.
손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 전체가 반투명했다.
‘침착, 침착하자.’
실종되었다고 알려진 두 사람이 바로 앞에 있고 몸은 투명해졌다.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는 이 상황에 유지한은 냉정함을 잃지 않기 위해서 마음을 다스렸다.
‘실프가 마석을 먹었고, 그다음에…….’
뜬금없이 무무의 마력이 담긴 마석을 먹어치운 실프.
지금 벌어진 일은 분명 그것 때문이리라.
실프의 계약자로서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내가 보이지 않는 모양이네.’
이 공간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유지한을 인식하지 못했다.
아예 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이건 샘플링을 사용하는 감각인데?’
샘플링을 통해 확률을 알아보는 짧은 순간에 전신에 맴도는 묘한 감각.
그걸 느끼는 유지한은 자신이 샘플링을 사용 중이라는 착각이 들었다.
‘……아니야. 착각이 아니다.’
마음속의 혼란을 잠재우던 그는 곧 깨닫고야 말았다.
자신이 지금 샘플링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과.
지금 보이는 장면들이 절대로 환각이나 거짓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이것은 언젠가 이 세상 어딘가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사건!
샘플링은 어째서인지 그것을 유지한에게 보여 주고 있었다.
‘실프는 이럴 걸 알고서 마석을 먹은 건가.’
유지한은 새로운 의문들을 품으면서도.
코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어쩌면 이곳에서 영웅들이 사라진 이유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너는……. 지구의 인간이 아니구나.
중절모를 쓴 남자를 보며 지구의 인간이 아니라고 말하는 백강천.
그에 놀란 유지한이 수상한 남자의 외견을 살폈다.
겉으로 보기에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
모자를 쓴 건 김시후처럼 무언가를 숨기기 위한 것이 아니고, 신체적인 차이로 특정될만한 종족은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저 남자가 지구가 아닌 다른 세계의 인간이라는 뜻인데.
‘IUPC는 이세계의 인간들과 접촉을 했던 건가.’
기존에 알고 있던 정보와 들려오는 내용을 조합하자 새로운 의심이 생겨났다.
곧 윤도하와 상대방과의 대화가 이어졌다.
—대체 우리를 어떻게 납치한 거야?
윤도하는 납치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중절모의 남자가 지금의 상황이 만들었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살고 싶으면 대답을 해야겠지. 아니면 너 혼자서 우리를 감당할 수 있겠어?
—당연히 감당 못하죠!
짝!
남자가 손뼉을 치자 같은 공간에 있던 윤도하와 백강천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이로써 자리에 남은 것은 수상한 남자와 유지한뿐.
그런데…….
—크으윽!
2명의 1급 영웅과 대화하면서도 여유가 넘치던 남자는.
갑자기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입술과 2개의 콧구멍, 심지어 귀에서도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슉! 슉! 슉!
—대장님!
—괜찮으십니까?!
—요호호……! 역시 지구의 인간들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서 모습을 드러낸 인간들은 서둘러 그를 부축했다.
그와 같은 일행인 것처럼 보였다.
—대장님께서 고작 2명의 인간을 옮긴 것만으로 이렇게 무리하실 줄이야…….
—걱정하지 마세요. 이로써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끝냈으니까! 그보다 IUPC의 상태는 어떻죠?
—예정대로 돌연변이 군단을 계속 늘리는 중입니다.
—흠, 그쪽 부장과는 말이 아주 잘 통해서 다행입니다. 이제 이 보물 같은 땅덩어리가 저희 손에 들어오는 건 시간 문제군요!
대장이라고 불린 중절모의 남성은 손으로 입가의 피를 닦아 내며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
곧 그들이 다른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자, 유지한의 눈에 보이던 모든 것들이 조금씩 흐릿해져 갔다.
꿈에서 깨어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잠깐만.’
하지만 유지한은 애써 정신을 붙잡으며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을 샅샅이 살폈다.
키와 생김새, 그리고 은연중에 느껴지는 그들의 이질적인 마력까지도.
‘너희 얼굴, 똑똑히 기억했다.’
마지막으로 대장의 얼굴을 바라보는 유지한의 눈에는.
은은한 분노가 드러나고 있었다.
