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소문 (3)
뜬금없이 가르침이라니.
다소 이해하기 힘든 발언에 유지한이 되물었다.
“혹시 나한테 대련을 요청하는 거야?”
“맞습니다.”
배태준이 말하는 가르침이라는 건 바로 대련 요청이었다.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지만…….’
유지한은 자신의 파티원들을 돌아봤다.
두 사람은 배태준의 요청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파티전을 원해?”
“꼭 파티전이 아니어도 됩니다. 선배님과의 개인전도 좋습니다.”
“음……. 개인전 정도는 괜찮을지도.”
유지한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한 일대일 대련이라면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잠깐 이것만 끝내고 가도 괜찮지?”
“네.”
“저희도 구경할게요.”
김시후와 민유리는 구경꾼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유지한은 배태준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나한테 대련을 요청할 줄은 몰랐네. 청영사에는 나 말고도 훌륭한 영웅들이 많은데.”
“유지한 선배님은 김현태 선배님과 비교될 정도로 케로즈에 오래 계셨으니까요. 배울 게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
김현태의 이름이 언급되자 유지한은 입을 다물었다.
‘김현태한테 뭘 듣고 온 건가?’
이것은 과연 순수한 대련 요청일까.
배태준의 의도를 조금 의심하는 유지한이었다.
*****
배태준과 유지한은 대련장에 이용 신청을 넣은 뒤 잠시 기다렸다.
앞서 진행 중인 대련이 있었기 때문에 약간의 대기시간이 있었다.
다행히 거의 끝나가고 있었기에 다음 대련은 금방 진행할 수 있을 터인데…….
“……?”
차례를 기다리고 있으니, 대련장 주변이 조금씩 어수선해졌다.
갑자기 여기저기서 사람이 몰려오고 있었다.
‘응?’
대련장 앞에서 걸음을 멈추는 사람들.
유지한은 눈을 좁히며 주변을 돌아봤다.
훈련소에서 다른 훈련을 진행하던 영웅들이나 훈련소로 새로 입장하는 파티까지, 다들 대련장 앞에서 걸음을 멈춰 섰다.
“여기서 되게 재밌는 거 한다던데?”
“싸움 구경을 놓칠 수는 없지.”
“누구랑 누가 싸운다고?”
…….
…….
적지 않은 수의 구경꾼들이 대련장 앞으로 몰렸다.
청영사 동기로 보이는 사람들부터 다소 낯선 얼굴도 있었다.
당장 안에서 대련을 진행하던 사람들도 예상치 못한 구경꾼들을 보고 적잖게 당황한 모양이었다.
유지한은 옆에 서있는 배태준을 향해 말했다.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졌지?”
“글쎄요…….”
약간 당황한 얼굴을 보이는 배태준.
배태준 또한 사람이 모인 이유를 모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꽤 많이 모였군. 이 정도면 되겠어.’
사람들을 불러 모은 건 바로 배태준 파티였다.
유지한이 대련 요청을 승낙한 순간, 미리 위층에서 대기하고 있던 바람잡이들에게 연락해서 사람들을 훈련소로 불러 모은 것이었다.
김현태의 지시로 최대한 많은 이들의 앞에서 유지한이 패배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는 계획.
당연하게도 유지한이 그런 사실을 알 수는 없었다.
‘판이 너무 커진 느낌인데.’
앞서 진행 중이던 대련은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구경꾼이 늘어서인지 부담을 느끼고 일부러 끝내 버린 듯했다.
“다음 대련, 배태준님과 유지한 님. 들어오십시오.”
유지한은 배태준과 함께 대련장에 진입했다.
그러자 구경꾼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저 사람들인가 봐.”
“얼마나 잘하는지 볼까.”
대련장 관계자들은 센서를 몸에 붙여 주며 간단한 주의사항을 말했다.
이전에도 몇 번이나 들었던 내용이었다.
“형! 힘내세요!”
“화이팅!”
구경꾼이 늘어난 탓인지 김시후와 민유리는 각자 응원을 보내왔다.
칠라는 언제나 그렇듯 유지한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너한테 가르침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
“한 수 부탁드립니다.”
챙!
가까이서 악수하듯 검을 맞부딪친 유지한과 배태준이 서로 거리를 벌렸다.
“…….”
“…….”
주변에서 떠드는 소리가 모두 멎고.
대련장에서 유지한과 배태준의 대치가 이어졌다.
누군가가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상대도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그러던 중 먼저 앞으로 달려든 것은 배태준이었다.
