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영화관
지팡이로 유지한을 가리킨 김시후가 코피를 쏟으며 쓰러진 순간.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운이 유지한의 몸을 감쌌다.
‘……?’
유지한은 무척이나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그 외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다.
상영관 내부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총 367개의 좌석들.
상영관 D열 첫 번째 좌석 밑에 떨어진 카라멜 팝콘 조각과 어느 관람객의 옷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얇은 오리털 등…….
부족한 빛으로 인해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들까지 시야에 들어오고.
눈으로 보고 있되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모든 요소가, 유지한의 인식 범위 내에 들어오고 있었다.
‘아프지 않아.’
복부에서 느껴지던 통증은 말끔히 사라졌다.
쉴새 없이 몸을 움직이며 소모된 체력은 모두 회복된 느낌이었다.
아니, 오히려 평소보다 컨디션이 훨씬 좋아진 듯했다.
전신에 맴도는 이 폭발적인 힘!
그야말로 뭐든지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뭐하는 거지?’
험악한 표정의 바바리안들은 어째서인지 매우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상체를 앞으로 잔뜩 기울인 것이 정말 힘껏 달려가는 자세였지만.
마치 슬로우 비디오로 동영상을 재생하는 듯 느릿느릿한 움직임이었다.
민유리나 칠라 등 다른 인원들도 똑같았다.
모두의 행동이 평소보다 훨씬 느리게만 보였다.
화아악—!
그 와중에 품속의 실프는 아주 밝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
유지한은 체감 시간으로 약 3초 동안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는 결론을 내렸다.
‘내 사고가 가속했다.’
사고(思考)의 가속.
다른 사람들이 1초의 시간을 보낼 때 그는 체감상 10초, 20초 이상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모든 존재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을 홀로 늘려쓰는 것이다.
‘오, 세상에.’
정말이지 이기적인 능력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인가.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김시후가 쓰러지기 전에 무슨 마법을 부렸다고만 생각할 뿐.
‘이거라면 할 수 있다.’
바바리안과 방패를 들고 있는 칠라와의 거리가 좁혀지는 상황.
느려진 시간 속에서 유지한은 조금씩 다리를 움직였다.
평소보다도 조금 느릿한 움직임.
그러나 다른 인원들보다는 훨씬 빨랐다.
타다다닷—
순식간에 칠라의 앞에 도착했다.
자리에 미끄러지듯 멈춰선 유지한은 이내 바바리안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촤아악!
예리한 검날이 목의 피부를 찢으며 그 안으로 들어갔다.
연골과 근육을 가볍게 잘라 낸 뒤에는 단단한 목뼈에 도달.
뚜둑!
이내 검날은 하얀 목뼈를 뚝 끊어 내며 계속 전진했다.
그렇게 휘두른 검이 반대편으로 빠져나온 뒤.
달려가던 바바리안의 머리가 몸에서 완전히 분리되며 떨어졌다.
그 바바리안은 삶의 마지막까지 김시후를 무섭게 바라보고 있었다.
유지한이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것이었다.
“……!”
“뭣!”
한 명이 죽어 버린 뒤에야 나머지 바바리안들은 유지한을 인식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내가 저 바바리안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확률>
<98%>
이미 그들의 패배는 확정적이었으니.
*****
엘루타라(Elutara) 세계의 바바리안들은 40여개가 넘어가는 여러 부족이 모여 하나로 이루어진 부족 연맹체를 이루고 있다.
그중에서도 타르옹은 불타라 부족의 바바리안이었다.
아기 때는 같은 시기에 태어난 부족의 아기 중에서 가장 우렁찬 소리를 내며 울었고, 걷기 시작한 다음에는 손으로 다른 아기들을 밀어서 넘어뜨릴 정도로 승부욕이 컸다.
어린 시절부터 계속 대장 노릇을 해 온 그는 언젠가부터 부족의 차기 부족장을 노려 볼 수 있을 정도의 유망주로 취급 받았다.
항상 승리자로 살아온 인생.
하지만 그런 생각은 다른 부족의 바바리안들을 만나고 깨졌다.
——허접하군.
인생 처음으로 맛본 패배.
그 뒤에 타르옹의 인생은 급변했다.
‘나는 패배자다.’
자신이 승리자라는 생각을 버리고, 오직 강함을 추구하며 훈련에만 매진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통로가 열렸다고?”
다른 부족의 거주지에 다른 세상으로 연결되는 통로라는 것이 열렸다.
일화에 따르면 그것은 하나의 시험대.
바바리안에는 모든 부족을 대표하는 한 명의 대부족장이 존재하는데, 이전 세대의 대부족장은 과거 그 안에 들어가서 적들을 섬멸하고 엘루타라로의 귀환에 성공했다고 한다.
“나도 가겠다!”
