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3급 (13)
영웅 지강석은 4급 영웅이었을 때부터 파티와 길드를 자주 옮겨 다녔다.
지금까지 거쳐 온 길드의 수만 총 8곳.
한국의 2급 영웅 중에서도 이직이 가장 잦은 사례라고 볼 수 있었다.
파티의 합이 중요시되는 영웅 시장에서 그것이 절대로 플러스 요소가 되지 않음에도.
그가 과감하게 길드를 옮겨다닌 이유는 오로지 높은 등급으로 올라가고 싶다는 갈망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이프 길드에 정착 후 언론에도 이름이 자주 노출되면서.
지강석은 어느덧 과거 자신이 우러러봤던 이들과 비슷한 영웅이 되었다.
그런 그에게 숫자로 나타나는 등급은 자신의 자부심이자 명예였다.
정말 괴물같은 이들이 가득한 1급에 닿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영웅이 노력으로서 따낼 수 있는 최고의 등급인 2급에 적지 않은 만족감을 느끼는 그였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지강석의 자부심에 살짝 금이 가려하고 있었다.
‘겨우 4급 주제에 내 공격을 막았다고?’
초심자의 행운, 아니면 요행인 것일까?
유지한은 그의 힘이 실린 발차기를 막아 냈다.
절대로 그냥 봐주려고 했던 공격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죽지 않을 정도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었다.
만약 상대가 과거의 본인, 4급 영웅 지강석이었다면 절대로 멀쩡하게 서 있을 수 없었을 터.
‘믿을 수 없어.’
공격을 시도했다가 되레 정강이가 상대의 손에 붙들린 상황.
그는 유지한에게 붙잡힌 다리를 회수하려고 했다.
꽈아악!
그러나 유지한은 그를 쉽게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그의 손등 위로 솟아오르는 손가락 뼈와 푸른 핏줄.
지강석의 정강이를 강력한 집게처럼 아주 꽉 잡고 있는 그였다.
“이 새끼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지강석이 바닥에 딛고 있던 다리로 점프하며 재차 공격을 시도했다.
상대의 아주 위협적인 기세에 유지한은 잡고 있던 발을 놓고 뒤로 빠졌다.
“넌 뒈졌어.”
이제 봐주면서 싸울 생각 따위는 내다버린 지강석이었다.
자유의 몸이 된 그가 곧바로 유지한을 쫓았다.
무쇠 같은 주먹과 발차기가 연달아 유지한을 노리며 뻗어졌다.
쉭! 쉬익—!
강력한 힘이 실린 공격이 공기를 찢으며 바람을 앞으로 떠밀었다.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하는 유지한의 머리칼과 옷은 마치 선풍기라도 틀어 놓은 듯 이리저리 휘날렸다.
핏!
지강석의 주먹에 스친 유지한의 볼이 살짝 찢어졌다.
볼의 상처에서 작은 핏방울이 새어나오는 걸 본 지강석은 씩 웃었다.
유지한의 움직임을 따라잡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쉽게 넘어갈 생각이 아닌가 본데.’
유지한은 볼에 맺힌 핏방울을 손등으로 닦았다.
2급 영웅 지강석의 공격은 강력한 힘이 실렸으면서도 방심하지 못할 만큼 빨랐다.
게다가 그는 다수의 영웅들과 대련을 겪어 본 상대.
변칙적인 공격을 날릴 뿐더러 조금의 여유도 허용하지 않고 유지한을 몰아쳤다.
‘그 바바리안들보다 더 강한 것 같네.’
유지한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백화점에서 마주쳤던 대장격의 바바리안보다도 지강석이라는 영웅 한 명이 더 강하다는걸.
‘샘플링을 사용하는 시간조차 아까워.’
샘플링이 제공하는 확률은 유지한에게 커다란 안정감을 가져다주지만.
이 대련에서는 스킬 사용에 소모되는 찰나의 시간마저 아까웠다.
주머니에 넣어둔 실프의 도움으로 버프를 몸에 걸어 둔 상황.
그는 눈으로 들어오는 여러 정보를 조합하여 상대의 다음 공격을 읽어 냈다.
훅!
아래에서 위로 뻗어지는 주먹.
정확히 턱을 노리고 들어오는 공격에 대응하듯 유지한은 상체와 고개를 동시에 뒤로 뺐다.
탁!
뒤이어 옆구리를 노리고 날아오는 공격을 손으로 쳐냈다.
단단한 둔기에 맞은 듯 손을 타고 들어오는 충격은 상당했지만,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정도였다.
쉭! 쉭! 쉭!
지강석은 조금씩 앞으로 전진하며 쉬지 않고 연신 주먹을 날려 댔다.
하나같이 강력한 힘이 실려 있는 공격들!
언뜻 보면 그가 뒤로 물러나는 유지한을 크게 압도하는 장면이었다.
