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엘프 (2)
‘편하게 앉으라며…….’
의자에 앉았음에도 서 있을 때보다 불편해진 유지한은 김시후를 바라봤다.
하지만 김시후는 이런 상황을 예상이라도 했던 것처럼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이내 인사를 마친 엘프들이 다시 허리를 폈다.
그리고 조금 감격한 표정으로 실프를 바라봤다.
“저 아름답고도 영롱한 빛깔……! 그때와 전혀 달라진 게 없으셔서 다행이야.”
“정말로 다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이건 세계수의 은총이 분명해.”
유지한의 머리 위에 꽂혀 버린 3인의 시선.
하지만 어째 실프는 그들의 관심을 조금 귀찮아하는 듯했다.
계약자인 유지한은 그것을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크흐흠!”
그는 주위를 환기시키고자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여러분께는 실프가 꽤 중요한 존재인가 봅니다.”
“그야 당연하죠!”
“저희가 살던 세계인 그루디아에서 왕족과 계약한 정령은 계약자인 왕족과 같은 대우를 받습니다.”
“……정령이 왕족 대우를 받는다고요?”
“네.”
순간 유지한은 흠칫했다.
처음 실프와 계약을 맺었던 당시 그는 실프를 소환했다가 돌려보내는 연습 따위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하루에 시도했던 소환 횟수만 100번을 가볍게 넘겼을 정도.
그 과정에서 실프가 지치고 불만을 토하는 것처럼 부들부들 떨어 대기도 했는데…….
그런 취급을 받았던 녀석이 예전에는 왕족 대우를 받던 귀한 존재였다니.
‘그때 일은 언급하지 않는 게 좋겠군.’
최근까지도 실프를 강아지 다루는 느낌으로 대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눈앞의 엘프들에게는 알리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마일리 누나. 혹시 실프의 계약자로서 도움이 될 만한 정보는 없을까요?”
“정보라…….”
마일리라 불린 여성은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그녀는 김시후의 어머니 에르나 하스와 함께 그루디아라는 세계에서 넘어온 엘프.
그중에서도 엘프들의 왕국인 시오론 왕국의 3왕녀였던 에르나 하스의 수발을 들던 하녀였다.
오늘 만난 엘프 중에서도 에르나 하스의 곁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머물렀던 지인.
동시에 실프와의 첫 계약 장면을 지켜봤던 인물이기도 했다.
“내가 잘 아는 것부터 말해 보자면, 실프 님은 항상 장난기가 많았지. 그루디아에서는 넓은 성 안을 쏘다니는 덕분에 나 같은 사용인들이 당황하는 순간도 많았어.”
“…….”
“화창한 날 숲에서 나무와 나무 사이를 날아다니는 걸 좋아하셨고…….”
나무로 가득하고 넓은 숲을 매우 좋아했다는 실프.
근 몇 달간 녀석을 작은 주머니 속에만 넣어 두었던 유지한은.
마일리가 한 마디 한 마디 뱉을 때마다 가슴이 쿡 찔려 왔다.
“그래도 역시 도움이 될 정보라면 마법이겠지?”
“엄마가 쓰던 마법은 저도 다 알고 있어요! 쓸 만한 마법은 지한이 형에게 가르쳐 드리고 있고요.”
“아니. 아마 전부 알 수는 없을 거야. 에르나 님은 수십 년 전 지구로 넘어온 날부터 단 한 번도 진심으로 마법을 사용한 적이 없으셨으니까.”
“……!”
마일리의 대답에 김시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태어나서 처음 듣는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2급 영웅에 버금가는 사람이었는데…….’
에르나 하스는 아들인 김시후의 판단에 2급 영웅과 비교될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생전 지구에서 한 번도 진심을 내보인 적이 없었다고 가정한다면.
그녀의 가진 100%의 힘은 대체 어느 정도라는 것일까?
“에르나 님의 마법이라고 하니까 그때가 떠오르네. 왕국에 괴물들이 쳐들어왔던 날 기억나?”
“당연하지! 나 전선에서 정말 치열하게 싸웠었다고.”
마일리의 옆에 앉아 있던 남자 엘프들은 과거를 회상했다.
그들은 모두 시오론 왕국에 소속되었던 기사들.
에르나 하스가 지구로 넘어오던 당시 그녀와 함께 넘어온 이들이었다.
“그 당시 에르나 님과 실프 님의 보여 주신 무력은 그야말로 전장의 판도를 뒤바꾸는 힘이었지! 내가 직접 본 바람 계열의 마법 중에서도 단연코 으뜸이었어.”