*****
다시금 유지한의 눈에 세상이 흐릿하게 보이던 순간.
앞에서 낯익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한 씨! 유지한 씨!”
유지한의 어깨를 꽉 붙잡고 다급하게 이름을 외치는 박재경.
멍하니 허공에 시선을 두고 있던 유지한은 그녀를 바라보며 눈을 껌벅거렸다.
그 시선을 눈치챈 박재경이 말했다.
“괜찮으세요?”
“이제 괜찮습니다.”
“어휴, 갑자기 아무런 반응을 안 하셔서 놀랐잖아요.”
“……제가 반응을 안 했어요?”
“네. 한 5초 정도.”
박재경은 유지한이 약 5초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유지한이 조금 전의 공간에서 체류한 시간은 아무리 짧아도 3분.
실제로 흐른 시간과는 큰 괴리가 있었다.
유지한은 허공에 떠오른 실프를 바라보며 생각에 빠졌다.
‘너 방금 뭘 어떻게 한 거야.’
계약자의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실프는 공중에 떠서 빙그르르 몸을 굴릴 뿐이었다.
녀석과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게 이토록 아쉬울 때가 없었다.
“지한 씨. 혹시 정신 질환을 앓고 계신 건가요?”
박재경의 표정은 진지했다.
아무리 몸이 튼튼하고 회복력도 빠른 영웅이라고는 하지만.
살면서 목숨이 오가는 전투를 수없이 겪게 되는 그들의 특성상 각종 스트레스나 정신병 따위의 위험에 노출되는 경우가 매우 잦았다.
조기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않으면 더 큰 문제로 번질 수도 있을 터였다.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혹시 모르니 조만간 상담은 한 번 받아보시길 추천드릴게요.”
“참고하겠습니다. ……그런데 재경 씨. 그것보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네?”
“…….”
유지한은 대답하기에 앞서 입술을 꾹 다물었다.
방금 본 장면들을 다른 사람에게 대체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머릿속의 기억을 꺼내다가 보여 줄 수도 없는 입장.
어설프게 말을 했다가는 미친놈 취급을 받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떻게든 주사위의 협조를 끌어내려면.
반드시 길드의 2인자인 박재경의 도움이 필요했다.
“제가 윤도하 씨와 백강천 씨가 사라진 이유를 알아낸 것 같습니다.”
“……지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유지한의 말에 박재경의 눈빛이 변했다.
“실프가 마석을 먹어치운 순간, 제 눈에 실종된 당시의 윤도하 씨와 백강천 씨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그게 정말이에요?!”
“정령이 구체적으로 뭘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 이전 계약자가 엘프였기도 한 만큼, 뭔가 특별한 능력을 가진 것으로…….”
유지한은 조금 전의 일이 실프의 행동으로 인한 것임을 분명히 한 뒤.
정육면체의 공간에서 본 것들을 토대로 설명을 이어 갔다.
“다른 세계의 인간이요?”
“예. 아무래도 IUPC가 이세계의 인간들과 접촉한 것 같습니다.”
“확실히, 그 단체로부터 압수한 약물들은 일반적인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물건이었어요. 한낱 시민 단체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말이죠. 거기에 제 3자가 껴있다는 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국가나 거대 길드의 연구소에서도 놀라움을 드러낼 정도의 물건들.
그것들을 IUPC에게 건넨 것이 이종족이나 이세계에서 건너온 인간들이라고 한다면 어느 정도 말이 될 법했다.
“문제는 적들이 1급 영웅을 납치할 정도의 힘을 가졌다는 겁니다. 그 능력이 만능은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한시라도 빨리 주변에 이 내용을 알리고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마 믿기 어려우실 겁니다. 제가 재경 씨였어도 비슷한 반응이었겠죠. 하지만 제가 지금 같은 자리에서 거짓말이나 농담을 할 정도로 미친놈은 아닙니다.”
속사포로 말을 쏟아 낸 유지한은 진지한 얼굴로 박재경을 바라봤다.
박재경은 그런 그에게 시선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이걸 정말로 믿어야 하나?’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불렀던 사람의 입에서 이런 정보가 나올 줄이야.
박재경은 이내 바닥을 내려다보며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에 유지한은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제가 말이 거짓이라면 저는 그날부로 영웅을 그만두겠습니다.”