통로에 들어갈 바바리안을 선별하던 때.
타르옹은 불타라 부족의 대표로서 돌격대에 합류하게 되었다.
모든 시험을 끝내고 엘루타라에 돌아온다면, 다시금 승리자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타르옹의 생각은 통로로 들어온 지 하루도 되지 않아서 깨졌다.
‘저, 저건 대체!’
돌격대에서 가장 믿음직하던 대장 바바리안은 요술쟁이가 소환한 거대한 나무 손에 의해 죽었다.
그리고 타르옹은 보았다.
‘……!.’
거인의 손이 뻗어진 천장의 구멍.
어쩌면 그가 넘어온 통로와 비슷한 그 안쪽.
형제들을 걸레짝처럼 쥐어 짠 손보다 훨씬 거대한 무언가가…….
“아, 아, 아……!”
두렵다.
너무나도 두렵다.
바바리안의 용맹함이 사라질 정도로 압도적인 공포!
어떻게 세상에 저런 것이 존재하는 것인가?
타르옹의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려왔다.
‘죽여야 한다!’
거인의 손이 사라진 뒤, 타르옹은 어떻게든 두려움을 억누르고 요술쟁이를 죽이려 들었다.
이 또한 어려운 시험의 과정이리라.
나는 이 시험을 이겨 내고 정상에 서겠다!
그렇게 다짐했다.
“커억!”
“으아악!”
그런데 이번에는 한 인간 전사가 날뛰기 시작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 공격을 피하기에 급급하던 인간이었는데.
이제는 그가 검을 내리칠 때마다 형제들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요술쟁이가 보여 준 마법과는 달랐다.
검을 든 인간이 보여 주는 것은 그저 압도적인 육체 능력.
‘믿을 수가 없군…….’
무리의 가장 뒤에 있던 타르옹은 그의 전투를 보며 두려움이 아니라 경외감이 들었다.
언젠가 그가 꿈꿨던 전설의 편린을 엿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비록 적이지만 존경심이 들 정도로.
“윽!”
타르옹 앞에 있던 바바리안의 움직임이 멈췄다.
서서히 옆으로 기울던 그의 몸은 곧 완전히 쓰러졌다.
이로서 다른 모든 형제들이 죽었다.
자리에 살아 있는 바바리안은 타르옹 혼자뿐.
‘끝인가.’
초록빛 오러가 둘러진 유지한의 검이 타르옹을 가리킨 순간.
타르옹 또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말았다.
*****
촥!
탄탄한 근육질의 가슴이 가로로 길게 베어졌다.
홀로 남은 바바리안은 무릎을 꿇으며 앞으로 넘어졌다.
공격당하기 전부터 죽음을 체념한 듯한 표정이었다.
부웅!
모든 적을 처리한 유지한은 허공에 검을 휘둘러 날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짐짓 여유조차 느껴지는 장면.
경계 태세를 갖춘 채로 유지한은 지켜보던 민유리는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있었다.
그 옆에 있던 남자 영웅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 지, 지금 내가 뭘 본 거지……?’
그렇게 강해 보이던 바바리안들이 하나같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마법 스킬조차 가볍게 튕겨 내던 육체도 유지한의 검을 피하지는 못했다.
어떻게 움직였는지조차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신속한 몸놀림!
이 싸움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생각이 우습게만 여겨졌다.
“다들 무사하시죠?”
“아, 네, 네.”
“지한 씨는요?”
“저는 괜찮습니다.”
검을 거둔 유지한은 파티원들에게 돌아왔다.
그는 한 손으로 배를 문지르고 있었다.
전신을 감쌌던 힘이 사라지고 복통이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몸을 감쌌던 마법의 지속 시간이 끝난 것이다.
“잘했다.”
“찍.”
유지한이 살짝 찌그러진 방패를 든 칠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녀석은 탱커로서 아주 훌륭하게 파티원들을 지켜냈다.
“음…….”
민유리는 옆에서 유지한을 보면서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그가 보여 준 것은 민유리가 기억하는 유지한이라는 영웅의 능력을 훌쩍 뛰어넘는 힘.
절대로 4급 파티의 전사가 보여 줄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저기, 지한 씨. 방금 전에 그건 대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
“하지만…….”
유지한은 바닥에 쓰러진 김시후를 내려다봤다.
인중 부근에 코피가 잔뜩 묻어 있는 김시후의 얼굴.
색색거리며 숨을 쉬는 것이 다행히도 단순히 잠에 든 것처럼 보였다.
그는 김시후의 코피를 손으로 닦아 내며 말했다.
“시후가 무슨 마법을 부린 것 같습니다.”
민유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지나간 일이었지만.
