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이종족 (2)
남자는 주어진 시간에도 계속 머뭇거리기만 했다.
“내가 따라오는 건 알고 있었을 텐데.”
“…….”
스릉—
유지한이 검을 꺼내 들자 그는 몸을 움찔했다.
하지만 여전히 굳게 닫힌 입은 열리지 않았다.
표정을 차갑게 굳힌 유지한은 앞으로 검을 겨누며 말했다.
“길드 꿀잼에 소속된 영웅의 질문에 당신이 묵비권을 행사하는 바, 나는 범죄 현장을 발견한 영웅으로서 당신을 체포하는 것부터 최대 생사여탈권까지 가져갈 수 있다.”
“그런……!”
유지한은 그에게 자신의 짤막한 신분과 영웅의 원칙을 알렸다.
얼굴이 창백해진 그가 소리치듯 말했다.
“나, 나는 마력이 없는 시민이라고!”
“그리고 납치범이지.”
“큭!”
정황상 이들은 이종족을 납치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영웅은 유사시에 경찰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권한을 가진다.
따라서 몬스터가 아닌 인간에게 힘을 행사하더라도 향후 정당한 대처임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영웅은 크게 처벌받지 않는다.
그것이 상대의 목숨을 빼앗는 일이라도 말이다.
의미 없는 살상은 피하는 게 기본이지만, 힘을 가진 영웅들이 시민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생긴 원칙이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설명해줘야겠어.”
“……젠장.”
남자는 날카로운 검 끝이 목 바로 앞까지 오고 나서야 조금씩 입을 열었다.
*****
조명이 3개를 제외하고 모두 꺼져있는 오피스텔의 일자 복도.
폭이 좁고 기다란 복도 끝에 커다란 창문이 달렸지만, 옆 건물에 의해 햇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공간.
하얀 마대자루를 들고 있는 남자는 그 복도에 자루를 내려놓았다.
“으…….”
끈으로 꽁꽁 묶여 있는 마대자루에서 미약한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서로를 바라보던 남자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묶은 끈을 조금씩 풀어냈다.
안에서 나온 것은 교복을 입은 고양이 귀 수인이었다.
“그만 자고 일어나.”
툭, 툭.
험상궂게 생긴 남자 한 명이 손바닥으로 여학생의 볼때기를 거칠게 두드렸다.
그러자 눈을 감고 있던 그녀가 눈을 떴다.
“……누구?”
“글쎄. 누굴까?”
“……!”
피식하고 웃는 남성들.
여학생은 자신이 기절하기 직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려냈다.
“이놈들!”
손과 발이 묶여 있는 그녀는 몸의 마력을 끌어올렸다.
신체 나이는 평범한 학생들과 같지만, 지구로 넘어오기 전부터 마력을 다루던 그녀였다.
아까는 너무 놀란 나머지 별다른 대처를 하지 못했지만.
정신을 되찾은 지금은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마력이 안 움직여?!’
그녀는 자신의 마력으로 마법이라는 현상을 만드는 것에 실패했다.
마력이 흐르는 통로에 마치 단단한 자물쇠라도 잠긴 느낌이었다.
“익! 이익!”
“흐흐…….”
“애쓴다, 애써.”
당황한 그녀를 보며 히죽히죽 웃던 한 남성이 말했다.
“잘 안 되지?”
“당신들, 대체 무슨 짓을……!”
“수인에게 직빵인 마력 억제제를 먹여 놨지. 적어도 하루 이틀은 마법을 포기해야 할 거다.”
“어쩌면 평생일지도?”
“얀마, 그걸 지금 말하면 어떡해.”
마력은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고, 눈앞에는 자신을 비웃는 사람들까지.
여학생의 눈에 점점 두려움이 깃들었다.
그것에 만족한 한 남성이 말했다.
“하여간 이종족은 새파랗게 어린 애들도 반항만 심해 가지고……. 이래저래 손이 많이 간단 말이야.”
“그만 장난치고 방으로 데려가.”
“장난? 장난은 시작도 안 했어요. 그리고 오랜만의 수확인데 이 정도는 괜찮잖아요.”
수확.
남자들은 그녀를 납치한 것을 수확이라고 표현했다.
주변의 대화를 들은 여학생은 자신에게 벌어진 상황을 인지했다.
정확한 목적은 모르겠지만, 이번 일에 금전이 걸려 있는 것은 분명했다.
“……돈을 원하시는 건가요?”
“그렇지.”
“쟨 무슨 상품이랑 대화를 하려 그래.”