“……!”
“법적 효력이 있는 각서를 써도 좋고, 제 얼굴이 나오게끔 영상을 찍으셔도 좋습니다.”
“아, 그렇게까지…….”
“믿으셔야 합니다.”
최근 뜨거운 화제로 떠오른 파티의 중심이 되는 영웅.
예전과 달리 잃을 것이 많아진 그가 자신에게 크게 불리할 수도 있는 조건들을 제시했다.
그만큼 확신이 있다는 것이었다.
“후우…….”
이후로도 무척 고심하던 박재경은.
끝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주사위의 권한 대행자로서, 유지한 씨를 믿겠습니다.”
*****
“죄송하지만 믿을 수가 없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영웅부로 직행한 박재경과 유지한을 맞이한 것은 양지철이었다.
그러나 미리 연락을 받고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던 양지철은 대략적인 내용을 전해 듣고서 고개를 저었다.
“저로서는 이 내용을 믿고 싶지만, 냉정하게 따져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기에는 이야기의 신뢰성이 너무 떨어져요.”
어쩌면 이것이 더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이세계의 인간들이 지구로 넘어왔다는 건 그만큼 믿기 힘든 소식이었으니까.
그때 박재경이 말했다.
“영웅부의 협력이 없더라도 주사위는 꿀잼과 함께 단독행동에 나설 겁니다.”
“진심이십니까?”
“네.”
윤도하가 자리를 비운 지금, 주사위의 결정권자는 부길드장인 박재경.
그녀의 말에 양지철은 크게 갈등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박재경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이렇게 된 이상 진위 확인을 위해 그분을 불러주십시오.”
“그분이라면?”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다는 고유 스킬의 보유자 말입니다.”
“……!”
양지철은 놀란 듯 몸을 움찔했다.
“박재경 씨가 대체 그걸 어떻게 알고 계시는 거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끄응…….”
양지철은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의 제안에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몇 분 뒤.
접견실에서 잠시 자리를 비웠던 양지철이 사람 한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유지한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또 보네. 오빠.”
“니로치?”
“어? 두 분이 서로 아시는 사이였습니까?”
“여기서 연구원으로 일하는 카지미르를 통해서 잠깐 대화를 나눴습니다.”
유지한은 양지철의 손에 이끌려온 니로치를 바라봤다.
듣자 하니 그녀는 거짓말 탐지기처럼 말의 진위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고유 스킬을 감정할 수 있는 것과는 별개의 능력인 듯했다.
“손 줘.”
“여기.”
“이제 오빠가 하고 싶은 말을 해봐. 뭣 땜에 날 데려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세계의 인간들이 지구로 넘어왔다.”
“뭐라고?”
양지철에게 아무런 내용도 전해 듣지 못했던 니로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내 그녀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이거 진짜잖아.”
“저 말이 진짜라고요?”
“적어도 이 오빠는 자기가 한 말이 진실이라고 믿고 있어.”
“윤도하와 백강천은 이세계의 인간들에게 납치당했다.”
“이것도 진실이고.”
“IUPC는 이세계의 인간들과 접촉했다.”
“이것도 진실.”
유지한은 계속해서 자신이 아는 정보들을 풀어놓았다.
그리고 니로치에 의해 그 모든 내용이 진실이라는 것이 확인되자.
양지철은 동그랗게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럴 수가…….”
“이제 믿으시겠습니까?”
“지금 당장 위쪽에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거짓을 파악하는 니로치의 능력은 영웅부에서 수차례의 검증을 통해 증명된 능력.
표정을 굳힌 양지철이 유지한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지한 씨. 정말로 큰일을 해 주셨습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마도 위기 대응 메뉴얼에 따라 3급 이상의 영웅들을 대상으로 소집령이 내려질 겁니다.”
“……전쟁입니까?”
“그건 더 논의를 해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쩌면 한국 내부에서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상황.
그 상황을 만들어 낸 유지한은 빠르게 멀어지는 양지철의 등을 보며 주먹을 쥐었다.
“오빠는 나랑 잠깐 얘기 좀 하자.”
자리에 남아 있던 니로치는 유지한의 옷깃을 붙잡았다.
말하고 싶은 게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