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3급 (9)
“유리 씨! 저만 믿으세요!”
“…….”
민유리가 포함된 5번 파티의 대련.
칠라마저 전사들과 함께 최전방에 나서는데도.
기어이 민유리를 보호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민주용이었다.
‘싱겁게 이겼네.’
후방에서 상대에게 위협 한 번 당하지 않은 민유리.
대련에서 제몫을 톡톡히 해낸 그녀의 활약으로 승리는 5번 파티에게 돌아갔다.
영웅부가 눈이 달렸다면 합격점을 줄 수밖에 없으리라.
한편, 유지한의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정영욱은 중얼거렸다.
“같은 파티원이 들어간 곳과는 매칭이 안 되나 보네요.”
“그러게요.”
대련에서 상대로 맞붙는 파티에는 자신과 같은 파티원이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
혹시라도 같은 파티라고 해서 일부러 봐주거나 시험 조작의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함이었다.
“7번 파티와 11번 파티 대련 준비하세요.”
곧이어 유지한의 2번째 대련이 다가왔다.
그는 대련에 앞서 딜러를 맡은 2명의 마법사에게 최대한 마력을 아끼라는 조언을 건넸다.
콰앙!
콰아앙!
하지만 조언이 무색하게도 마법사들은 마법을 난사했다.
덕분에 대련에서는 빠르게 승리했지만.
“하…….”
“힘들어…….”
애초에 마력양이 그리 많지도 않았던 마법사들은 대부분의 마력을 소모하고 탈진했다.
처음부터 걱정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마법 쓸 수 있겠어요?”
“저는 무립니다.”
“아, 앞으로 작은 마법 3번 정도는요……?”
마법을 3번 정도 쓸 수 있다는 여자 마법사.
그나마 멀쩡한 건 컨디션 조절을 하고 있던 정영욱뿐이었다.
‘한번만 더 이기면 3연승인데.’
가능하면 1승이라도 놓치지 않고 싶은 유지한이었다.
그런 그에게 정영욱이 다가왔다.
“어떡할까요?”
유지한의 의견을 먼저 묻는 정영욱.
정영욱 또한 자기 파티의 파티장이었지만.
이 임시 파티에서의 결정권은 어느새 유지한에게 가 있었다.
“생각해 둔 방법은 있습니다.”
유지한은 앉아서 쉬고 있던 마법사들을 내려다봤다.
이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네 사람.
그리고 몇 분 뒤.
그들의 마지막 대련이 준비되었다.
“흠!”
단단히 결심한 표정을 짓고 있는 2명의 마법사들.
7번 파티가 연승중이라는 걸 알고 있는 상대측은 살짝 긴장한 모양새였다.
“시작!”
심판의 신호가 떨어졌음에도 움직이지 않는 두 파티.
거리를 둔 상태에서 서로 무기를 겨눈 채 잠깐의 신경전이 벌어졌다.
그런데 그때였다.
“돌격!”
유지한의 신호가 떨어지자.
7번 파티의 모든 인원이 상대를 향해 돌진했다.
“……?!”
전사뿐만 아니라 마법사들까지 합세한 돌격에 상대측은 크게 당황한 분위기였다.
그들은 판금 갑옷을 두른 탱커를 앞세워 방어 태세를 갖췄다.
[아이스볼트]
[파이어리 터치]
…….
…….
근접 거리에서 날아오는 마법들.
탱커가 방패를 들어 그것을 막아 내는 순간이었다.
“흐아아!”
마력을 모두 소모한 남자 마법사는 탱커의 방패에 찰싹 달라붙었다.
전사도 아닌 마법사가 접근전을 벌이다니!
뜬금없는 상황에 탱커가 어떻게든 그를 떼어 내려고 했지만.
여자 마법사까지 나서서 그를 붙잡아 움직임을 묶었다.
——상대측에 탱커가 있다면 두 사람이 어떻게든 탱커의 발만 묶어 주세요.
유지한이 요청한 대로 행동하는 두 사람이었다.
“젠장!”
상대측 영웅들은 뒤늦게 탱커를 도우려고 했지만.
탱커를 지나쳐 깊숙이 진입한 유지한과 정영욱을 먼저 막아서야만 했다.
[아이스 필드]
정영욱은 바닥 전체에 얼음을 깐 뒤에 최대한 미끄럽게 가공하기까지 했다.
그러자 상대측 마법사는 얼음을 깨거나 불마법을 이용해 녹이려고 시도했다.
허나 정영욱은 마력을 아끼지 않고 바닥에 퍼부은 덕분에 얼음은 계속 유지되었다.
전사들은 어쩔 수 없이 얼어 버린 땅에서 최대한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으억!”
그런데 그 상황에서 유지한은 자유롭게 움직이며 전사들을 공격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가.