“그거 조금 더 자세하게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유지한은 엘프들이 나누는 대화를 경청했다.
온 세상을 찢어낼 듯한 벼락이 동반된 비바람.
시야에 닿는 모든 적을 휩쓸어버리는 거친 돌풍.
용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착각이 들 정도로 거대한 토네이도까지.
에르나 하스가 전장에서 사용했다는 마법들은 하나같이 아주 인상적인 것들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나 인상적인 마법을 사용하는데 핵심 역할을 했던 정령은.
지금 유지한의 머리 위에서 몸을 핑그르르 굴려 대고 있었다.
드드드드—!
자신의 과거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 탓인지.
실프는 은근히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네가 에르나 님의 진짜 힘을 구경할 기회는 없었을 거야. 한국에 정착한 뒤에는 대체로 평화로웠으니까.”
“그랬군요…….”
김시후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힘은 지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오늘 새로운 사실을 깨닫고 상당한 충격을 느끼는 그였다.
마일리는 유지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라도 도와주고 싶지만, 아쉽게도 직접적으로 도움을 드리는 건 어려울 것 같네요.”
“동감입니다. 저희로서는 에르나 님의 마법을 감히 따라 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요.”
“아뇨, 괜찮습니다. 지금 말씀해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됐어요.”
고개를 끄덕거리던 유지한이 손바닥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머리 위에서 혼자 놀고 있던 실프가 곧장 그의 손바닥 위로 내려앉았다.
“……!”
“……?!”
말로 직접 명령을 내린 것도 아닌데 정령과 계약자의 행동이 이렇게나 자연스럽게 이어지다니.
한 치의 거부감도 없이 유지한을 따르는 실프를 보며 마일리를 포함한 엘프들은 속으로 놀랐지만.
유지한은 실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여러분 덕분에 실프가 가진 능력의 한계치가 아주 높다는 걸 알았습니다.”
유지한이 윤도하로부터 엿볼 수 있었던 가공할 만한 정령사의 힘!
과거에 에르나 하스가 사용했다는 마법들이 전부 사실이라면.
유지한이 그와 비슷한 수준에 도달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터였다.
“실프와는 별개로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여러분은 왜, 그리고 어떻게 지구로 오신 겁니까?”
“에르나 님께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다툼에 휘말린 이후 저를 비롯하여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자들을 데리고 왕국에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지구로 온 건 그로부터 얼마 뒤의 일이에요.”
“……!”
“다만 차원 이동이라고 해야 할지……. 그건 우연하게 벌어진 일이라.”
수명이 다해 가는 왕으로 인해 10명이 넘어가는 왕자들과 왕녀들이 서로 왕위를 두고 암투를 벌이던 때.
능력은 있었지만 딱히 권력에 욕심이 없었던 에르나 하스마저 그에 휘말리고 말았다.
왕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질려 버린 그녀는 왕녀로서 자신이 누리던 모든 것들을 버리고 뛰쳐나온 것이었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구나.’
지구와 그루디아. 인간과 엘프.
서로 살아가는 세계와 종족은 달라도 사회적으로 발생하는 사건들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그때 김시후가 마일리를 향해 말했다.
“아, 맞다. 저도 하나 물어볼 거 있었어요.”
“음?”
“제가 저번에 무의식중에 굉장히 강력하고도 기묘한 마법을 사용했거든요? 청영사의 교관분께서는 그걸 두고 엘프의 마법 같다고 하셨는데, 제가 기억을 아무리 뒤져 봐도 그런 걸 배운 적이 없어요.”
“어떤 마법이었는지 설명해 줄래?”
“천장에서 초록색 풀과 나무줄기로 엮인 동그란 입구 같은 게 생겼고, 거기서 굉장히 커다란 팔이 튀어나왔어요.”
“……커다란 팔?”
“네. 이따만한 나무로 만든 것 같은 커다란 팔이요! 꼭 무슨 만화에나 나올 법한 거인처럼.”
김시후는 양손을 좌우로 쫙 펼치며 당시 바바리안들을 짓눌렀던 거인의 팔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런데 그가 당시 눈으로 봤던 것을 하나씩 설명할 때마다.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엘프들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해 갔다.
“저, 정말로?! 시후 네가 잘못 본 게 아니고?”
“잘못 봤을 리가 없어요. 그렇죠 형?”
“맞습니다. 제가 바로 앞에서 그 광경을 직접 목격했으니까 확실해요.”
“…….”
표정이 더욱 심각해지는 엘프들.
서로 시선을 교환하는 그들의 분위기는 마치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에 김시후는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뭐 아시는 거라도?”
