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3급 (8)
—지금부터 대련을 시작하겠습니다.
—전달받은 스티커를 복부 부근에 붙여 주세요.
영웅들은 영웅부 관계자에게서 숫자가 쓰여 있는 직사각형 모양의 스티커를 전달받았다.
흰색 바탕에 각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이름표였다.
—장비는 각자 챙겨 오신 것을 사용해도 좋습니다.
무기 사용에 특별한 제한은 없었다.
4급 승급 때와는 달리 목검 같은 비살상무기를 빌려 사용하는 게 아닌 것이다.
—각 영웅은 대련 도중 항복을 선언할 수 있습니다.
—항복을 선언한 영웅은 그 즉시 대련장에서 퇴장해야 하며, 해당 대련이 끝난 후 다음 대련에는 참여할 수 있습니다.
—상대측에게 완전히 제압된 영웅 또한 심판에 의해 퇴장당할 수 있습니다.
…….
…….
대련에 앞서 각종 규칙들이 설명되고.
곧 지하에 마련된 대련장에서 대련이 준비되었다.
첫번째 대련에 나온 건 김시후가 포함된 2번 파티였다.
마법사 1명에 전사가 3명인 파티.
유지한과 다르게 포지션이 나름 괜찮게 주어진 임시 파티였다.
스윽—
머리에 쓴 모자가 떨어지지 않도록 아래로 잡아당기는 김시후.
그는 고개를 돌려가며 자신을 지켜보는 유지한과 민유리를 찾아다녔다.
이내 두 사람을 보고 밝게 웃는 그의 모습은 그닥 긴장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시작!”
심판의 외침과 함께 대련이 시작됐다.
빠르게 앞으로 치고 나가는 전사들!
상대 또한 전사에 집중된 파티로 근접거리에서 두 파티의 공방이 이어졌다.
쿵!
쿠웅!
그렇게 전사들이 치열하게 앞을 막아서는 사이.
김시후는 후방에서 상대측에게 공격 마법을 난사했다.
[윈드 애로우]
[윈드 커터]
같은 편과 상대가 서로 얽혀서 중구난방으로 싸우고 있기에.
그가 선택한 마법은 규모가 큰 마법보다는 확실하게 제어할 수 있는 마법들!
직선이 아니라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간 마법들은 정확히 상대편만을 괴롭히며 피해를 입혔다.
“큭!”
김시후의 마법에 방해받던 탱커가 짜증을 내며 뒤로 크게 물러나는 순간.
[스톤 해머]
콰앙!
탱커의 위쪽에 생성된 돌망치가 그의 머리를 세게 두드렸다.
단단해 보이는 투구를 쓰고 있었음에도 그는 머리로 전해진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기절해 버렸다.
“박임찬 퇴장!”
한 명이 무력화된 뒤의 상황은 순조로웠다.
김시후가 포함된 2번 파티의 공세를 버티지 못한 1번 파티는 서서히 무너져내렸다.
마지막에 홀로 남은 전사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했지만.
“……항복하겠습니다.”
전사들이 주위를 둘러싼 상황에 촉이 날카롭게 벼려진 윈드 애로우가 목 앞에 멈춰 서자, 그는 양손을 들며 항복을 선언했다.
대련장을 나서는 이들을 보며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저기 모자 쓴 마법사 실력이 괜찮다.”
“그 영화에 출연했던 사람이잖아.”
“아, 그게 저 사람이었구나.”
이 대련에서 승리에 가장 공헌한 것은 누가 보더라도 마법사 김시후였다.
주변에서 파티원을 향한 칭찬이 들리자 유지한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다음 대련을 진행하겠습니다.”
첫 번째 대련 이후 몇 차례의 대련이 이어졌다.
본래의 파티가 아니라 낯선 이들과의 조합으로 전투에 나서는 영웅들.
“9번 파티 승리!”
“나이스!”
승자와 패자가 나뉘어 서로 울고 웃는 사이.
어느새 유지한이 속한 7번 파티의 대련이 다가왔다.
“후우, 후우……”
“망했다……!”
대련장에 들어온 마법사들은 크게 긴장한 모양새였다.
유지한이 아무리 진정하라고 말해도 처음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태도였다.
‘저쪽은 조합이 좋네.’
유지한은 대련 상대인 9번 파티를 바라봤다.
전사, 마법사, 궁수, 탱커가 각각 한 명씩 존재하는 파티.
