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입교식
“진짜로 합격했네…….”
“으흐흐.”
유지한과 김시후는 입가에 슬며시 지어지는 미소를 숨길 수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바로 몇 분 전, 청영사로부터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은 후였기 때문이었다.
휴대폰을 내려다보던 김시후가 말했다.
“제 친구가 있는 파티는 떨어졌대요.”
“그만큼 어려웠다는 거겠지.”
인터넷에는 청영사 면접에 떨어졌다는 후기들이 여러 개 올라왔다.
모르긴 몰라도 이번 청영사에 들어가기 위해 아주 쟁쟁한 파티들이 많이들 지원했을 터.
유지한 파티가 그 경쟁에서 이겼다는 건, 꿀잼 길드와는 전혀 상관없는 제3자로부터 큰 인정을 받았다는 뜻이었다.
‘사무실 걱정은 덜었구나.’
합격 소식을 들은 뒤, 유지한은 사무실 매물 찾기를 그만두었다.
청영사에 합격했으니 그곳의 사무실을 빌려 달라고 할 셈이었다.
“유리 씨! 우리 청영사에 합격했대요!”
—와, 잘됐네요!
유지한은 민유리에게 전화를 걸어 청영사 합격 소식을 알렸다.
그러자 그녀는 진심으로 기뻐하는 반응을 보였다.
“우리 갔던 건물 기억하죠? 거기라면 칠라가 오가는 것도 문제없을 거예요.”
—그거 다행이네요.
“이게 다 유리 씨 덕분입니다.”
—저는 한 게 없는걸요.
영웅부에서도 주목할 만큼 아주 독특한 경력을 가진 민유리.
그녀가 합류했다는 사실은 유지한 파티에게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아 참. 그리고 말씀드릴 게 있는데.”
—어떤 거요?
“청영사 합격 및 유리 씨의 합류를 기념해서 조촐하게 축하 파티를 하려고 해요.”
—파티요?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지만요.”
유지한은 길드원들과 함께 파티를 계획 중에 있었다.
파티라곤 해도 적당한 장소를 빌려서 먹거리를 먹는 것뿐이었지만…….
최근 길드에 기쁜 일이 연달아 생겼으니, 이벤트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파티에 초대받는 건 처음이에요……!
“영웅이라고 해서 항상 일만 하고 살 수는 없죠. 조만간 저녁에 바비큐장을 빌릴 테니까 칠라도 같이 데려와주세요.”
—알겠어요!
파티라는 말에 민유리는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덕분에 간단히 고기나 구워 먹으려던 유지한은 고민에 빠졌다.
‘너무 기대하면 곤란한데…….’
구색을 갖추기 위해 샴페인이나 와인이라도 구해 놔야겠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
며칠 뒤, 청영사의 입교식이 진행되는 날.
청영사 본부에서는 입교식에 앞서 입교생들에게 복장 규정, 드레스코드를 전해 주었다.
무조건 어두운 계열의 정장.
정장을 입지 않으면 입장조차 불가능하다는 모양이었다.
‘정장은 오랜만이네.’
유지한은 전달받은 드레스코드에 맞춰 옷장에서 검은색 정장을 꺼내 입었다.
평범한 회사원도 아니고, 오랜만에 몸에 걸친 정장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니 그리 나쁜 비주얼은 아니었다.
“이거 어떻게 매는 거야.”
그런데 딱 하나 거슬리는 것은 바로 넥타이.
넥타이는 이렇게 매도 불편하고, 저렇게 매도 불편했다.
간신히 그럴듯한 모양을 갖췄으나 목을 너무 조이는 것이 영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냥 가자.’
유지한은 넥타이를 매지 않고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는 잠시 후 집을 빠져나와 택시를 잡았다.
그와 자주 만나는 택시기사는 택시에 올라타는 유지한의 차림새를 곁눈질했다.
“오늘 어디 가시나 봐요?”
“예. 조금 중요한 자리에 갑니다.”
“정장이 잘 어울리세요.”
“그래요?”
“역시 몸이 좋으셔서 태가 나네요.”
유지한은 작게 웃었다.
기사의 칭찬이 썩 나쁘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택시가 도로를 달려 도착한 곳은 입교식이 진행되는 커다란 호텔의 앞.
그곳은 레드홀이 소유한 호텔로, 오늘 하루 동안은 청영사 입교식을 위해 일반 손님을 받지 않고 있었다.
“음…….”
택시에서 내린 유지한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김시후와 민유리와는 이 앞에서 만나 합류하기로 했었다.
‘이쯤에서 기다린다고 했는데.’