“잠깐 기다려 봐요. 얘가 어느 부잣집 딸일지도 모르니까.”
“미친놈.”
“우리가 고객한테 넘길 테니까 그쪽은 들어가서 쉬기나 해.”
“내가 4이고 너희가 6이다. 알고 있지?”
“예, 예.”
“정산은 똑바로 해. 삥땅 치면 뒤질 줄 알고. 나중에 다 확인할 거야.”
“아주 잘 이해했습니다요.”
할 말을 마친 남자는 어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제 자리에 남은 건 처음에 여학생을 납치했던 세 사람.
눈에 두려움이 깃든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남성이 말했다.
“꼬마야. 방금 돈이라고 했냐?”
“……네.”
“얼마나 줄 수 있는데?”
“부모님이 부자야? 어디 회사 사장이라도 돼?”
“도, 돈을 주시면 보내 주실 건가요……?”
“한번 액수는 들어보고.”
“아저씨들은 말이 아주 잘 통하는 사람들이거든.”
“…….”
결국에는 돈 때문에 벌어진 일.
금액만 충분하다면 그들은 그녀를 돌려 보내줄 의사가 있었다.
어차피 이번 일만 잘 마무리되면 한국을 영원히 떠나려고 했으니까.
“제 통장에…….”
“…….”
“200만 원 정도는 있는데…….”
금액을 들은 남자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와아! 200만 원?!”
“세상에! 우리한테 200만 원이나 줄 수 있다고?!”
“주말마다 아르바이트하면서 제 전 재산이에요!”
“어휴, 정말 고생하면서 모은 돈이구나!”
남자들의 말에 여학생은 희망을 품었다.
어쩌면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그런 여학생의 반응을 즐기던 그들은 이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거 어쩌냐.”
“네?”
“우린 널 9억에 팔기로 했거든.”
“……!!”
“9억은 못 주지?”
9억.
도저히 평범한 학생이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특히나 이세계에서 지구로 혼자 넘어와 부모가 없는 그녀에게는 더욱 그랬다.
“더 할 말 있어?”
“…….”
“야. 테이프 줘.”
옆을 돌아본 남성이 동료에게 청색 테이프를 건네받았다.
그는 길게 뜯어낸 테이프를 이빨로 끊은 뒤, 그것을 여학생의 얼굴로 가져갔다.
“자, 잠깐만요!”
“시끄러우니까 그만 닥쳐.”
“……으읍!”
여학생의 입이 테이프로 봉쇄되었다.
“읍! 으읍!”
“40분 뒤에 고객님 오신다니까 잘 준비해 놔.”
“알고 있어.”
“반항 너무 심하면 그냥 재워도 좋고.”
바닥에서 힘껏 버둥거려 보지만, 몸이 끌려가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그들이 여학생을 질질 끌며 어느 방으로 들어가던 순간이었다.
쿵! 쿵쿵!
누군가가 굳게 잠겨 있는 오피스텔 복도의 문을 두드렸다.
여학생을 끌고 가던 남자들이 자리에 멈춰 섰다.
“뭐야?”
“더 들어올 사람 없는데?”
“운전하던 애한테 돈 안 줬어?”
“현찰로 따따블 줬지. 걘 알아서 가기로 했잖아.”
“문은 잠가 놨고?”
“잠갔지.”
뒷세계의 일에서 시간 약속을 어기는 것은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번 고객은 전에도 몇 번이나 물건을 사 갔다고 알려지는 인물.
이런 거래에 밥 먹듯이 익숙한 사람들은 좀처럼 성격을 종잡을 수 없었다.
쿵! 쿵! 쿵!!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결코 호의가 담겨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네가 가봐.”
그들 일행 중 하나가 복도 입구로 향했다.
문 앞에 달린 카메라에는 뒷짐을 진 남성이 서 있었다.
“누구십니까?”
“오늘 여기 방문하기로 한 사람.”
“……알파님?”
오늘 오피스텔을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이종족을 사가기로 한 알파라는 가명의 고객뿐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다니.
“물건은 어디 있지?”
“반항이 심해서 아직 준비 중입니다.”
“반항 정도야 귀여운 애교에 불과하지. 내가 직접 교육할 테니까 이 문이나 열어 봐.”
“…….”
문 안쪽에서 카메라가 비추는 화면을 보는 남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알파라는 고객은 분명 돈 많은 50대의 부호라고 들었거늘.
화면에 비치는 남자는 너무나도 젊었다.
