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백화점 (5)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영웅들을 바라보는 바바리안.
새로 도착한 그들의 손에는 인간의 시체가 들려 있었다.
이들은 아무래도 시체를 전리품 따위로 여기는 듯했다.
‘저 사람들은……!’
그런데 손에 들린 인간들은 모두 유지한에게 익숙한 얼굴이었다.
모두 옥상에서 구출된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흩어져서 마석을 찾던 도중에 다들 바바리안을 마주친 듯했다.
“허.”
기껏 살려낸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한 침입자로 인해 다 죽어 버렸다.
개새끼들.
유지한은 속으로 분노를 곱씹으며 샘플링을 사용했다.
<—내가 저 바바리안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확률>
<37%>
낮다.
한없이 낮았다.
무려 절반조차 되지 않는 정도의 승률.
바바리안 3명과 싸웠을 때의 승률이 68%였으니, 8명을 상대로 사용한 샘플링의 결과치고는 그리 나쁘지 않은 걸 수도 있었지만.
결코 만족할 수 있는 수치는 아니었다.
‘이 정도 위기에 빠진 게 얼마만인지.’
경력 전체를 돌이켜 봐도 이렇게 낮은 승률이 나온 적은 드물었다.
최근에 주변에서 여러 사건 사고가 많이 터지는 듯했지만, 이런 위기에 몰릴 줄이야.
‘다른 방법은 없나.’
싸움에서 언제나 승리만을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도망치는 게 더 나은 선택이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저 바바리안들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 확률>
<23%>
결과는 냉혹했다.
이렇게 되면 다른 방법은 없었다.
유지한은 거리를 두고 있는 적들을 보며 말했다.
“다들 아직 괜찮아?”
“물론이죠.”
“준비됐어요.”
“찍!”
다행히 파티원들은 아직 지치지 않았다.
게다가 앞선 전투로 모두의 감각이 평소보다 훨씬 날카로워진 상황.
나름 최적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었다.
“쿨럭! 저도 돕겠습니다.”
휴식을 취하고 있던 남자 영웅은 유지한 파티에 합세했다.
유지한은 그에게 칠라와 함께 뒤쪽의 인원들을 지키도록 했다.
그의 자세한 능력이나 실력 따위는 모르겠지만, 바바리안에게 제압된 전적이 있는 만큼 단독으로 두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남자는 그 의견을 받아들여 칠라의 옆으로 섰다.
“끝났나?”
“뭐?”
가장 앞에 선 바바리안.
대장격으로 보이는 놈이 유지한을 향해 말했다.
“죽을 준비는 다 끝냈냐는 말이다.”
“…….”
정말이지 자신감이 넘치는 발언.
이미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것이었다.
유지한은 잠시 그를 노려보다가, 쓰러진 바바리안 쪽으로 시선을 두며 말했다.
“디애나라고 했나?”
“뭐?”
“네 동료도 비슷한 소리를 했었지. 그러다 죽었지만.”
“이 새끼가……!”
“함부로 나대지 말라는 말이다.”
까득! 까드득!
유지한의 도발에 모든 바바리안들이 이를 갈았다.
그러다 결국 대장 바바리안이 검을 치켜들며 말했다.
“형제들아! 돌격하라!”
“브롸아아아아!”
“브롸아아아아!”
“브롸아아아아—!!”
분노한 바바리안 모두가 앞으로 뛰쳐나왔다.
그들의 발길질에 상영관 무대가 부서질듯 울렸다.
“온다.”
유지한은 다가오는 바바리안을 주시했다.
마치 거친 야생의 맹수들이 달려드는 듯한 모습이었다.
“저놈을 죽여!”
바바리안들의 관심은 주로 유지한에게 끌려 있었다.
가볍게 도발을 날린 게 효과가 있던 것이었다.
유지한은 그를 이용하여 은근슬쩍 파티원들과 거리를 벌렸다.