‘이걸 다 피한다고?’
하지만 유지한을 노리는 그의 공격은 계속해서 허공만을 갈랐다.
어느덧 대련 시작 후 2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볼을 잠깐 스친 것을 제외하면 유지한은 아직까지 제대로 된 데미지를 입지 않았다.
대련장에 들어온 두 사람의 처지를 고려했을 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결과.
하지만 그 믿을 수 없는 일은 당장 지강석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토끼 같은 놈!’
피할 건 모두 피하고, 공격이 성공하는가 싶으면 모두 쳐내거나 옆으로 흘려 버리는 유지한.
자꾸만 공격이 실패하는 나머지 지강석은 조금 짜증을 내며 앞쪽으로 정권을 내질렀다.
유지한은 그의 팔이 닿지 않을 정도로 뒤로 물러나길 시도했다.
“핫!”
그 순간 지강석이 갑작스럽게 펼친 손에서 그의 마력이 터지듯이 뿜어져 나왔다.
쥐고 있던 주먹 안쪽에 다량의 마력을 압축시켜 놓은 것이었다.
파아앙!
제대로 된 마법의 형상을 이루는 것에는 실패한 마력 덩어리 그 자체.
그럼에도 마력을 무식하게 압축해 놓은 덕분에 요란한 소음이 퍼졌다.
혹시 모를 피해로부터 벗어나고자, 유지한은 양팔로 얼굴을 가리며 뒤로 힘껏 뛰어올랐다.
‘걸렸다!’
두 다리에 마력을 한껏 불어넣었던 지강석은 튀어오르는 스프링처럼 앞쪽으로 돌진했다.
돌진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먼저 뛰어오른 유지한을 따라잡았다.
‘이걸로 끝낸다.’
꽈드득!
공중에서 허리를 한껏 비튼 지강석.
그가 유지한에게 도달하는 타이밍에 맞춰 아래로 주먹을 내질렀다.
몸통 어디에든 닿기만 한다면 살을 터트리고 뼈를 박살낼 수 있는 공격이었다.
[윈드 밤]
하지만 유지한의 위쪽에서 바람의 폭탄이 등장하고.
강력한 바람에 떠밀린 그의 몸은 빠르게 대련장의 바닥으로 착지했다.
쾅!
반대로 바람에 밀려서 위로 살짝 떠오른 지강석은 대련장의 벽과 충돌하여 땅으로 내려왔다.
빠르게 자세를 다잡은 그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방금 그건 마법같은데…….”
“맞습니다.”
“마법을 쓸 수 있었다고?”
“아, 모르셨나?”
유지한은 지강석을 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
김시후는 입을 꾹 다물고 유지한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련장의 두 사람이 합을 나누는 매 순간이 긴장되었지만.
유지한은 마법까지 활용하며 잘 버티는 모양새였다.
‘뭐라도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건만!’
파티장이 홀로 대련을 치르는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김시후였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김시후가 휴대폰 시계를 바라봤다.
대련이 시작된 지 3분째.
남은 시간은 약 2분 남짓이었다.
“음?”
“……어?”
몇 분간 유지한을 내내 쫓아다니기만 하던 지강석의 손에서 푸른 안개 같은 것이 넘실거렸다.
그러자 대련장 밖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놀라는 목소리를 냈다.
지금 그의 손에 머무르는 것은 마력이 아닌 오러!
기어코 그가 대련에서 오러를 꺼내든 것이다.
민유리가 조금 당황하며 말했다.
“이거 간단한 대련 아니었어요? 오러까지 사용하는 건 조금…….”
“…….”
사용하기에 따라 어마어마한 살상력을 보이는 오러의 발현.
굳은 표정의 양지철이 타이머를 내려다봤다.
유지한이 훌륭하게 버텨주었기 때문에 얼마 남지 않은 시간만 지나면 대련은 끝난다.
하지만 여기서 오러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대련을 중단한다면?
지강석이 어떤 자세로 나올지 예측할 수 없었다.
그리고…….
쿵!
‘역시나.’
지강석과 맞붙는 유지한의 손에도 초록빛의 오러가 서렸다.
사전에 확인했듯이 그는 지강석과 같은 오러 사용자였다.
“대련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막는다면 분명 지한 씨에게도 실례일 겁니다.”
대련장 안에 있는 유지한의 심정을 대변하는 양지철이었다.
“또 도망쳐 봐!”
오러가 실린 지강석의 커다란 주먹이 유지한의 명치를 노리고 뻗어졌다.
유지한의 시선은 공기를 찢으며 날아오는 그 주먹을 향해 있었다.
턱!
명치를 노리던 주먹은 유지한의 손바닥에 의해 막혔다.
운이 좋아서 막아 낸 것이 아니라 상대의 공격을 정확히 파악한 대응이었다.
