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백화점 (3)
유지한은 단순히 공격을 피하기에 급급하지 않고 검과 마력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앞으로 전진했다.
한 번의 공격 뒤에 단풍잎을 피하고 다시 공격하기를 반복했다.
그런 식으로 치고 빠지기를 이어가자 사로잡힌 영웅들을 한 명씩 가지에서 떨어뜨릴 수 있었다.
“가, 감사……!”
“저도 돕겠습니다!”
속박에서 풀려나온 영웅들은 유지한 파티를 도와 주변의 몬스터를 공격했다.
이미 소괴무와 단풍괴무가 한 그루씩은 쓰러진 상황.
쿵!
거대한 소괴무의 몸이 합공을 이기지 못하고 옆으로 쓰러졌다.
“죽어! 이 시발놈아!”
“새끼 꼴 좋다!”
콰직! 콰지직!
영웅들은 넘어진 소괴무의 몸통 위에 도끼질을 하듯 무기를 힘껏 내려쳤다.
몬스터에게 붙잡혔던 것이 크게 부끄러웠는지 다들 악을 쓰고 공격하는 모양새였다.
덕분에 커다란 괴무가 곤죽이 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휘릭! 휘리리릭!
주변 괴무의 죽음을 목격한 한 단풍괴무는 가지를 더 세차게 흔들었다.
뾰족한 단풍잎이 영웅들을 향해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렸다.
떨어져 나간 단풍잎은 계속해서 재생되었기에 녀석에게 무기가 부족할 일은 없었다.
푹! 푹!
“으아악!”
미쳐 공격을 피하지 못한 영웅들의 몸에 단풍잎이 박혔다.
영 좋지 못한 부위에 공격을 맞고 쓰러진 영웅들도 있었다.
붙잡혔을 때와 마찬가지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유지한은 달랐다.
팅! 팅! 팅! 팅!
그가 검을 요리조리 움직일 때마다 단풍잎이 튕겨 나갔다.
피할 수도 있었지만, 결과 검으로 튕겨 내는 확률이 더 안정적이었다.
“미친……!”
“저 사람 뭐야.”
단 한 번의 공격이라도 허용치 않는 칼놀림.
바닥에는 이미 튕겨 나간 단풍잎이 가득했다.
분노한 단풍괴무의 관심은 오로지 유지한에게만 쏠려 있었다.
뒤쪽으로 크게 물러난 영웅들은 멍하니 그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미 몇 명이고 저 공격에 당해 버렸으리라.
“형! 합류할게요!”
주변의 괴무를 정리하던 김시후와 민유리가 유지한과 함께 단풍괴무를 공격했다.
방패 든 칠라를 앞세운 덕분에 자유로운 행동이 가능한 두 사람이었다.
화르륵!
불마법에 직격당한 단풍괴무의 몸이 타올랐다.
본래 괴무는 불을 극도로 피하며 최우선으로 대처하는 녀석이지만.
공격을 맞지 않는 유지한에게 관심이 쏠려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쿠웅—!
마침내 하나 남은 단풍괴무가 쓰러졌다.
“후…….”
유지한은 검을 쥐고 있던 손을 허공에다 가볍게 털었다.
쉬지 않고 날아오는 나뭇잎과 가지를 막아 내느라 손이 얼얼해졌다.
주변 영웅들이 단풍괴무의 공격에 취약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단풍괴무는 그가 맡아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익숙한 일이지.’
다행히도 그는 과거 김현태 파티에서 몬스터들의 공격을 한 몸에 받는 미끼가 되는 일을 여러 번 경험했었다.
그때의 경험이 지금도 도움이 된 것이었다.
떨어져 있던 김시후가 그에게 달려왔다.
“형! 괜찮으세요?”
“난 괜찮아. 다른 사람들은?”
“대체로 멀쩡해요. 죽은 사람은 있지만…….”
고개가 꺾인 채 바닥에 누워 있는 남성.
김시후는 안타까운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더 죽은 사람은 없군.’
유지한은 자신이 합류한 이후 추가적인 사망자가 없다는 것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겼다.
옆으로 다가온 민유리가 말했다.
“영웅부에 연락하는 게 좋겠어요.”
“제가 하겠습니다.”
3급 몬스터가 아래 층 어딘가에 더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영웅부에 알리기 위해 전화를 걸려는 순간이었다.
[서비스 지역이 아닙니다.]
“……?”
어째서인지 이상한 메시지와 함께 휴대폰의 통신사 표시가 보이지 않았다.
인터넷 신호도 마찬가지로 끊겨 있는 상황이었다.