쓰러지기 전의 김시후가 사용한 기이한 마법 덕분에 유지한 파티는 바바리안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아직 다 끝난 게 아니에요.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깨어나면 듣기로 하고, 이만 마석을 찾으러 갑시다.”
“알겠어요.”
“그쪽 분도 저희를 도와주셔야겠습니다.”
“네! 뭐든 시켜만 주십쇼!”
운 좋게 살아남은 남자 영웅은 힘차게 대답했다.
그렇게 마석 수색이 재시작되고.
“찍찍!”
“그렇지!”
“허, 이거 참 똘똘한 녀석이네요!”
오늘따라 감이 좋은 칠라는 백화점에서 살아남은 마법사들과 협력하여 7층의 결계에 사용된 마석을 빠르게 찾아냈다.
아래 층에도 결계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다른 층에 갇혀 있던 영웅들도 마석을 찾아다니고 있는 덕분이었다.
부서진 마석이 지닌 고유의 마력 패턴을 파악한 마법사들은 전방위 탐지에 나섰고.
이동 중에 만난 여러 파티와 함께 1층까지 내려가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
매일을 바쁘게 살아가는 영웅 진석우에게 일요일은 유일한 휴식의 날이다.
영웅 활동이든, 연예인으로서의 방송 활동이든.
그는 아무리 바쁘더라도 일요일만큼은 오전까지 모든 업무를 끝내고 오후에는 휴식을 취하는 편이었다.
“푸하핫!”
고가의 빔프로젝터가 넓고 하얀 벽 위로 화면을 투영했다.
그걸 통해 밀려 있던 드라마를 보는 진석우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와작! 와작!
소파 위에서 짭조름한 과자를 씹으면서 즐기는 드라마.
탁자 위에 놓인 위스키까지!
휴일을 보내는 것에 환상적인 조합이었다.
“아, 배꼽 빠지겠네.”
드라마 한 편이 끝나자 진석우는 리모콘을 눌렀다.
다음 화를 이어서 볼까, 그게 아니면 다른 영화를 볼까.
행복한 고민에 빠진 상황.
띠링!
휴대폰에 새로운 알림이 도착했다.
새로운 메일이 도착했다는 메시지였다.
“피드백 영상인가?”
메일 알림은 중요한 메일에만 울리도록 설정되어 있었다.
진석우는 리모콘을 잠시 내려놓고 휴대폰을 집었다.
[유지한 파티 피드백 영상 제출합니다.]
[발신인 : 유지한]
“맞네.”
도착한 메일은 다음 교육에서 사용될 유지한 파티의 영상이었다.
첫 수업부터 아주 범상치 않은 피드백을 제출했던 그들.
진석우는 그들에게 묘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음?”
보내온 메일에는 첨부된 동영상과 함께 짧은 글이 적혀 있었다.
진석우는 동영상을 다운로드하며 그 내용을 읽었다.
“단풍괴무랑 소괴무를 마주쳤어?”
백화점에서 안괴꽃을 사냥하던 도중 옥상에서 단풍괴무와 소괴무를 마주쳤다는 유지한 파티.
메일에 적힌 내용은 진석우를 꽤 놀라게 했다.
4급인 유지한 파티가 3급 몬스터를 사냥했다는 말이었으니까.
“확실히 이상 현상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쉽게 믿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4급과 3급의 격차가 3급과 2급에 비교해 좁다고는 해도, 파티의 등급은 단순한 숫자 놀이가 아니다.
게다가 3급 몬스터 중에서도 다 자란 단풍괴무와 소괴무는 꽤 까다로운 적으로 분류된다.
‘영상을 보면 알겠지.’
그런데 메일의 내용은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 문단에는 아주 충격적인 내용이 남아 있었다.
[……백화점을 습격한 바바리안들과 전투를 치렀습니다. 영상에 그들의 시체가 포함되어 있으니 시청에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뭐? MA에서 침입자를 만났다고?!”
깜짝 놀란 진석우가 앉아 있던 소파에서 몸을 튕기듯이 일어났다.
바바리안이라면 자신에게 덤벼들거나 마력을 가진 영웅만을 노리는 변태적인 종족!
평범한 4급 영웅이 상대할 만한 놈들은 아니다.
“빨리, 조금 더 빨리……!”
진석우는 영상이 모두 다운로드 될 때까지 계속 휴대폰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운로드가 완료됐을 때.
빔프로젝터와 연동된 휴대폰의 화면이 벽에 송출됐다.
동영상의 시작은 백화점 건물 앞쪽.
백화점 안으로 진입 후 한동안 안괴꽃을 사냥하는 유지한 파티의 모습이 비춰지고.
건물을 한층 한층 올라간 그들은 어느덧 옥상에 도착했다.
“…….”
눈도 깜빡이지 않고 영상에 바라보는 진석우.
그의 집은 어느새 그 혼자만의 영화관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