단순한 완력으로는 지강석이 살짝 앞서는가 싶지만, 크게 밀리지 않는 모양새.
뒤이어 날아든 지강석의 발차기에는 유지한이 같은 발차기로 응수했다.
콰앙!
오러가 실린 두 사람의 다리가 X자로 교차하며 강력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으라라라—!”
빠르게 뻗어지는 주먹과 발길질의 세례!
두 사람 사이에서 조금 전보다 훨씬 더 치열해진 공방이 오갔다.
대련에 참관한 이들은 그 공격을 눈으로 쫓기에 바빴다.
“흡!”
유지한은 완벽하게 피할 수 있는 공격들은 모두 피하면서도.
조금이라도 스칠 가능성이 보이는 것들은 똑같이 오러를 둘러 막아섰다.
한정된 실프의 마력으로 효율적인 오러 운용을 하는 것이었다.
탁! 타닥! 타닥!
두 사람의 오러가 부딪힐 때마다 그 주변으로 작은 오러의 불똥 같은 것이 흩날렸다.
‘뭔가 이상한데?’
연속으로 주먹을 뻗던 지강석은 미간을 찌푸렸다.
기분 탓인지 유지한의 오러와 부딪힐 때마다 자신의 오러가 조금씩 줄어드는 듯했다.
그리고 그건 놀랍게도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실프의 마력이 깃든 초록빛 오러는 상대방의 오러를 조금씩 깎아내고 있었다.
‘이런 효과가 있었나!’
몇 번의 충돌로 자신이 가진 힘을 새롭게 깨달은 유지한이었다.
그는 오러의 효과를 최대한으로 이용하기 위해 지강석에게 몸을 바짝 붙이며 잦은 접촉을 유도했다.
“1분 남았습니다!”
남은 시간을 알리는 양지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조금 초조해진 지강석은 유지한을 더욱 거칠게 몰아세웠다.
그런데 그때였다.
‘빈틈?’
유지한은 지강석에게서 커다란 빈틈을 발견했다.
이렇게 눈에 뻔히 보일 정도의 빈틈이라니?
내기에서 지강석 본인이 내세운 제한 시간이라는 조건이 되레 그에게 압박이 된 모양이었다.
이번 대련에서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5분을 버티는 것.
그렇기에 몇 번이나 공격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시간을 끌기 위해서 일부러 자신있는 방어와 회피에만 집중하던 유지한이었지만…….
‘저걸 보고 어떻게 참아.’
상대의 완벽한 빈틈을 차마 무시하지 못하고 공격을 꽂아넣었다.
“컥!”
지강석의 배를 노리고 길게 뻗어진 유지한의 발.
복부를 제대로 얻어맞은 그의 허리가 순간적으로 꺾였지만.
유지한은 추가적인 공격을 대신하여 그와 다시 거리를 벌렸다.
대련의 종료까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씨발……!”
반짝!
그때 뭐라 중얼거린 지강석의 손에서 작은 빛이 점멸하더니.
곧 그의 맨손을 감싸는 화려한 건틀릿이 등장했다.
평범한 장비가 아니라 특별한 효과가 부여된 아티팩트였다.
‘오러에 이어서 아티팩트까지 꺼낸다고?’
스킬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지강석.
심지어 무기도 사용하지 않았던 그 사람이 갑자기 아티팩트를 꺼내들었다.
큰 변화를 감지한 유지한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투둑.
지강석은 자세를 한껏 낮추고 팔을 아래로 축 늘어트렸다.
그의 시야에는 오로지 유지한만이 담기고 있었다.
“찍!”
그때 황급히 네발로 달려온 칠라가 방패를 들고 유지한의 앞을 막아섰다.
“그만!”
“여기까지에요.”
뒤이어 대련장으로 들어온 김시후와 민유리는 각자 지팡이와 활로 지강석을 겨눴다.
당장이라도 반격할 기세인 유지한의 동료들.
대련장 밖에서는 양지철이 양팔을 힘껏 흔들고 있었다.
그제서야 이미 5분이 지났다는 걸 알게 된 지강석이었다.
반짝!
그의 건틀릿이 빛으로 변해 사라진 뒤.
유지한은 그에게 말했다.
“합격입니까?”
“……그래. 합격이다, 이 새끼야.”
허탈한 말투로 대답하는 지강석이었다.
유지한을 상대로 홧김에 아티팩트까지 꺼내 버린 순간.
그는 2급 영웅으로서의 자존심을 던져 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문경진보다는 낫군.’
면접에서 나눴던 대화와는 달리 깔끔한 인정이었다.
가만히 유지한을 노려보던 지강석은 먼저 대련장을 빠져나갔다.
“하, 씨발. 개쪽팔리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지강석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양지철은 유지한을 돌아보며 말했다.
“파티 승급 축하드립니다.”
3급으로의 승급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