사진이라도 미리 받았더라면 알아볼 수 있었을 텐데.
“미리 정해 둔 암호를 들려주시겠습니까?”
“……지금 날 의심하는 건가?”
“실례지만, 그렇습니다.”
*****
“쯧쯧…….”
문 앞에 서 있는 유지한은 무척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안 열어 주네.’
차량의 운전자는 뒷좌석에 탄 이들이 유지한의 얼굴을 보지 못했을 거라고 말했다.
그에게 캐낸 정보로 잘하면 쉽게 통과 하나 했더니…….
그렇게는 안 되는 모양이었다.
그는 한 손으로 휴대폰을 들어서 김시후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김 사장. 지금 어디야?”
—……김 사장은 대체 누구에요?
“쓸데없는 말은 됐고. 지금 어디냐고.”
—형이 말한 장소로 가는 중이에요.
“저번에 말한 업체 찾아왔는데 서비스가 너무 별로야! 도착까지는 얼마나 남았나?”
—적어도 20분 이상 더 걸릴 거 같은데요.
“먼저 안에 들어가 있을 테니까 2층으로 올라와.”
—사정은 모르겠지만……. 먼저 들어가서 싸우신다는 거죠?
“어어, 맞아.”
상황을 전달하기 위한 전화.
김시후는 유지한의 의도를 눈치챘다.
—최대한 빨리 갈게요.
“이따 보자고.”
통화를 끊은 유지한은 다시금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물건 품질에 따라 오늘 대금을 2배까지 쳐주려고 했는데, 이렇게 섭섭하게 나온다 이거지.”
“……!”
“내가 이런 거래를 한 두 번 하는 것도 아니고. 참 실망이 커.”
9억의 2배라면 18억 원.
수수료 따위로 뗄 건 다 떼더라도, 일 처리를 맡은 입장에서 엄청난 이득을 챙길 수 있었다.
확실히 돈이 많은 사람 중에는 돈보다 자존심이 중요한 사람이 있긴 했다.
남자는 자신의 동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냥 열어 줄까?”
“안 돼!”
“빨리 암호 대라고 해. 너무 수상해.”
끝까지 암호를 요구하는 그들이었다.
결국, 방법이 없어진 유지한은 뒤에 뒀던 손을 앞으로 가져왔다.
등에 가려져 있던 그의 검이 카메라에 비쳤다.
“그게 뭡니까?”
“알 거 없어.”
“네?”
유지한은 검으로 철문을 내려쳤다.
깡!
검에 실린 마력을 견디지 못한 문에 기다란 칼자국이 그어졌다.
가장 깊게 파인 중간 부위에는 작은 구멍이 생길 정도였다.
“뭣?!”
“미친!”
기다란 칼날이 문을 찢으며 안쪽으로 쑥하고 들어왔다.
벌컥!
“뭐야?”
“무슨 일이야?”
오피스텔 복도의 문이 여럿 열리며 성인 남성들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날카로운 과도나 기다란 야구방망이, 심지어 손도끼를 든 사람도 있었다.
끼기기긱—!
유지한이 손으로 잡아당기는 힘에 의해 문에 뚫린 구멍이 넓게 벌려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오피스텔 복도로 들어섰다.
“방금 여기로 납치한 학생 있지?”
“…….”
“내놔.”
“…….”
흉기를 든 10명의 남자와 유지한은 서로를 주시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상대는 검을 든 영웅.
하지만 수적 우위에 있는 남자들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죽어!”
입구와 가장 가까운 문 앞.
과도를 꺼내든 남자가 유지한에게 덤벼왔다.
유지한은 몸을 틀어 그의 공격을 흘려버리고, 과도를 잡은 손을 검으로 그어 버렸다.
남자는 칼을 떨어뜨리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이런 씨팔!”
“뭣들 해! 덮쳐!”
각자 무기를 든 이들이 화를 내며 앞으로 돌격했다.
쉭!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손도끼가 유지한의 얼굴 쪽으로 떨어졌다.
야구방망이가 유지한의 옆머리를 목표로 휘둘러졌다.
서로 다른 수많은 무기의 향연!
그러나…….
푹!
유지한은 그 모든 공격을 쳐내고, 도리어 반격했다.
“끄아아악!”
어깨에 검이 박힌 남자가 고통 섞인 비명을 내질렀다.
아무리 애를 써 봤자 그들은 평범한 일반인.
영웅 학원에서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MA에 이르기까지,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많은 훈련과 실전을 겪어온 영웅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