“시오론 왕국에는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하나 있어.”
“전설이요?”
“그루디아라는 세계를 지탱해 주던 1대 세계수의 수명이 다했을 때, 우리의 조상들께서 직접 그 세계수를 베어 영원토록 그루디아를 수호하는 병기를 만들었다고…….”
*****
유지한과 김시후과 떠난 뒤의 카페.
아직 자리에 남아 있던 엘프들은 모두 컵이 놓인 책상만 바라보고 있었다.
말을 할 듯 말 듯 입술을 달싹이는 3인의 엘프.
먼저 입을 연 것은 한 남자 엘프였다.
“마일리. 넌 어떻게 생각해.”
“시후가 굳이 우리에게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
“…….”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고.
손으로 빈 컵을 만지작거리던 마일리가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인간과 엘프의 혼혈이…….”
“난 아직 믿을 수가 없는데.”
“믿고 말고는 네 자유겠지. 하지만 시후는 에르나 님의 아들이자 어렸을 때부터 범상치 않은 재능을 보여 줬던 아이야. 고로 난 확신해.”
달칵.
마일리는 빈 컵을 쟁반 위로 올려놓으며 말했다.
“장로님들이 그토록 원했던 거신병의 주인은 시오론이 아니라 이곳, 지구에 등장했어.”
*****
—윤도하 씨!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
“뭘하긴요. 한국에서 쓰레기들 청소하자는 거지.”
—무고한 이들을 함부로 쓰레기라고 부르지 마세요!
“무고? 누가 무고해?”
—아무리 영웅들과 대척점에 있는 단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는……!
경찰 고위 간부와 윤도하의 통화.
간부는 대놓고 IUPC를 저격했던 윤도하를 향해서 열변을 토했지만.
그걸 듣고 있던 윤도하는 귀찮은 표정을 지으며 손톱을 매만졌다.
“아아, 다 됐고. 하나만 확인해봅시다.”
—뭘 확인한다는 겁니까?
“제가 지금 뱉는 문장 한 번만 따라서 말해 보세요.”
—……?
“IUPC 개새끼.”
—뭐, 뭣?!
“해보세요.”
—…….
다른 사람도 아닌 경찰에게 다짜고짜 욕설을 해보라는 윤도하.
그의 요청에 상대방은 입을 다물었다.
끝내 대답을 하지 않자, 윤도하는 혀를 차며 말했다.
“이만 끊습니다.”
—잠깐……!
뚝.
윤도하는 통화를 일방적으로 끝내 버렸다.
뒤이어 그는 사전에 준비해 뒀던 메시지를 주사위에 소속된 여러 2급 파티원들에게 전송했다.
메시지에 담겨 있는 내용은 간단했다.
할 일이 생겼으니 정해진 날까지 다른 활동들을 정리하고 길드로 한데 모이라는 지시였다.
옆에서 대기하던 그의 파티원 박재경이 말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뭘?”
“여기저기서 반대가 만만치 않은데…….”
“재경아.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저희가 언론에 흘렸던 정보를 반박하는 기사들이 하나씩 올라오고 있습니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의 여러 언론도.”
“마음대로 씨부리라지.”
한국에서 IUPC라는 단체를 완전히 지워 버리기 위한 소각 작전.
그들은 그걸 눈앞에 앞두고 있었다.
“9대 길드와도 이야기 끝냈어. 오랜만에 모일 생각하니까 두근두근하네.”
“설마 전부 모이시는 겁니까?”
“안 나오면 어떻게든 한국 10대 길드에서 이름 뺄 거라고 했거든.”
“고작 단체 하나를 없애자고 모든 1급 영웅들이 모이는 건 너무 심한 게 아닌지.”
“기왕이면 확실하게 하자는 거야. 일이 돌아가는 꼬라지를 보니 놈들도 나름 준비해 둔 게 있을 테니까.”
“…….”
“캬, 이 정도면 정말 오래 봐줬다! 예전 같았으면 앞뒤 안 재고 진작에 혼자서라도 다 엎어 버렸을 텐데.”
IUPC는 보유한 인맥도 넓고 세계적으로도 널리 퍼져 있는 단체.
음지에서 활동하는 놈들과 다르게 가벼운 마음으로 건드릴 수는 없었지만.
쌓아 온 것들을 한꺼번에 터트린 결과, 적어도 한국에서는 녀석들을 축출해 버려도 큰 문제가 없는 수준에 다다랐다.
윤도하는 고개를 돌려 투명한 창문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일 끝나면 부산 가서 국밥이나 말아먹고 오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