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영화 감독
유지한 파티원들은 휴지와 물티슈를 이용해 몸을 가볍게 닦았다.
허나 외부로 배출된 노폐물들은 몸과 옷 이곳저곳에 남아 있는 상태.
완전히 씻어 내려면 목욕과 세탁 밖에 답이 없었다.
‘앞으로 영약은 화장실에서 먹어야겠는데.’
옷에 묻어난 검은 찌꺼기는 손으로 아무리 털어 봐도 떨어지지 않았다.
다음부터는 더 주의해서 영약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유지한이었다.
“빨리 끝내고 가죠.”
김시후는 노트북의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길드 현황에서 당장 중요하지 않은 내용을 빠르게 넘겼다.
그리고 노트북을 다시 닫던 그때였다.
“시후야. 그리고 지한 씨.”
“예.”
민유리가 파티의 두 사람을 호출했다.
살짝 긴장한 표정이었다.
“두 사람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뭐든 말씀하세요.”
“조금 전에 먹은 영약……. 제 몫을 조금만 떼서 가져가도 될까요?”
민유리는 괴추괴삼청을 외부로 가져가고 싶다는 부탁을 했다.
유지한은 청이 들어 있는 유리병을 힐끗 바라봤다.
영약은 개인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길드 전체의 자산.
그것을 섭취하는 게 소속 길드원일지라도, 먹지 않고 외부로 가져간다는 건 원칙상으로는 불가능한 요청이었다.
타인에게 판매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악용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어디에 사용하시려고요?”
“동생 때문에요. 다름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거 같아서…….”
민유리는 마력 변색 증후군으로 쓰러진 동생에게 영약을 먹이기 위해서 가져가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유지한은 부탁을 듣자마자 그녀의 의도를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그녀가 딱히 돈이 궁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안 될까요?”
마른 입술을 핥는 민유리.
유지한과 김시후는 잠깐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 뒤에 피식 웃어 버렸다.
서로 같은 생각이라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그리 어려운 부탁은 아닙니다.”
“정말로요?!”
“예. 필요하다면 제 몫도 드릴 수 있고요.”
“저도요!”
“그, 그건 너무 부담스러운데…….”
유지한과 김시후가 자신의 몫까지 기꺼이 주겠다고 하자, 민유리는 고개를 저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렇지만 그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영약을 양보하겠다는 그들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당장 드릴 수는 없어요. 영약이 아까운 게 아니라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았으니까요. 담당 의사 분과도 이야기를 나눠 봐야 할 테고.”
“아…….”
마력을 가진 영웅이 아니라 일반인이 영약을 섭취하는 것에 관련된 연구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뚜렷한 효과나 부작용이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것이 현실이었다.
‘생각이 짧았어.’
혹시라도 섭취 후에 몸에 부담이 된다면, 먹지 않은 것만 못할 것이다.
민유리는 너무 섣부르게 행동하려던 자신을 탓했다.
뭐든 간에 동생과 관련된 일이라면 냉정을 잃어버리는 그녀였다.
“이건 제가 카지미르와 따로 논의해 볼게요. 환자에게 영약을 먹여도 되는 것인지.”
“아, 정말 감사해요.”
민유리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두 사람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정리할까요?”
잠시 후 자리의 모두가 슬슬 퇴근할 준비를 했다.
우우웅—
그때 유지한의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누군가의 메시지였다.
[안녕하세요. 유지한 씨 번호가 맞나요?]
처음 보는 번호의 메시지.
유지한은 누구시냐고 답장을 보냈다.
[저는 영웅 영화를 제작하는 감독 하성태라고 합니다. 얼마 전 청영사에 있는 친구 석우로부터 우연찮게 유지한 파티의 영상을 접하게 되어 이렇게 연락드립니다. 혹시 영웅 영화를 촬영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지…….]
*****
평일이 끝나고 돌아온 주말.
유지한은 김시후와 함께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쪽인거 같은데.”
도착한 곳은 작은 아파트 단지 앞.
휴대폰에 적힌 정확한 주소를 따라 이동하자 목적지가 나왔다.
[HST 스튜디오]
평범한 아파트의 문 앞에 달려 있는 작은 팻말.
찾던 장소가 맞는 모양이었다.
띵똥—
벨을 누르자 안쪽에서 누군가 부리나케 달려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유지한 씨?”
“예.”
“아, 안녕하세요!”
HST 스튜디오의 문을 열어 준 것은 긴 앞머리를 머리띠로 넘기고 안경을 쓴 30대 중반의 남성.
얼마 전 유지한에게 메시지를 보냈던 하성태였다.
유지한과 김시후는 그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우와…….’
바닥 여기저기에 늘어진 과자 포장지와 비닐 쓰레기들이 보였다.
비닐 겉면에는 대부분 배달 음식점의 로고가 적혀 있었다.
정리되지 않은 자취방같은 모습에, 김시후는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여기가 사무실이에요?”
“살고 있는 집을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어요.”