[황소의 돌격]
쿵! 쿵! 쿵! 쿵!
스킬을 이용한 돌진.
마력이 실린 발바닥이 번갈아 땅을 밟을 때마다 대련장의 땅이 약하게 울려 퍼졌다.
마치 커다란 황소가 뛰어가는 듯한 존재감!
그렇게 달려온 배태준이 유지한에게 검을 휘두르기 직전.
휙!
유지한은 주저 없이 몸을 오른쪽으로 던졌다.
매우 직선적인 움직임을 보여 준 배태준은 그를 따라가지 못하고 빈 공간에 도달했다.
“쳇!”
바로 앞에서 유지한을 놓친 배태준이 자리에 정지했다.
이내 몸을 돌린 그가 유지한을 쫓아가 검을 휘둘렀다.
채앵!
서로의 검이 충돌하자 충돌 부위에서 약간의 불꽃이 튀어나왔다.
무기의 품질로 밀리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챙! 챙! 챙! 챙! 챙!
힘 겨루기가 이어지는 대신 서로에게 공격이 쏟아졌다.
잠깐의 여유도 없이 이어지는 연속 공격들.
주로 공격하는 쪽은 배태준이었다.
“흡!”
챙! 챙!
순식간에 10번이 넘어가는 공방이 이어졌다.
그게 20번, 30번을 넘기는 데는 고작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내 공격이 막힌다고?’
계속해서 공격이 막히자 배태준이 인상을 확 찌푸렸다.
돌진기를 이용해 적에게 빠르게 접근한 뒤 이어지는 연속 공격은 그가 자랑하는 기술 중 하나다.
숨돌릴 틈도 없이 쏟아 내는 연격으로 이제껏 많은 적들을 물리쳐 왔다.
동급의 전사라면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을 자신을 가진 배태준이었다.
“……!”
그러나 유지한은 그 모든 공격을 쳐내고 있었다.
심지어 검을 막아 내는 와중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어떻게 이 상황에서 저렇게 태연한 표정을 지을 수 있지?
“우오오오!!”
배태준은 의문을 가졌지만, 기합을 지르며 더 힘껏 공격을 쏟아부었다.
구경꾼들의 사이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저 사람 케로즈라고 했나?”
“소문대로 괜찮은 길드인가 봐.”
배태준이 앞으로 조금씩 전진했다.
그럴 때마다 유지한은 뒤로 조금씩 물러났다.
삑! 삑! 삑!
[0:3]
벌어지는 점수와 함께 점점 유지한의 등과 가까워지는 대련장의 벽.
언뜻 보기에는 유지한이 조금씩 밀리는 모양새였다.
챙!
하지만 유지한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침착하게 검의 궤도를 계산하며 공격을 흘려보냈다.
아주 거칠게 검을 휘두르는 배태준과 달리, 그는 몸의 체력을 보존하며 적절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칠게 공격을 하는 쪽과 효율적인 움직임으로 막아 내는 쪽.
당연하게도 체력이 소모되는 정도는 크게 차이가 있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배태준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어째서인지 공격이 닿지 않는다.
연신 검을 휘두른 탓에 손과 팔은 점점 얼얼해지고 있었다.
대치가 길어지면 더 큰 손해를 보는 쪽은 배태준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었다.
이 연격이 실패로 끝나는 순간, 위기가 찾아올 거라고 직감했기에.
——걘 별 거 못하는 쓰레기야. 적당히 가지고 놀아.
이만큼이나 공방이 오갔으면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건 케로즈에서 김현태 선배에게 전해 들었던 얘기와는 달랐다.
‘대충 이 정도군.’
차분하게 대응하면서 상대의 실력을 가늠해낸 유지한.
그가 기습적으로 검을 크게 휘둘렀다.
채앵!
“큿!”
힘이 조금 빠진 배태준의 검이 바깥쪽으로 튕겨 나갔다.
그는 어떻게든 검을 놓치지 않도록 손잡이를 꽉 붙잡았지만.
유지한은 그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삑! 삑! 삑!
[3:3]
유지한이 공격을 개시함과 동시에 점수는 순식간에 동점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득점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챙! 챙! 챙!
이번에는 유지한이 배태준에게 연격을 날리기 시작했다.
당황한 배태준은 어떻게든 공격을 쳐내려고 했지만.
전부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배태준의 허리를 공격하면 유효타로 들어갈 확률>
<89%>
“허리가 비었어.”
“뭐?”
친절하게 말로 예고까지 하면서 가해진 공격.