호텔 정문 앞에는 정장을 입은 채 휴대폰을 내려다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주변에 있는 사람들 역시 유지한과 비슷한 처지인 것이었다.
“형!”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한쪽 손을 위로 번쩍 들어 올린 김시후였다.
“먼저 와 있었구나.”
“네.”
김시후는 귀엽게 생긴 붉은 나비넥타이에 깔끔한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머리에 쓴 비니 모자만 전과 달라지지 않은 채였다.
“유리 씨는 왔어?”
“저거 아니에요?”
부우웅—
때마침 민유리의 트럭이 호텔 앞으로 다가왔다.
운전석에서 내린 그녀는 호텔 직원에게 발레파킹을 맡겼다.
이어서 칠라가 뒤 칸에서 내렸다.
“……?!”
그런데 놀랍게도 칠라는 몸에 정장과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다.
테이머의 펫도 드레스코드를 따라야 한다는 규정은 없을 텐데 말이다.
“유리 씨!”
“아.”
유지한을 발견한 민유리와 칠라가 그에게 다가갔다.
유지한은 다가온 그녀를 향해 말했다.
“칠라가 옷을 입고 있네요?”
“전에 재미 삼아 맞춰 둔 옷이에요.”
커다랗고 통통한 친칠라의 몸에 맞춰 제작된 수제 정장.
마치 게임에나 나오는 캐릭터가 옷을 바꿔 입은 느낌이었다.
유지한은 자신을 바라보는 칠라를 살폈다.
여전히 무표정인 녀석은 자신이 옷을 입는 것에 그리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갑옷은 못 입나?’
앞으로 칠라는 유지한 파티의 탱커를 맡게 될 예정이었다.
따라서 몸에 갑옷을 입는 게 가능한지 의문이었는데.
정장 같은 옷을 입는 것에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면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조만간 얘기를 꺼내 봐야겠어.’
칠라의 가죽이 상당히 질기고 단단한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저 거구에 단단한 중갑옷을 입힐 수만 있다면.
그리고 갑옷을 입고도 전과 같은 기동성을 보여 줄 수 있다면…….
스킬을 사용하는 다른 탱커들과도 충분히 꿀리지 않으리라.
“그나저나 유리 씨는 정장이 참 잘 어울리시네요.”
“고마워요.”
하얀 셔츠 위에 검은색 재킷을 두르고, 몸에 딱 맞는 정장 바지를 입은 민유리.
굽이 높지 않은 구두를 신었는데도 긴 다리가 돋보이는 그녀는 정장이 썩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투박한 장비를 입어도 이상하지가 않더라니.’
유지한의 눈에는 과장 조금 보태서 패션 화보지에 실려도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크흠.”
“큼, 큼…….”
주변에서 대기하던 남자들의 시선은 커다란 칠라를 한번 훑었다가, 모두 민유리에게 꽂히고 있었다.
유지한은 그들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훌륭한 능력을 떼어 놓고 봐도 충분히 매력적인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게 잘난 사람이 꿀잼에 와 준 것이 그저 고맙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지한 씨?”
“예?”
“넥타이는 어디 갔어요?”
민유리가 유지한의 허전한 목을 가리켰다.
그러자 유지한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맬 줄 몰라서 그냥 가져만 왔어요.”
“잠깐 이리 줘 보세요.”
“예?”
앞으로 내밀어진 민유리의 손.
잠시 머뭇거리던 유지한이 주머니에 대충 쑤셔 둔 넥타이를 그 위로 얹었다.
“좋은 넥타이 같네요. 안 매면 아깝겠어요.”
민유리는 엉킨 넥타이를 풀어내고, 유지한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그리고는 길게 잡은 넥타이를 그의 목에 둘렀다.
서로 간 거리가 너무 가까워지자, 조금 당황한 유지한이 그녀에게 말했다.
“그……. 넥타이 맬 줄 아세요?”
“어릴 때부터 저희 엄마가 아빠한테 매드리는 걸 옆에서 자주 봐왔거든요. 덕분에 알고 있어요.”
유지한은 넥타이를 매기 편하도록 턱을 살짝 들어 올린 채, 민유리를 바라봤다.
그녀는 넥타이를 매는 작업에 완전히 몰두하고 있었다.
‘꽃향기인가.’
가까이 다가온 민유리에게서는 은은한 꽃향기가 풍겼다.
몸에 향수를 뿌리고 온 모양이었다.
유지한은 독한 향수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지금 맡아지는 향은 불편하지 않고, 되레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느꼈다.
“됐다.”
“오…….”
민유리가 매듭을 지은 넥타이를 쭉 당겼다.
완성된 넥타이는 어디 하나 흐트러짐 없이 매우 깔끔한 모습이었다.