“찍찍!”
“쥐새끼가!”
“오늘 점심은 쥐구이인가!”
유지한에게 덤벼오는 바바리안이 4명.
칠라를 비롯한 원거리 딜러들을 공격하는 바바리안이 4명.
인원이 딱 반으로 나뉘었다.
“죽어!”
후웅! 후웅!
후우웅—!
강력한 힘이 담긴 검과 도끼가 오로지 유지한을 노리고 쏟아졌다.
피하기만 해도 급급한 상황!
‘오러까지!’
노란색 오러로 둘러진 도끼날이 코앞을 스쳐가는 순간.
앞머리가 살짝 베인 유지한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큭!”
“요리조리 잘도 피하는군……!”
“어디까지 가나 보자!”
바바리안의 공격이 더욱 빨라지고 거세졌다.
덕분에 유지한은 온몸의 관절이 삐걱일 정도로 격하게 움직여야만 했다.
틈틈이 반격의 기회를 엿보지만 여의치 않았고.
그 와중에 몸에는 조금씩 상처가 늘어나고 있었다.
*****
쾅!
도끼 하나가 칠라의 방패를 두들겼다.
이어서 다른 도끼 또한 칠라의 방패를 때렸다.
콰앙!
“찍! 찌익—!”
상영관 전체에 울려 퍼지는 충격음.
공격을 한번 막아 낼 때마다 칠라의 입에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지 않기 위해 힘찬 기합을 지르는 것이었다.
“그거 참 거슬리는군!”
방패가 너무 거슬렸던 바바리안은 씩씩대며 무기를 집어던졌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칠라의 방패를 잡았다.
까드드득!
그 무식한 힘에 의해 커다란 방패가 조금씩 어그러졌다.
칠라를 보조하던 남자 영웅은 바바리안을 떼어 놓으려 안간힘을 썼다.
[익스플로전]
콰아앙!
그때 바바리안의 머리 부근에서 소규모의 폭발이 일어났다.
상대가 평범한 몬스터였다면 몇 마리가 한번에 죽어 버리고도 남을 만한 위력.
보통은 몬스터의 사체가 크게 훼손되기에 피하는 마법이지만…….
그 폭발은 바바리안의 피부를 살짝 찢어 내는 선에서 그쳤다.
[스톤 해머]
[워터 블래스트]
[윈드 랜스]
…….
…….
이어지는 마법도 마찬가지였다.
마법은 요란한 소음만을 만들어 낼 뿐, 그리 큰 피해는 입히지 못하고 사라졌다.
‘진짜 단단하네……!’
마법의 위력이 약해진 게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들은 조금 전 바바리안보다 몸이 튼튼하고 실력이 뛰어난 부류인 듯했다.
그나마 긍정적인 부분이라면 직격을 피하려는 시도를 한다는 것.
지금까지의 공격이 아예 먹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파바바바박!
공들여 가공한 민유리의 화살은 유효타로 들어가고 있지만.
어느새 화살이 위험하다는 걸 인식한 바바리안들은 다른 신체 부위보다 훨씬 단단한 손바닥으로 화살을 쳐냈다.
“고작 이 정도냐!”
“우숩구나!”
“브롸아아아!!”
적들을 쉽사리 뚫어 내지 못하는 김시후와 민유리의 조바심이 커져갔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1대 4로 홀로 고군분투하는 유지한.
버프를 둘렀다곤 하지만, 그가 언제까지 버텨 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꽈악!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김시후가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조금 파고 들어가며 고통이 느껴졌다.
‘이렇게 무력할 수가!’
돌연변이 괴들레를 만났던 때 이상으로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는 김시후였다.
이런 힘을 지닌 적은 지금까지 만나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예전에 들었던 아버지의 조언을 떠올렸다.
——만에 하나라도 침입자를 만나게 된다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치는 편이…….
침입자를 만나거든 대적할 생각 말고 도망가라.