배태준은 그 공격을 막지 못했다.
삑! 삑! 삑!
[6:3]
배태준의 장비에 작은 생채기가 늘어났다.
그만큼 서로의 점수도 벌어지기 시작했다.
‘안 돼!’
유지한에게 창피를 주려고 일부러 사람들을 모아 놓은 무대다.
그런 곳에서 자신이 창피를 당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자의 포효]
“크르르으으응—!!”
위기에 직면한 배태준은 주변에 위압을 가하는 스킬을 사용했다.
공격을 이어 가던 유지한은 순간 자신의 팔이 살짝 굳는 걸 느끼고는 몸을 뒤쪽으로 뺐다.
몬스터라면 모를까, 인간에게는 다소 실패 확률이 높은 스킬인데도 성공한 것이었다.
“후우우……!”
거칠어진 숨을 고르는 배태준이었지만, 그것도 잠시뿐.
스킬의 압력에서 벗어난 유지한은 다시금 그에게 달려들었다.
“윽!”
삑! 삑! 삑!
[9:3]
유지한이 대련을 끝내기까지 1점이 남은 상황.
배태준의 팔에는 작은 상처에서 흘러나온 핏방울이 여러 개 맺혀 있었다.
여유가 생긴 유지한은 상대와 조금 거리를 벌렸다.
으득!
배태준은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는 못 끝내!”
[황소의 돌격]
대련 시작 때의 여유는 전부 사라진 그가 다시금 돌진기를 사용했다.
이제 상대에게 창피를 준다는 생각 따윈 버렸다.
적을 제압하고 베어 버리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와라.’
유지한은 자세를 살짝 낮춘 채 배태준을 기다렸다.
그리고 분노한 배태준의 얼굴이 가까워지기까지, 샘플링을 통해 수많은 행동의 가능성을 체크하고는…….
오른발을 축으로 몸을 크게 회전시키며 돌격을 피했다.
“뭣……!”
그리고는 목표를 잃은 상대의 등에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삑!
*****
“와, 저 사람 움직이는 거 봤어?”
“공격은 거의 다 막아 내고 자기는 유효타만 넣었지?”
“상대도 나쁘지는 않던데, 대단하네.”
“저 사람 이름이 뭐야?”
유지한과 배태준의 대련이 결국 유지한의 승리로 끝나고.
주변에 모인 구경꾼들은 박수를 보냈다.
하나같이 유지한이 보여 준 모습에 놀랐다는 반응들이었다.
같은 청영사 동기들은 말없이 유지한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피드백 교육에서 봤던 사람인가.’
‘그 영상은 조작된 게 아니었나.’
단순히 구경거리를 찾아왔던 대련 시작 전과 달리 한층 진지해진 시선들.
대련을 마친 유지한은 주저앉은 배태준에게 다가갔다.
“수고 많았어.”
유지한이 배태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자리에서 일으켜 주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배태준은 그의 배려를 거부하고 홀로 일어섰다.
“음…….”
조금 무안해진 유지한은 손을 다시 회수하며 말했다.
“네가 한 수 배우겠다고 했으니까, 원한다면 피드백을 해 줄게.”
“……피드백은 됐습니다.”
“그러냐.”
“한 번 이겼다고 너무 자만하지 마세요.”
고작 한 번 이겼다고 잘난 척하기는!
유지한을 무섭게 쏘아본 배태준은 자신의 파티원들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대련장을 나섰다.
“…….”
“…….”
“…….”
대련장을 나가는 동안 배태준 파티원들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파티장인 배태준의 실력을 믿고 있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패배할 줄이야.
‘제기랄……!’
창피를 주겠다는 것이 창피를 당하는 것으로 돌아와 버렸다.
분을 참지 못한 배태준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렇게 황급히 대련장을 빠져나오는 길.
“이봐요.”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당신은…….”
“나 알죠? 청영사 동기.”
말을 건 사람은 나이프 길드의 문경진이었다.
제대로 인사를 나눈 적은 없지만 배태준은 그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지금 대화할 기분 아닙니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죠.”
동기고 뭐고, 당장은 관심 없었다.
배태준은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반응에도 문경진은 크게 개의치 않으며 말했다.
“조금 전에 그 새끼 너무 재수 없지 않아요?”
“……누구요?”
“대련장에서 그쪽이랑 싸운 유지한이요.”
유지한의 이름이 나오자 배태준은 눈을 꿈틀거렸다.
문경진은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런 반응을 보이는 배태준을 되레 반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