하성태는 바닥의 쓰레기들을 발로 대충 치우면서 거실로 이동했다.
유지한과 김시후는 그나마 멀쩡한 소파 위에 앉았다.
“바쁘실 텐데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뇨! 오히려 오늘 제 사무실에 방문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오늘 HST 스튜디오를 방문한 이유.
영웅의 활동을 영상으로 제작한다는 하성태가 유지한 파티에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영웅 영화. 혹은 히어로 무비.
기존에 유행하던 가상의 캐릭터들이 아니라 현실의 영웅들을 조명하는 영상을 뜻하는 말이다.
최근 상당히 인기 있는 콘텐츠로 떠오르는 것 중에 하나였다.
영화라고 해봤자 보통은 1편당 길어도 30분 남짓의 영상에 불과했지만.
영웅들이 개인방송에서 현장의 영상을 송출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게, 영웅 영화계는 완성된 영상을 추구하는 시장이었다.
김시후는 들고 있던 휴대폰의 화면을 하성태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걸 제작하셨다고 들었어요.”
“네. 그건 제가 만든 영상이 맞습니다.”
화면에 떠오른 것은 일반인들이 영상을 업로드 하는 플랫폼, 뷰튜브의 영상 중 하나.
하성태는 그 뷰튜브에서 HST 스튜디오라는 채널을 운영하며 영웅 영화의 트레일러만으로 20만 구독자를 끌어 모은 인물이었다.
그 외로는 몇 개의 단편 영화를 직접 촬영, 제작한 영화 감독이기도 했다.
“진석우 씨가 저희의 영상을 보여 주셨다고…….”
“허가 없이 영상을 본 것에는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뇨. 딱히 사과 받을 일은 아닙니다.”
유지한은 고개를 저었다.
청영사에서 활동하며 지원을 받는 이상, 자신들의 활동이 미디어나 외부로 퍼져 나가는 건 감안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성태 씨의 제안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요.”
“네!”
하성태가 유지한 파티에게 건넨 제안.
바로 유지한 파티의 활약상으로 영웅 영화를 제작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영화를 찍고 싶다고요?
제안을 받은 유지한은 처음에 조금 당황했다.
하성태란 사람이 관심을 보인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왜 저희를 선택하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이전에 백화점에서 촬영하신 영상은 교육에 사용하기 위해서 찍은 거라고 하셨죠?”
“예.”
“제대로 된 촬영 여건이 아닌 걸 감안해도 영상미가 아주 좋았습니다. 저는 거기서 여러분의 가능성을 봤어요!”
하셩태는 무척 흥분한 목소리였다.
처음에 진석우가 하성태에게 공유해 준 건 약 5분 길이의 영상.
바쁘게 일하던 도중 잠시 휴식을 취하며 봤던 그 짧은 영상에서, 그는 유지한 파티의 가능성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이건 먹힌다!’
영웅에 익숙하지 않은 대중들도 좋아할 만한 활약상.
파티의 마스코트가 될 수 있는 커다란 펫의 존재.
그 외에 외모적인 부분이나 여러 요건을 고려했을 때 유지한 파티는 영화의 주인공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하성태는 판단했다.
“지금까지 3급 이상의 파티로만 영상을 만드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지만, 사실 등급은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음…….”
“딱 한 번만 저를 믿어 주시면 좋은 영상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하성태가 주먹을 꽉 쥐며 자신 있는 목소리로 외쳤다.
반면 김시후는 고민되는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조금 부담이 느껴져요.”
“어떤 말씀인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만약 영화가 흥행해서 얻게 되는 유명세는 여러분의 활동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영웅계에는 영웅 영화를 통해 유명해진 파티들이 몇 개 존재한다.
그중에는 이름도 없는 무명 파티가 대중들의 많은 관심을 받으며 빠르게 성장한 경우도 있었다.
영화로 얻은 유명세가 현실에서 많은 도움이 된 것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잖아요?”
그런데 그런 영웅들은 실제 역량보다 실력이 부풀려진다는 소문이 있다.
영화는 조금 더 멋진 장면을 위해 수정되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전사가 검을 휘두를 때 찰진 효과음을 삽입하고, 마법에 화려한 CG 처리를 하여 더 강력한 마법처럼 연출하기도 한다.
조금 더 보기 좋은 영상을 위해서였다.
‘<3급 파티가 너무 강함> 시리즈도 CG때문에 말이 많았는데.’
영화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들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지만.
영웅 영화는 인물들이 현실에서 활동하는 영웅인 만큼, 출연진들의 실력에 대해 논란이 일어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그건 출연진들의 능력이 실제로 부족한 경우죠. 저는 여러분은 다르다고 믿고 있습니다.”
“어……. 그건 그렇지만요.”
“결코 과장되지 않은, 현장의 생생함을 담아 낸 영화를 만들 겁니다.”
반면 하성태가 추구하는 영웅 영화는 조금 달랐다.