그건 결코 허투루 하신 말씀이 아니었다.
‘다른 방법이……!’
김시후는 침착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지금 적들에게 공격이 통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바리안의 몸이 너무 단단하다.’
상상 이상의 내구도를 가진 바바리안의 육체.
비슷한 수준의 공격 마법을 반복해서는 같은 결과만 나올 뿐이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역전시킬 만한 마법은 무엇인가.
순식간에 여러 마법들이 후보지에 들어왔다.
언젠가 2급 이상의 영웅들이 영상 속에서 사용했던 화려한 고위 마법들!
그런데 과연, 나는 그 마법들을 감당할 수 있는가.
‘무리야.’
수많은 마법들을 머리로 알고는 있다.
하지만 이론에 빠삭하다고 해서 실전에 능한 것은 아니다.
알고 있는 것과 그것을 직접 선보이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최근에서야 성장하는 걸 느끼고 있었는데…….’
아직은 고위 마법을 사용하기에 부족함이 많은 김시후의 마력이었다.
어설프게 시도하다가는 본전도 건지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중요한 상황에 마력이 역류해서 기절하는 일 따위가 벌어져서는 안 된다.
‘도움도 안 되는 놈!’
이럴 줄 알았으면 훈련에 더 열심히 매진하는 건데.
속으로 자책하던 그때였다.
퍽!
바바리안의 주먹에 복부를 얻어맞은 유지한이 상영관 스크린을 향해서 날아갔다.
“지한이 형!”
*****
스크린에 등을 부딪힌 유지한의 몸이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어떻게든 쓰러지지 않고 서 있는 자세를 유지했지만.
“쿨럭!”
그의 입술을 타고 붉은 피가 조금 흘러내렸다.
배에서 느껴지는 얼얼하고도 따끔한 통증.
아무래도 내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한 번 얻어맞은 걸로 이 정도의 부상이라니.
마법이나 화살을 몇 번이나 쳐맞고도 멀쩡한 저들과 비교하면 너무 불공평한 게 아닌가?
‘젠장.’
입 안쪽에서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바닥에 피를 뱉은 유지한이 손등으로 입가의 피를 닦았다.
파티원들이 그를 보며 뭐라 소리치고 있었다.
하지만 대답해 줄 여유는 없었다.
적들이 다시 덤벼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주먹을 맞고도 견디다니!”
“보기보다 괜찮은 전사군!”
여러 개의 도끼들이 공기를 가르며 날아들었다.
유지한은 배의 통증을 견뎌 내며 다시 몸을 움직였다.
조금 전과 비슷한 공격을 한번이라도 더 맞는다면, 이 자리에 서 있을 것이라는 자신이 없었다.
드르르! 드르르륵!
품속에 있는 실프가 경고하듯 몸을 떨어 댔다.
하나뿐인 계약자의 위기를 감지한 것이었다.
‘어떻게든 반격한다!’
유지한은 핏발 선 눈으로 바바리안들을 훑었다.
단 한 번!
한 번이라도 빈틈이 나온다면 저 근육 돼지들을 베어 버리겠다.
그 생각뿐이었다.
“눈에 독기가 서려 있군.”
“인간, 우리는 너를 인정하겠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바바리안들이 유지한에게 동시에 달려드는 그 순간.
슈우우우우—
갑자기 주변 마력의 흐름이 변했다.
이 자리의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기운이었다.
“헛!”
“……?!”
“뭐, 뭐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바바리안들이 황급히 공격을 중단하고 뒤로 물러났다.
이내 그들의 고개가 한 곳으로 돌아갔다.
칠라의 뒤쪽에 있는 김시후의 자리였다.
“Gra, ete, sio, mua, yon, buo…….”
중얼중얼—
김시후는 난데없이 눈을 감은 채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발바닥은 땅에 닿지 않고 땅 위로 살짝 떠 있었다.