바로 그가 정영욱에게 요청해서 신발 밑창에 날카로운 스파이크를 달아 둔 덕분이었다.
정영욱은 대련이 시작되기 전부터 멀티캐스팅으로 그 마법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콱! 콱! 콱!
스파이크 덕분에 미끄럼 방지가 되는 신발은 얼음 위에서 유지한의 몸을 확실하게 지탱해 주었다.
이어지는 그의 연격에 상대측은 우왕자왕하며 혼란에 빠졌다.
“이치윤 탈락!”
탱커를 붙잡고 늘어지던 마법사들은 한명씩 퇴장당했다.
하지만 상대측에는 이미 무력화된 영웅들이 늘어나는 상황.
“7번 파티 승리!”
결국 모든 상대를 쓰러뜨린 유지한은 전승으로 시험을 마쳤다.
“성공했네요!”
“수고하셨습니다.”
짝!
정영욱은 아주 기쁜 얼굴로 유지한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급조된 파티로 전승을 거두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그였다.
‘이 사람, 진짜 탐난다.’
승리의 주역은 단연코 유지한이었다.
기본적인 전사로서의 역할은 물론이고 파티의 중심으로 활약이 가능한 영웅.
이전에 치렀던 대련에서도 느꼈었지만, 정영욱은 그 생각이 오늘 더 확고해졌다.
“형!”
먼저 대련을 마치고 쉬고 있던 김시후가 달려왔다.
정영욱은 그를 힐끗거리며 생각했다.
‘이런 영웅이 김시후와 같은 파티라니…….’
김시후가 아니라 나와 함께했다면 더 대단한 파티가 탄생했을 텐데!
유지한을 보며 입맛을 다시는 정영욱이었다.
*****
모 대학 병원의 마력치료실.
나이프 길드의 문경진은 그곳에서 재활훈련에 한창이었다.
“발차기 한 번 더!”
“후우욱!”
영웅이라는 축복받은 조건 덕분에 신체 회복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빠르긴 하지만.
잃어버린 다리와 손가락을 대신하여 인공 신체를 장착한 그는 정기적인 관리가 요구되는 몸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문경진을 거드는 나이프 길드의 직원이 차가운 물수건을 가져왔다.
그런데 손으로 물수건을 만져본 문경진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야! 이거 너무 차갑잖아!”
“앗, 죄송합니다!”
“당장 다른 거로 가져와.”
팍!
문경진은 물수건을 직원의 얼굴로 내던지며 불평을 토했다.
허리 숙인 직원이 급하게 치료실을 빠져나간 직후.
떨어진 거리에서 재활을 지켜보던 문경진의 친구가 말했다.
“너네 길드 사람인데 이렇게 막 대해도 괜찮냐?”
“지가 뭐 어쩔 거야? 돈 주는 사람이 우리 형인데.”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의 문경진.
나이프의 길드장인 문경구는 문경진과 피로 이어진 형제다.
따라서 길드 내에서는 마치 자신이 길드장인 것마냥 행동하는 그였다.
“보너스 준다고 하면 아무 불평도 안 해.”
“돈이 좋긴 좋아.”
중견 길드인 나이프는 여러 대장장이 브랜드를 소유하고 있는 길드.
전체적인 장비 판매량이 상당하기 때문에 현금 보유량은 동급의 길드 중에서도 한 손가락에 꼽을 정도.
직원들이 받는 임금 또한 거대 길드에 꿀리지 않기에, 내심 길드에 불만을 가지는 직원도 퇴사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다리는 어때?”
“아아, 점점 더 마음에 들어.”
무릎을 기준으로 위아래의 색깔이 미묘하게 다른 문경진의 다리.
의족을 몸에 처음 이식했던 때만 하더라도 불편해서 죽을 지경이었는데.
이제는 그런 불편함이 많이 줄어들었다.
되레 진짜 몸보다 더 단단하고 마력의 운용이 좋아진 덕분에 문경진은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그냥 다른 신체 부위들도 모두 인공으로 바꿔 버릴까?”
“아니, 그건 좀…….”
“하여간 이걸로 조만간 그 새끼 눌러 버릴 거야.”
그 새끼.
자신을 이렇게 만든 유지한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문경진의 사정을 알고 있는 친구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뒷감당은 어쩌려고.”
“얌마, 이제 나도 눈치는 있어. 대놓고는 안 해.”
“그러면?”
“청영사에서 동기들 간 싸울 기회가 있잖아. 그때 보여 줘야지.”
실력 행사로 유지한을 찍어 누르겠다.
그렇게 다짐하는 문경진이었다.
아파트 계단에서 패배했던 건 우연에 불과한 일.
제대로 붙는다면 그에게는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걔네 영화는 봤냐?”
“그깟 괴구리 사냥하는 영상을 뭐하러 봐?”
“…….”