통화와 인터넷, 둘 다 정상적으로 동작하지 않는 걸 본 유지한은 적잖게 당황했다.
“혹시 지금 휴대폰 통화나 인터넷 되시는 분 계십니까?”
“……음? 안 되네요?”
“저도 안 됩니다.”
“저도요.”
사람들에게 물어봤으나 다들 마찬가지였다.
모두의 휴대폰에서 통신이 제한되었다.
‘말이 안 되는데.’
커다란 백화점이 지어질 정도의 번화가.
결계가 있어도 이런 곳에서 통신이 끊긴다는 건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분명 아까 전까지는 동작을 했던 것으로 기억했다.
운 나쁘게 전국의 통신망이 갑자기 망가졌다는 가설을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어째 느낌이 좋지 않았다.
“다들! 일단 여기서 나갑시다.”
한 남성이 백화점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열린 문을 넘어가려는 순간이었다.
퉁!
“……뭐야.”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를 가로막았다.
*****
“하나 둘 셋!”
콰앙!
이미 열려 있는 입구를 향해 커다란 도끼가 휘둘러졌다.
마치 허공에 무기를 휘두르는 듯한 장면이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도끼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 투명한 막에 부딪히며 멈췄다.
도끼를 힘껏 휘두른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안 되네요.”
“후우…….”
옥상에 있는 모두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어떤 날카로운 무기도 통하지 않는다.
강력한 마법 스킬조차 입구를 넘어갈 수는 없었다.
옥상과 건물 내부를 가르는 경계.
영웅들은 그곳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이쪽도 마찬가지에요.”
옥상정원의 한쪽 끝으로 걸어간 민유리가 앞쪽으로 손을 뻗었다.
툭.
그러나 그녀의 손끝은 난간 바로 위쪽 허공에서 막혔다.
옥상 입구와 마찬가지로 막혀 있었다.
민유리는 손바닥을 펼쳐 그것을 매만졌다.
전체가 매우 투명하지만 아주 살짝 형체가 보이는 반투명한 장막.
평평하면서도 매끈한 그것이 옥상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따라서 입구가 아닌 옥상 밖으로 나간다는 선택지도 불가능했다.
“크흠…….”
“이게, 참…….”
김시후를 비롯한 마법사들은 보이지 않는 장벽을 계속 조사하고 있었다.
현상의 원인을 찾아내려는 것이었다.
민유리와 함께 옥상을 빙 둘러보던 유지한은 김시후에게 다가갔다.
“뭐 좀 알아낸 거라도 있어?”
“조금은요.”
“어떤 건데?”
“…….”
김시후는 벽을 향해 뒀던 지팡이를 회수했다.
그리고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결계.”
“뭐?”
“영웅부에서 MA에 설치하는 결계랑 구조가 비슷해요.”
김시후가 조사를 통해 찾아낸 답은 결계였다.
지금 영웅들을 가로막는 것이 몬스터를 가로막는 결계와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결계 안에서 결계를 펼쳤다는 거야?”
“그렇게 되겠네요.”
“물리력을 갖는 결계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결계는 본래 몬스터를 가로막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는 것.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다가 인간의 진입을 가로막는 결계는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다.
“저도 마찬가지에요. 하지만 실제로 눈앞에 있으니까.”
“대체 무슨 일인지…….”
결계의 설치 권한은 오직 영웅부에게만 있다.
하지만 영웅부가 예고도 없이 이런 일을 벌였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일단은 마석을 찾아보면 될 것 같아요.”
결계는 구조상 반드시 외부가 아닌 내부에 마석이 설치되어야 한다.
그 마석에 깃든 마력을 통해서 결계가 유지되는 구조였다.
그리고 옥상 정원만을 감싸고 있는 이 결계는, 옥상 어딘가에 마석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유지한은 모두를 동원하여 어딘가에 있을 마석을 찾아다녔다.
“찍?”
그리고 탐색을 시작한 지 7분쯤 지났을까.
요리조리 뛰어다니던 칠라가 갑자기 멈춰 섰다.
민유리는 갑자기 움직이지 않는 녀석에게 다가갔다.
“왜 그래?”
“찍!”
자리에 앉은 칠라가 바닥 한쪽을 주시했다.
옥상 정원을 꾸미는 것에 사용된 넓적한 돌이었다.
“……?”
민유리는 쪼그려 앉아서 그 돌을 살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넓적한 돌 중간에는 다른 돌과 색깔이 조금 다른 조각 같은 게 박혀 있었다.
“시후야! 지한 씨!”
민유리가 황급히 파티원을 호출했다.
그녀에게 달려간 두 사람이 그 수상한 돌을 살폈다.
돌을 매만지던 김시후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말했다.