포지션 별로 인원이 분배되어 운이 아주 좋은 케이스였다.
파티 인원이 랜덤으로 배정되었다고는 하지만 불합리하게 여겨질 정도.
상대측을 주시하던 유지한이 임시 파티원들을 향해 말했다.
“제가 말한 거 기억하죠?”
“……네.”
“긴장 풀고 그대로만 갑시다.”
잠깐의 준비 시간이 주어지고.
유지한은 상대측을 노려보며 심판의 신호가 떨어지길 기다렸다.
“시…….”
그리고 닫혀 있던 심판의 입술이 열림과 동시에.
“작!”
유지한은 곧장 옆으로 몸을 날렸다.
[파이어리 터치]
[워터 블래스트]
[아이스볼트]
유지한이 몸을 날리기 무섭게, 그의 뒤에 있던 3명의 마법사가 순식간에 공격 마법을 완성하여 앞으로 날렸다.
그들이 준비한 플랜 A.
속공(速攻)이었다.
“어?”
“헉!”
대련이 시작되자마자 날아오는 마법에 상대측 파티는 크게 당황했다.
하지만 탱커는 침착하게 방패를 들고서 앞으로 나섰다.
전사 또한 뒤늦게나마 그의 옆으로 합류하여 마법으로부터 원거리 딜러들을 보호했다.
쿠르르릉!
마법사들은 쉴새 없이 불덩이를 던지고 번개를 쏘아 내는 등 공격을 이어 갔다.
그 사이, 미리 마법의 범위에서 벗어났던 유지한은 탱커와 전사를 피해서 그 뒤에 있는 마법사와 궁수를 노렸다.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원거리 딜러들을 먼저 처리하려는 것이다.
“안 돼!”
하지만 전사의 개입으로 기습 공격이 막혔다.
그는 마법으로 인한 피해를 어느 정도 감수하면서까지 원거리 딜러들을 보호했다.
‘기세가 좋네.’
유지한은 급하게 달려드는 전사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황급히 자신의 검을 들어 올려서 막아보려는 전사였지만.
그보다는 유지한의 공격이 더 빨랐다.
“읏!”
“안대진 퇴장!”
단 한 번의 공격.
그것으로 유지한의 검이 전사의 복부 앞에서 멈추고.
승부가 났다고 판단한 심판은 그를 대련장에서 퇴장시켰다.
시작부터 여유롭게 상대를 처리한 유지한이었다.
“흐아압!”
[도발]
전사를 잃고 다급해진 상대측 탱커는 방패를 땅에 꽂아 넣으며 도발 스킬을 사용했다.
도발은 실패 확률이 있지만, 몬스터뿐만 아니라 지성을 가진 인간에게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는 스킬.
그에 걸려든 마법사들은 몸을 움찔하더니 이내 공격 마법의 목표가 원거리 딜러들에서 탱커의 방패로 바뀌었다.
“정신 차려!”
한편,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던 정영욱은 지팡이를 세로로 크게 휘둘렀다.
파앙!
그의 지팡이에서 터지듯이 퍼져나간 마력의 기운이 주변을 감쌌다.
그러자 도발에 걸렸던 마법사 2명이 정신을 되찾았다.
‘호오.’
유지한은 정영욱의 효과적인 대처를 보며 놀랐다.
상대에게서 낌새가 보이자마자 일부러 입술을 깨물어 통증을 주는 것으로 도발 스킬의 영향에서 빠르게 벗어나고, 뭉친 마력을 터트려서 주변을 챙기는 것까지.
한차례의 대련을 겪었었지만 역시나 상당한 실력을 보유한 마법사 정영욱이었다.
아마 김시후가 이 자리에 있었어도 비슷한 대처를 했겠지.
“죄, 죄송합니다!”
“앞에 보세요!”
[아이스 월]
정영욱은 멀리서 날아오는 화살 따위의 공격을 얼음의 벽으로 막아 냈다.
적재적소에 솟아나는 마법들은 각종 공격으로부터 다른 파티원을 지켜주기에 충분했다.
“흡!”
유지한은 정영욱의 마법 뒤에 숨어서 날아오는 공격들을 피한 뒤.
상대측 탱커의 옆을 노리며 재빠르게 달려들었다.
앞에서는 마법들이 날아오고, 옆에서는 유지한의 검이 들이닥치는 상황!
우왕좌왕하던 탱커는 평정을 잃고 방패를 들어 올렸다.
