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괴미굴 (3)
괴미굴의 식량창고.
그곳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의 개수만 약 10개가 넘었다.
영웅들은 근래 계양산에서 실종 신고가 걸린 사람들이 여기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여기 하나 더 있습니다.”
“여기도요!”
형체를 알 수 없을 만큼 갈가리 찢어진 천조각을 합치면, 얼마 전까지 이곳에 있었던 인간의 수는 최소 20명을 넘겼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옷이 아니라 영웅의 장비 같습니다.”
“세상에……!”
평범한 옷이 아니라 특수 제작된 영웅의 장비까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즉, 이곳에 끌려온 영웅도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인지한 모두가 무기를 들고 주변 경계를 강화했다.
인간은 물론이고 영웅까지 먹어치운 녀석들이 언제 등장할지 알 수 없었다.
“시욱이 형.”
“…….”
굳은 표정으로 옷가지를 내려다보던 강시욱이 고개를 들었다.
“지금 휴대폰 동작하시는 분 계십니까?”
그의 질문에 대답하거나 손을 드는 사람은 없었다.
괴미굴로 들어온 이후부터 모든 통신 장비는 동작하지 않았다.
결국, 속으로 결정을 내린 강시욱이 말했다.
“괴미굴의 크기와 피해 규모가 저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큽니다. 따라서 지금부터 공략보다는 생존을 우선시하여 왔던 길로 돌아가겠습니다.”
“네!”
“옷들도 가져갈까요?”
“아니요. 이동에 방해가 되니까 두고 갑시다.”
들고 있던 옷가지를 내려놓는 사람들.
유지한은 휴대폰을 쥔 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여기 있는 옷과 장비들은 제가 휴대폰 카메라로 찍어 놨습니다. 향후 피해자들을 파악하는 데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겁니다.”
“잘 하셨습니다.”
강시욱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던 때였다.
“허억, 허억!”
“……!”
바깥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영웅들이 즉시 움직임을 멈추고 식량 창고의 입구를 주시했다.
‘사람?’
‘한국인인가?’
입구로 들어온 것은 분홍색 등산복을 입고 있는 하얀 머리의 여성이었다.
갑자기 안으로 뛰어들어온 그녀는 앞으로 철푸덕 넘어졌다.
그리고는 떨리는 손길로 입구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영웅의 신발을 잡으며 말했다.
“제, 제발 저 좀 살려 주세요!”
“이제 괜찮습니다. 진정하세요.”
“제 친구들이 다 죽었어요. 죽었다고요……!”
투명한 눈물을 흘리는 눈동자와 전신에 묻어 있는 흙. 잔뜩 메마른 입술까지.
영웅들은 흥분을 멈추지 못하는 그녀를 최대한 진정시켰다.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스른 그녀와 약간의 대화를 통해, 공략대는 그녀가 약 2주도 더 전에 괴미굴로 끌려온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2주 넘게 여기에 계셨다고요?”
“……벌써 2주가 넘었나요? 음식을 몰래 먹는 것 외에는 숨어서 잠만 자느라 잘 모르겠어요.”
그녀는 지하에 계속 갇혀 있던 탓인지 시간 감각도 이상해진 모양이었다.
강시욱은 괴미의 피해자인 그녀를 일행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
‘너무 수상한데.’
그러나 유지한은 그녀를 수상하게 여겼다.
괴미가 가득한 괴미굴에서 일반인이 살아남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2주 동안 눈에 보이는 건 가리지 않고 다 먹어치웠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뭘 먹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묘하게 골프장에서 도망치던 사람을 만났던 때가 떠오르는 그였다.
“저런…….”
하지만 같은 파티의 김시후마저 그녀의 사연에 안타까워하고 있었으니.
반대 의견을 내봤자 좋은 소리는 들을 수 없었기에 침묵했다.
*****
다시 뒤로 돌아가기 시작한 괴미굴 공략대.
그러나 그들은 15분 만에 난관에 부딪혔다.
“길이 막혔어?”
마법으로 파냈던 통로가 괴미조차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꽉 막혀 있었다.
모양새를 보니 메꿔진 지는 얼마 지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괴미의 발자국이 있습니다.”
바닥에는 생긴 지 얼마 안 된 여러 괴미의 발자국이 있었다.
역시 녀석들의 짓이 분명했다.
“이제 어쩌죠?”
“…….”
방향을 잃어버린 공략대였다.
그때 괴미에게 납치당했던 여성이 말했다.
“제가 길을 알고 있는데…….”
“네?”
여기서 오랫동안 생존했던 그녀는 괴미굴의 구조에 대해서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하고 있었다.
입구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지만 혼자 나가 봤자 위험에 노출되는 건 그대로이기 때문에, 그녀는 계속 숨어 있었다고 말했다.
“이쪽이에요.”
영웅들은 조금 의심을 하면서도 당장 방법이 없었기에 그녀의 길 안내를 따랐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30분간 괴미를 한 마리도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
“이 넓은 길을 다 외우셨나 보네.”