“이거 되게 수상하네요. 미세하게나마 마력이 느껴지는 것도 같고.”
“부숴 볼까?”
“네.”
유지한은 검끝을 바닥으로 조준하여 색깔이 조금 다른 돌을 찔렀다.
콰득!
돌보다는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슈우우우—
“……!”
“사라진다!”
잠시 후, 입구를 막아서던 결계가 해제되었다.
그것은 진짜로 결계를 유지하는 마석이 맞았다.
“이 똘똘한 자식!”
“찍찍!”
칭찬을 받고 기분이 업 된 칠라였다.
유지한은 잠깐 다른 영웅들을 모아서 상의를 진행했다.
그리고 짧은 상의 끝에 열린 입구를 통해 건물을 내려가기로 했다.
“갑시다.”
12명이 넘는 영웅들이 함께 옥상을 우르르 빠져나갔다.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자 한 번 거쳐 왔던 7층의 영화관이 보였다.
그 다음 6층으로 넘어가려는 찰나.
“여기도 막혀 있어요.”
“이런 썅…….”
7층에서 내려가는 길도 옥상과 마찬가지로 결계 속의 결계로 막혀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러면 어쩔 수 없이 또 마석을 찾아야만 했다.
“흩어져서 찾아보죠.”
영웅들은 서로 나뉘어 마석을 찾아다니기로 했다.
부상자들은 매표소와 매점 수색을 맡고, 유지한 파티를 포함한 다른 영웅들은 넓은 복도와 상영관으로 향했다.
상당히 넓은 탓에 전부 찾아본다는 건 꽤 시간이 걸릴 수도 있겠지만.
김시후를 비롯한 마법사들이 조금 전에 부순 마석의 마력 패턴을 파악하고 있었기에 수색 속도에 탄력이 붙었다.
챙! 채앵!
그런데 복도를 수색하는 때, 6상영관 쪽에서 요란한 소음이 들렸다.
아직 사냥을 하고 있는 파티인 걸까.
뭐가 됐건 작금의 사정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한 유지한은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쿠구구궁!
지반이 흔들리고 천장에서 가루 같은 것이 떨어졌다.
상영관이 가까워질수록 유지한의 표정에 조금씩 의문이 서렸다.
안괴꽃과 싸우는 것 치고는 소리가 너무 요란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현장에 도착한 순간.
“끄으윽!”
“……!”
유지한은 몇 개의 조명이 켜져 있는 무대 위에서 누군가에게 목을 붙잡힌 남자를 발견했다.
몸을 버둥거리는 남자는 산소가 부족한지 얼굴이 완전히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저대로 놔두면 죽는다.’
유지한은 말보다 행동이 앞섰다.
앞으로 총알처럼 튀어나간 그가 목을 쥔 팔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이크.”
그러나 목을 쥐고 있던 여성은 팔을 거두며 뒤로 물러났다.
“커허허억!”
그녀의 손아귀에서 풀려난 남자는 바닥에서 투명한 눈물을 쏟으며 거칠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생존을 확인한 유지한이 앞쪽으로 검을 겨눴다.
그러자 여성이 기가 찬다는 듯이 말했다.
“갑자기 뭐야?”
“너야말로 이게 뭐하는 짓이냐.”
“싸움의 정당한 승자를 가리는 중이었지. 방해 말고 꺼져.”
싸움을 방해받아 잔뜩 짜증내는 여성이었다.
한손에 도끼를 들고 있는 그녀의 외견은 독특했다.
엔간한 남자보다 큰 키에 두꺼운 팔 근육이 돋보이는 탄탄한 상체와 하체.
오랫동안 감지 않아 완전히 떡 져 있는 머리칼과 조잡하게 만들어진 가죽옷.
무거운 갑옷을 입은 남자를 한손으로 가볍게 들어 올릴 정도의 근력까지.
유지한은 그녀에게서 보이는 몇 가지 요소를 종합하여,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바바리안?”
바바리안.
본래 야만인을 뜻하는 단어였지만, 언젠가부터 지구로 넘어오는 이종족 중 일부가 자신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여 뜻이 변질된 말.
대체로 근육질에 거구인 걸 제외하면 인간과 아주 유사한 외형을 가졌으면서도 항상 전투와 피에 미쳐 산다고 알려진 종족이다.
“알고 있네?”
여성은 눈앞의 인간이 자신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에 신기해했다.
그러나 동시에 표정을 굳혔다.
“그걸 알면서 감히 날 방해해? 넌 내가 찢어죽일 거야.”
“…….”
바바리안은 싸움을 방해받는 걸 무척 싫어한다고 알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