문경진은 유지한 파티의 영화가 흥행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고작 괴구리를 잡은 거로 유세를 떤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시청했던 친구는 미묘한 표정이었지만.
문경진에게 거슬릴만한 말을 뱉지는 않았다.
“듣자 하니 그 새끼가 승급에 도전한다고 하던데.”
“되게 빠르네.”
“그런데 아마 승급 못 할 거야.”
유지한 파티가 3급으로 올라가지 못할 거라고 자신하는 문경진.
그의 친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형님한테 부탁해서 손을 좀 썼거든.”
“진짜? 그게 가능해?”
“우리 길드가 영웅부 고위 인사들과 연이 좀 있어.”
“우와…….”
친구는 생각보다 큰 나이프의 영향력에 새삼 놀랐다.
옆에 있으면 콩고물이 떨어질 때가 많아서 문경진에게 붙어 있는 것인데.
앞으로 문경진과 더욱 친하게 지내야겠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
“주용 씨. 수고 많으셨어요.”
“으흑! 가지 마요, 유리 씨…….”
3급 승급의 3차 시험이 마무리되고.
임시로 결성되었던 파티는 해체되어 모든 영웅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합격한 파티를 호명하겠습니다.
전원이 합격점을 받은 유지한 파티는 3차 시험에서 살아남았다.
유지한과 잠깐이나마 함께했던 정영욱의 파티도 마찬가지였다.
“이럴 수가!”
안타깝게도 민주용 파티는 합격 파티 명단에 들지 못했다.
파티원 중에 절반을 넘는 인원이 합격 기준에 들지 못한 것이다.
“제발 다시 평가해 주세요!”
—탈락한 파티는 퇴장해 주십시오.
“안 돼애!”
탈락 후 난동을 부릴 것 같던 민주용은 같은 파티원에게 팔다리가 붙들려 시험장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끌려가는 중에도 민유리를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유지한으로 하여금 집착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했다.
—마지막 면접 심사는 내일 오후 1시부터 진행될 예정입니다.
3급까지 남은 과정은 이제 면접뿐.
시험을 끝내고 사무실로 돌아간 유지한 파티는 늦은 밤까지 면접을 준비하며 내일을 기다렸다.
그런데 다음 날.
면접 심사에 참여하기 위해 영웅부로 출근한 양지철은…….
상사로부터 새로운 소식을 접했다.
“오늘 3급 면접에 파견될 예정이었던 영웅이 못 온다고요?!”
“일정이 해외 출장이랑 겹쳐서 도저히 시간이 안 된다네.”
“아니, 그러면 어제 미리 말을 하던가…….”
“급하게 변경된 중요한 일정이라 참석이 어렵다나 봐. 일단 그 길드에는 벌점을 내리기로 했어.”
길드에 불이익이 오는 걸 감수하면서까지 오지 못하겠다고 하다니.
양지철은 약속을 저버린 영웅을 떠올리며 궁시렁거렸다.
‘빌어먹을 관습!’
영웅 파티의 승급 시험에 면접이 포함되는 것도.
면접에 공무원이 아닌 외부 영웅이 들어오는 것도.
전부 다 영웅부 설립 초기에 만들어진 규정이었다.
혼란스러웠던 시기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영웅들의 평균적인 수준은 과거보다 높게 올라왔고.
평범한 공무원들도 영웅 본인만큼이나 영웅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과거에 만들어진 규정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아무리 공정성을 위한다고는 하지만 면접관으로 참여하는 영웅은 너무 큰 권한을 가졌다.
이에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으나, 오래된 관습으로 굳어진 탓에 당장 변화의 조짐은 없었다.
‘길드의 로비가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외부 면접관은 보통 영웅부 고위 임원들이 직접 추천하고 선정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특정 길드가 임원에게 돈이나 아티팩트 따위의 대가를 지급하는 등, 로비가 이뤄진다는 소문이 있었다.
정권이 바뀌더라도 어지간해서는 교체되지 않는 영웅부의 고위 임원들.
규정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어쩌면 그들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신할 영웅 왔으니까 지철 씨가 안내 좀 해 줘.”
“다른 영웅이요?”
“저기.”
양지철은 몸을 돌려 뒤를 돌아봤다.
험상궂은 인상에 검은 콧수염을 가진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
양지철은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눈을 크게 떴다.
곧 가까이 다가온 남자가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
“으하핫! 오늘 파견 온 지강석입니다!”
지강석.
2급 영웅인 그는 나이프를 대표하는 문경구 파티의 전사이자.
길드장인 문경구의 오른팔로 불리는 영웅이었다.
‘왜 하필이면 나이프의 영웅이야…….’
양지철을 향해 악수를 요청하는 지강석.
악수를 받은 양지철은 과거 자신이 중재했던 나이프와 꿀잼 간의 분쟁을 떠올리며 어색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