마치 공중부양 마법이라도 사용하는 것처럼.
“……시후야?”
가장 가까이에 있던 민유리가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김시후는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 중얼거림이 멈췄을 때.
파앗!
그가 감았던 눈을 크게 뜨며, 지팡이를 일자로 쭉 뻗었다.
[XXX XX]
격동하던 마력이 한 곳으로 모였다.
고오오—
찰나의 순간.
상영관의 천장에 거대한 타원이 생성되었다.
테두리가 초록색 풀과 얇은 나무 줄기 따위로 이루어진 거대한 타원.
하나의 출입구처럼 생긴 그 타원 안쪽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나무?’
수없이 많은 나무가 하나로 엮어져 만들어진 형상.
마치 나무로 이루어진 거인의 손처럼 보이는 그것이 타원에서 빠져나왔다.
슈와아아악——!
거인의 손이 무대를 부숴 버릴 듯한 기세로 뻗어지며, 유지한을 공격하던 바바리안들을 붙잡았다.
그 속도가 크기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덕분에 바바리안들은 도망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대장격인 바바리안도 마찬가지였다.
꽈드득!
꽈드드득!
꽈드드드득!
거인의 손은 붙잡은 것들을 쥐어 짜내듯 주먹을 꽉 쥐었다.
아주 짧은 단말마의 절규가 울려 퍼진 뒤, 그 손에서 붉은 핏물이 아래로 주륵 흘러내렸다.
그리고 손이 다시 활짝 펼쳐졌을 때.
바닥에 떨어진 바바리안들은 처음의 형태를 전혀 알 수 없는 하나의 고깃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미친…….’
유지한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이 과연 현실이 맞을까.
그렇다기엔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광경.
마치 현실과 꿈의 경계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저건 시후의 마법이다.’
당장 예상할 수 있는 것은 김시후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
하지만 그 어떤 영웅의 깨달음도 이런 결과로 나타난다는 건 들어본 적이 없었다.
쿠구구구궁!
피가 잔뜩 묻은 거인의 손이 천천히 하늘로 올라갔다.
모든 볼일을 마친 듯이 타원 안쪽으로 회수된 그 손은 타원과 함께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
“…….”
눈앞의 광경에 압도당한 바바리안들의 시선은 계속 상영관 천장에 머물렀다.
대체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순식간에 고깃덩어리가 되어 버린 동족들.
잠시 후 그들은 고개를 위에서 아래로 내렸다.
시선이 향하는 곳은 김시후가 있는 방향이었다.
‘저놈…….’
‘저놈이다.’
‘저놈을 당장 죽여야 한다.’
바바리안의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저놈을 당장 죽이지 못하면.
여기 있는 형제들은 모두 죽는다.
“저 요술쟁이 놈을 죽여라!”
“브롸아아아!!”
“브롸아아아!!”
“브롸아아아!!”
바짝 굳어 있던 바바리안들이 영화관의 공기가 떨릴 정도로 크게 함성을 질렀다.
그리고 아직 하늘에 떠 있는 김시후의 지팡이가 유지한을 향했다.
[XX XX XXX]
푸슛!
양쪽 코에서 코피를 뿜은 김시후가 뒤로 넘어졌다.
민유리는 황급히 그를 붙잡아 부축했다.
“찍—!”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칠라가 김시후와 민유리를 감싸듯 방패를 들어올렸다.
적들의 접근을 막겠다고 단단히 각오를 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바바리안들이 오로지 김시후를 바라보며 돌진하는 때.
스걱!
어느새 달려온 유지한이 가장 앞서 달려가던 바바리안의 목을 검으로 베었다.
볼링공 떨어지듯 땅으로 툭 떨어지는 바바리안의 머리통.
유지한이 공격하는 것은 커녕, 근처로 온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던 칠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후욱……!”
눈에 광채까지 도는 유지한은 살면서 그 어느 때보다 전신에 힘이 넘쳐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