화려함보다는 현실적인 면을 더 강조하여 영웅들의 노고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 그의 목표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딱히 흥행을 위한 영화를 만드는 부류는 아니었다.
그저 만들어 낸 결과물에 흥행이 따라오는 것뿐.
하성태의 뷰튜브 채널을 둘러보던 유지한은 그에게 말했다.
“기왕 영화를 찍을 거면 저희보다 3급이나 2급 파티가 더 좋지 않아요?”
“사람들은 언제나 누군가가 성장하는 이야기를 참 좋아합니다. 4급이었던 파티가 3급으로, 그리고 역경을 이겨 내고 2급에 도달하는 이야기가 있다면……. 아마도 다들 보고 싶어 할걸요?”
막힘없는 하성태의 대답에 유지한은 머리를 긁적였다.
어째서인지 그는 유지한 파티가 2급까지 오른다는 걸 확신하는 느낌이었다.
“저와 같이 영화 한 편만 찍어 보시죠! 제 이름을 걸고 진짜 볼만한 영화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영화 감독 하성태의 눈이 열정으로 불타올랐다.
마치 열혈 만화에나 나올 법한 주인공의 눈빛이었다.
‘이 사람 진심이네.’
결국, 유지한과 김시후는 자리에 오지 못한 민유리와 통화를 연결하면서까지 논의를 이어 갔다.
“영화는 어떤 방식으로 상영되는 거죠?”
“1분에서 3분 내외의 짧은 트레일러 영상은 뷰튜브 채널에 올리고, 실제 영화는 사람들이 돈을 지불하고 시청할 수 있게끔 할 겁니다.”
하성태에게서 계약 조건을 들어보니 영화를 통해 발생하는 수익 배분 조건도 썩 나쁘지 않아보였다.
그리고…….
“잘 부탁합니다.”
“넵!”
유지한 파티는 끝내 영화 촬영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생각지도 않던 영화 배우가 되는 순간이었다.
*****
주변에 볼거리가 전혀 없어서 사람들의 발걸음이 잘 닿지 않는 거리.
그곳에 있는 오래된 빌라의 3층.
한 사무실 안에서 어느 남자들이 대화를 하고 있었다.
“야 이 덜떨어진 새끼야.”
빡!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자기 앞에서 양손을 모으고 있는 부하 직원의 볼때기를 때렸다.
큰 충격에 몸이 잠깐 휘청거린 부하는 다시 자세를 잡으며 고개를 낮게 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해? 죄송하면 문제가 해결돼?”
빡!
찢어진 부하의 볼에서 피가 흘렀다.
그럼에도 부하는 고개를 들어올리지 못했다.
옆에 있는 다른 부하들은 처음부터 계속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어후! 분이 안 풀리네.”
“죄송합니다!”
“옆에 있는 니들도 마찬가지야! 니들 때문에 거래도 날아가고 고객들도 날아가고……. 상황이 아주 엿 같아졌어. 위에서 나한테 대체 뭐라고 하는지 알아?”
남자는 욕설을 섞어 가며 부하들을 꾸짖었다.
그들은 모두 독나비라는 조직의 조직원들.
독나비는 음지에서 활동하는 뒷세계 조직 중 하나로, 여기 모인 남자들은 조직에서도 주로 인신매매를 다루는 팀에 속해 있었다.
“우릴 방해한 놈을 찾으라고 지시한 게 얼마나 지났지?”
“…….”
“내가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유지한이 릭시스 오르야라는 이종족을 이들로부터 구해낸 이후, 독나비로 들어오는 거래들은 뚝 끊겨 버렸다.
조직원 몇 명은 감옥으로 잡혀 들어갔고 최근에는 경찰의 감시가 심해진 덕분에 상품을 구하는 일도 한층 더 어려워졌다.
조직의 상층부에서는 이번 일을 방해한 놈을 찾으라고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된 정보 하나 들어오지 않은 상황이었다.
“형님!”
그때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며 다른 부하 직원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형님으로 불린 양복의 남자는 문 쪽으로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내가 적어도 1시간은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드디어 찾았어요!”
“뭘?”
“그때 우릴 방해한 놈이요!”
“……!”
모두의 고개가 문 쪽으로 돌아갔다.
“찾았다고?”
“네! 제가 간신히 경찰 하나를 꼬드겨서…….”
“시끄럽고. 그놈이 누군데?”
“여기 있습니다!”
부하 직원이 하얀색 종이 한 장을 앞으로 내밀었다.
양복의 남자는 그 종이를 받아 들고서 읽었다.
“……유지한?”
종이에는 꿀잼 길드의 유지한과 관련된 간략한 정보가 적혀 있었다.
돈을 먹인 현직 경찰이 건네준 것이니 확실한 정보일 터.
“그래, 이놈이라 이거지.”
모든 내용을 꼼꼼하게 읽은 남자는 손에 힘을 주고 종이를 구겨 버렸다.
이놈을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다는 맹세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