“감사합니다.”
“뭘요.”
유지한은 민유리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저 부러운 놈.’
‘좋겠다!’
‘나도 저런 여자친구가 있었다면!’
주변 남자들은 그를 아주 무서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유지한은 그저 파티원들과 대화하며 웃을 뿐이었다.
*****
길드 케로즈의 본사.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 최상층에 도착한 이미아는 앞으로 뚜벅뚜벅 걸었다.
‘분명 쉬기로 한 날인데…….’
오늘은 이미아가 쉬기로 정해 놓은 휴식의 날.
그런데 갑자기 길드장 박중섭에게 부름을 받은 그녀는 아주 뚱한 표정이었다.
똑똑.
노크를 두 번 한 그녀는 안쪽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사장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여느 때처럼 자리에 앉아서 일에 열중하는 박중섭이 보였다.
“미아 왔어?”
“왜 부르신 겁니까.”
퉁명스럽게 튀어나오는 목소리.
휴식을 방해받은 이미아는 표정은 물론이고 말투도 그리 친절하지 못했다.
하지만 박중섭은 그녀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것에 크게 개의치 않으며 말했다.
“잠깐 앉아.”
“아뇨. 이야기 빨리 끝내고 다시 쉬러 갈게요.”
“성격 급하긴…….”
“느긋하게 얘기하실 거면 쉬는 날 부르지 마셨어야죠.”
박중섭은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을 멈췄다.
그리고 이미아를 바라봤다.
“내가 최근에 이상한 물건을 받았어.”
“그게 뭔데요.”
잠시 이미아를 바라보던 박중섭은 책상에 놓인 갈색 서류봉투를 잡았다.
이미 뜯긴 흔적이 있는 그 봉투를 열어서 어떤 종이 같은 것을 꺼냈다.
“네가 직접 봐봐.”
박중섭이 종이 몇 장을 이미아를 향해 건넸다.
이미아는 앞으로 다가가 그 종이를 받았다.
“……?”
아주 매끈한 재질의 종이는 다름 아닌 무언가가 찍혀 있는 사진들.
이미아는 뒷면에 있는 사진들을 살폈다.
한장 한장 사진을 뒤로 넘기던 그녀는 이내 5번째 사진에서 표정을 크게 찌푸렸다.
“이건…….”
어느 남성과 여성이 건물 앞에서 대화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에 찍힌 여성은 이미아 본인.
그리고 남성은 얼마 전에 케로즈를 떠난 유지한.
침입자가 등장한 당시 주변에 있던 누군가가 사진을 찍은 모양이었다.
“이게 뭐예요?”
“영웅들의 가십(Gossip)을 다루는 기자가 케로즈로 보내온 사진이야.”
“그래서요.”
“내 눈이 장애가 아니라면, 저 남자는 유지한이겠지?”
“맞아요.”
이미아는 유지한과 만났다는 사실을 숨기려 들지 않았다.
그가 케로즈를 나갔다고 해도 그와 만나는 건 어디까지나 이미아의 자유였으니까.
박중섭은 몸을 앞으로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너, 지한이랑 연애하니?”
“아닌데요.”
박중섭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이미아의 발언을 의심하는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 유지한은 절대 아니야. 이건 인생의 선배로서 충고하는 거니까 새겨들어.”
“사귀는 거 아니에요.”
“난 항상 너의 의사를 존중한다. 하지만 네가 그런 놈이랑 사귄다는 건 썩 달갑지가 않아.”
“그냥 길가다 우연히 마주친 것뿐이에요.”
“노래방은 왜 갔어?”
이번에는 이미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노래방에 간 것도 알고 계세요?”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노래방을 왜 갔냐고.”
“딱히 대화를 나눌 곳이 없어서요. 이런 식으로 사진이 찍힐까봐.”
“…….”
그녀의 대답에 박중섭은 입을 다물었다.
어느 정도 말이 되는 소리인 덕분이었다.
그가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김현태 파티는 우리 길드 최고의 파티야. 괜히 수준 낮은 영웅이랑 어울렸다가는 파티 이미지에 흠이 갈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
“……할 말은 그게 끝이에요?”
“그래. 기사 나오는 건 내가 막아 줄 테니까 그만 가서 쉬어.”
겨우 이딴 얘기를 하려고 휴식을 방해한 걸까.
기분이 확 나빠진 이미아는 고개를 까닥 숙여 인사하고 뒤로 돌았다.
그리고 문을 나가기 직전.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
“길드장님. 그 사진 누가 보낸 거죠?”
“그건 왜?”
“다음부터 남의 사진 함부로 찍으면 카메라를 부숴 버릴 거라고 전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