“그러니까요.”
“다음은 저쪽이요!”
점점 그녀를 신뢰하기 시작하는 영웅들이었다.
그리고 또다시 등장한 갈림길에서 그녀가 다음 방향을 지시하는 순간…….
“잠시만요.”
유지한은 모두를 멈춰 세웠다.
의문 섞인 시선들이 그에게 꽂혔다.
“저는 저쪽으로 가고 싶지 않습니다.”
“네?”
그는 등산복의 여성이 지시한 방향으로 가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자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요?”
“이제껏 아무 말도 없다가 갑자기 왜 그러신대?”
“또 아까처럼 나대시려고?”
문경진의 지인들은 유지한을 비아냥거렸다.
길을 안내하는 여성을 믿는다기보단, 그냥 유지한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저길 보십시오.”
유지한은 아직 마법으로 넓히지 않은 앞쪽 구멍을 가리켰다.
김시후의 라이트 마법이 그가 가리킨 곳으로 이동하여 주변을 비췄다.
“잘 보면 바닥 곳곳에 짙은 회색의 가루가 떨어진 게 보이죠? 저건 갓 우화한 일괴미가 입에서 떨어뜨린 분비물입니다.”
“괴미굴 안에 그런 게 있는 건 당연한 거잖아요!”
“문제는 당신을 따라갈수록 흔적들이 뚜렷해지고 있다는 겁니다. 저 분비물은 원래 시간이 지나면 주변의 흙과 구분할 수 없는 색깔로 변하거든요.”
“하지만 아직 괴미가 나오지 않았는데요?”
“그래서 더 이상하죠. 저런 흔적이 보이고 이만큼 이동했으면 적어도 한두 번쯤은 마주쳤어야 하니까.”
“허, 그쪽은 저희가 괴미와 만나길 바라는 거 같네요.”
“지금처럼 잠잠할 때가 더 위험한 법입니다.”
“그런 억측을……!”
공략대의 결정권을 가진 강시욱은 유지한에게 말했다.
“지금 하시는 말씀이 정말입니까?”
“예. 확신합니다. 이번 MA에서 활동하기 전에 괴미와 관련된 연구 자료를 여러 건 찾아봤거든요. 그리고 아까 전부터 느낀 건데, 지금 저희는 괴미굴을 빠져나가는 게 아니라 땅속을 더 깊게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흠…….”
결정권을 가진 강시욱이 고민에 빠진 사이.
유지한은 다시금 샘플링의 결과를 확인했다.
<—왼쪽 길로 들어가면 내 목숨이 위험해질 확률>
<29%>
여성이 가리킨 방향으로 가면 목숨이 위험해질 확률은 무려 29%.
그녀의 안내를 따를 때마다 점차 증가하던 확률이 이번 갈림길에서 무려 30%에 가까워졌다.
괴미를 마주치지 않은 것과는 별개로 상황이 점점 더 위험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이상은 안 돼.’
이 정도의 위험 지수라면, 김현태 파티에서도 조금 욕을 먹는 한이 있어도 파티의 선택을 재고하도록 했었다.
“저쪽으로 가면 출구가 있다잖아요.”
“그 전에 우리가 위험해질 수 있죠.”
“그건 그쪽 생각일 뿐이고요.”
“전 영웅으로서의 제 생각을 믿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유지한이 여성을 바라봤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솔직하게 말하죠. 저는 당신이 너무 수상합니다.”
“제, 제가 왜요?”
“실례지만 일반인이 괴미굴에서 혼자 2주 넘게 생존했다는 것이 잘 믿기지 않습니다.”
“말을 해도 꼭 그렇게 하셔야 해요?!”
유지한과 다른 사람들과의 말싸움이 계속됐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끝까지 이분을 따르시겠다면, 지금부터 제 파티는 공략대와 따로 떨어지겠습니다.”
“당신 미쳤어요?”
“우리는 영웅입니다. 이런 현장에서 바깥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는 일반인의 의견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게 썩 좋은 선택은 아니죠.”
“후우…….”
유지한의 강경한 태도에 강시욱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주장도 따지고 보면 마냥 틀린 것은 아니었으니까.
등산복의 여성과 유지한을 번갈아서 보던 강시욱이 말했다.
“지한 씨를 따라가죠.”
“하지만……!”
“반론은 받지 않겠습니다. 지한 씨의 말도 일리가 있으니까요. 단, 이 괴미굴을 빠져나가는 과정에서 피해가 생길 경우 유지한 파티에서 어느 정도 책임을 물어야 할 수도 있다는 점, 알아두세요.”
의견을 무시당한 여성은 유지한을 노려봤다.
하지만 결정권자가 저렇게까지 나온다면 어쩔 수가 없었다.
“다음은 저쪽…….”
“아니요. 이쪽입니다.”
“…….”
그 뒤로도 여성과 유지한의 선택은 갈렸다.
그때마다 강시욱은 유지한의 편을 들어주었다.