[실드 배시]
커다란 방패에 짙은 마력이 실리고.
이내 그것이 유지한을 멀리 밀어내려는 듯이 앞으로 뻗어졌다.
하지만 너무 뻔한 움직임이었던 탓에, 유지한이 살짝 옆으로 이동한 것만으로 공격은 허무하게 빗나가고 말았다.
“컥!”
유지한에게 옆구리를 세게 차인 탱커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이내 쓰러진 탱커의 목에 검을 겨누자 심판이 소리쳤다.
“신정태 퇴장!”
“이럴 수가…….”
대련 시작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이 넘치던 전사에 이어서 경력 3년차의 탱커까지!
보호막을 모두 잃은 마법사와 궁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
김시후는 대련장 밖에서 유지한의 대련을 지켜보고 있었다.
‘거의 끝났네.’
대련을 거의 끝에 다다랐다.
지켜줄 파티원이 사라진 마법사와 궁수는 서로 붙어 있지 않고 대련장을 분주하게 뛰어다니기 바빴다.
“잡았다.”
“허억!”
유지한의 추격과 두 사람을 노리고 쏟아지는 마법들.
그 사이에서 도망칠 방법이 사라진 상대측은 결국 완전히 항복을 선언했다.
“이겼다!”
“와……. 이걸 이겼구나.”
후방에서 공격 마법에만 집중하던 마법사 2명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 대련에서 가장 많은 마법과 마력을 사용한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대련장을 주시하던 이들의 시선은 주로 유지한을 향해 있었다.
“저기 앞으로 나온 전사가 혼자 다 해 먹었네.”
“영화를 괜히 찍은 건 아닌가 봐.”
“뒤에 있던 마법사도 썩 괜찮더라.”
여러 영웅들이 관심이 그들에게 집중된 와중.
김시후는 복잡한 마음으로 정영욱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긴 원래 내 자리인데…….’
원래대로라면 자신이 있어야 할 마법사 포지션에 대신 들어간 정영욱.
친구의 도움으로 유지한이 대련에서 승리한 게 기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조금 복잡했다.
내 자리를 뺏긴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니야.’
김시후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런 생각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임시로 이뤄진 파티일 뿐이었으니까.
‘오히려 좋아해야지.’
실력이 부족한 마법사가 그를 보조하는 것보다는 정영욱과 함께인 것이 훨씬 더 좋은 조합이었다.
그렇기에 웃으며 박수를 보내는 김시후였다.
“……?”
정영욱이 김시후와 눈을 마주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김시후가 자기를 보고 있다는 걸 눈치챈 그는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더니.
일부러 유지한에게 다가갔다.
짝!
이내 한쪽 손을 들어서 유지한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정영욱.
승리 후의 작은 세레모니 같은 행동이었다.
“…….”
그런데 그 모습이 마치 진짜 같은 파티라도 되는 것처럼 너무 잘 어울려 보이는 탓에.
밖에서 지켜만 보던 김시후는 저도 모르게 박수를 멈췄다.
‘왜 갑자기 그때 기억이…….’
어째서인지 지금 이 광경을 보면서.
종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소외받았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김시후였다.
*****
대련을 끝낸 유지한은 대련장을 빠져나왔다.
예상치 못한 승리인 듯, 공격을 맡았던 마법사 2명은 상당히 기뻐하고 있었지만.
유지한은 다음 대련이 걱정이었다.
‘저 두 사람이 마력을 생각한 것보다 많이 썼어.’
총 3번의 대련이 예정되어 있는데 첫 번째 대련에서 저들은 지나칠 정도로 마력을 많이 소모했다.
마력이 자연 회복되기에는 시간이 촉박하기 때문에, 다음 대련에서 지금과 같은 상황이 나왔다가는 수세에 몰릴 수도 있었다.
유지한이 그것에 대해 고민하는 순간이었다.
“지한이 형!”
김시후가 그에게 다가왔다.
“형! 이겨서 다행이에요.”
“고맙다.”
“그런데 형, 있잖아요.”
“응?”
“방금 대련에서요…….”
유지한에게 말을 걸던 김시후는 정영욱이 있는 쪽을 힐끔거렸다.
“뭐가?”
“그게 그러니까…….”
“……?”
“영욱이가 저보다, 그…….”
계속 말끝을 흐리는 김시후였다.
유지한은 그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지만.
끝내 문장을 완성하지 못한 김시후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