중간에 피해가 발생하면 유지한 파티에게 책임을 묻게 된 상황이니, 그를 더 밀어주는 것이었다.
덕분에 유지한은 샘플링이 안내하는 방향으로만 전진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씨팔, 진짜!”
또다시 등장한 갈림길.
가만히 따라오던 등산복의 여성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튀어나왔다.
모두가 그녀의 돌발 행동에 놀란 가운데, 유지한이 그녀에게 말했다.
“왜 욕을 합니까?”
“진짜 계속 이럴 거예요?”
“예. 이럴 겁니다.”
“미친놈……!”
이상할 정도로 과감해진 그녀의 말투와 행동.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흔든 그녀가 앞으로 달렸다.
그곳은 유지한이 피하려던 방향이었다.
츠츠츠츠—
분명 사람의 몸이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좁은 통로.
하지만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는 그녀는 그 좁은 구멍을 그대로 통과했다.
‘아티팩트?’
마력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아티팩트일 확률이 높았다.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영웅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때.
휘! 휘! 휘!
그녀가 들어간 방향에서 특이한 휘파람 소리가 났다.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영웅들이 숨을 죽이고 앞쪽을 바라봤다.
사사삭—
아직 보이지는 않지만, 앞에서 괴미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뒤로 가!”
강시욱의 다급한 외침에 모든 인원이 뒤로 후퇴했다.
지금처럼 비좁은 공간에서 괴미와 싸우기에는 불리했다.
다행히 뒤쪽에는 식량창고처럼 넓은 방 같은 것이 있었다.
영웅들은 그곳에서 자리를 잡고 앞에서 나올 괴미를 기다렸다.
딱! 딱! 딱! 딱!
괴미들이 턱을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에는 병정괴미와 일괴미, 수괴미도 섞여 있었다.
그리고 가장 안쪽에서 좁은 통로를 망가뜨리며 나오는 것은…….
“여왕괴미.”
이 괴미굴의 여왕이었다.
다른 개체보다 유독 거대한 몸집과 등에 달린 날개까지!
녀석은 이 괴미굴에서 가장 높은 존재가 맞았다.
“아하하!! 사악한 영웅들은 물렀거라!”
“……?!”
조금 전 달려나간 등산복의 여성은 그 여왕 괴미의 머리 위에 올라타 있었다.
‘저게 뭐야.’
잔뜩 신이 난 그녀는 다른 괴미에게 공격받지 않았다.
되레 가장 높은 곳에 서서 놈들을 조종하는 분위기였다.
김시후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저거 인간 맞아요?”
“…….”
여왕괴미에 올라탄 여자가 인간이 맞는가.
유지한은 그 질문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어쩌면 인간의 탈을 뒤집어쓴 몬스터일지도.
“여기서 싸우겠습니다.”
강시욱은 저들과 맞서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당장 눈에 보이는 괴미만 4, 50여 마리.
이제껏 뒤에서 지켜보던 4급 파티들도 싸움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저는 제 파티원과 움직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시후야. 나한테 라이트 하나 붙여.”
“네!”
유지한은 강시욱 파티와 떨어져서 김시후에게 붙었다.
강시욱은 그것이 내심 아쉬운 표정이었지만 반대하지는 않았다.
딱딱! 딱딱!
괴미가 많은 탓에 턱을 부딪치는 소리가 겹쳐 들렸다.
그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던 강시욱이 말했다.
“공격!”
[라이트]
4급 마법사들이 라이트 마법으로 내부를 밝히는 사이, 전사들은 괴미에게 달려들었다.
3급 마법사는 라이트를 사용하면서 다른 마법을 동시에 사용하는 멀티 캐스팅을 준비했다.
촥!
가장 먼저 괴미를 사냥한 것은 유지한이었다.
그는 김시후가 붙여준 라이트 마법으로 자신이 사냥한 개체를 내려다봤다.
“……!”
일괴미와 비슷하면서도 몸에 살짝 붉은기가 있는 녀석이었다.
불안한 예상이 맞았던 것일까.
옛 기억을 더듬어 녀석의 정체를 파악한 그가 외쳤다.
“불괴미가 섞여 있습니다!”
“뭐라고요?!”
그것은 다름 아닌 3급 몬스터에 해당하는 불괴미.
평범한 불개미가 내뿜는 개미산, 포름산(formic acid) 보다 훨씬 강력한 괴미산을 입에서 쏘는 몬스터였다.
‘이놈들은 너무 위험해.’
단 한 방울이라도 살에 닿으면 불에 활활 타오르는 듯한 통증을 느낀다는 괴미산이었다.
어쩌면 여왕괴미보다 위험한 녀석들!
가장 먼저 없애지 않으면 커다란 방해가 될 것이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잠깐……!”
유지한은 강시욱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앞으로 돌진했다.
서걱—!
어두운 괴미굴 안.
작은 빛에 의지하는 유지한의 검이 한 치의 오차 없이 불괴미의 약점만을 베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