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호의
유지한과 이미아는 약 30분 정도 대화를 나누다가 방을 나왔다.
아직 접수대에 있던 노래방 사장은 유지한을 힐끗거렸다.
1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방에서 나오고, 아무 노래도 부르지 않고 시간을 보낸 것에 대한 의문이 담긴 눈초리였다.
‘이상하긴 하겠지.’
조금 뻘쭘해진 유지한은 이미아를 데리고 빠른 걸음으로 노래방을 떠났다.
그리고 그녀와 헤어지기 전.
노래방 근처에 있던 옷가게에 들렸다.
“하나 골라. 내가 사줄게.”
“왜?”
“도와줬으니까.”
옷에 튄 핏방울은 손수건으로는 지울 수 없었다.
세탁을 맡기기에는 시간이 걸리니, 도와준 보답으로 새 옷이라도 한 벌 사 입히려는 것이었다.
“별로 생각 없는데…….”
이미아는 옷가게에 진열된 옷들을 멍하게 바라봤다.
그녀에게 옷은 그저 몸을 가리기 위한 용도일 뿐.
그것으로 자신을 꾸미거나 하는 일에는 그리 관심이 없었다.
현장에 나설 때 착용하는 장비를 제외하면 집에 있는 옷장 하나를 간신히 채울 정도로 옷이 적은 그녀였다.
“그러면 내가 아무거나 고른다.”
유지한은 눈으로 진열대를 빠르게 스캔했다.
그리고 적당한 연분홍색 셔츠 하나를 골랐다.
눈대중으로 봐도 그녀의 몸보다 사이즈가 좀 큰 옷이지만, 최근에는 조금 크게 입는 오버핏도 유행이라고 하니 문제는 없을 터.
계산을 마친 그가 쇼핑백을 그녀에게 건넸다.
“자, 도와준 답례.”
“…….”
“원하면 다른 매장에서 더 비싼 거로 사줄게.”
“이거면 돼.”
이미아는 조용히 그의 선물을 받았다.
유지한은 계산에 사용한 카드와 영수증을 주머니에 넣으며 생각했다.
‘내가 얘한테 뭘 주는 건 처음이네.’
그가 그녀에게 무언가를 선물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1년에 한 번 있는 생일에도 그녀에게 간단한 축하 인사만 건넸었다.
반대로 그녀도 그의 생일에 따로 뭘 챙겨 주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지금 아니면 언제 주겠어.’
유지한 파티는 향후 2급 파티까지 올라가지 않는 이상 현장에서 김현태 파티와 마주칠 일은 없었다.
이마아와 개인적인 연락이나 만남을 많이 하는 사이도 아니니, 이렇게 우연히 마주친 순간이 아니면 사적으로 만날 기회도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녀가 상당히 뛰어난 영웅인 것을 생각하면 작은 선물 따위로 이 관계를 희미하게나마 유지하는 것은 그리 나쁜 일은 아니었다.
“오늘 도와줘서 고마워.”
“응.”
“다음에 또 보자. 조심히 들어가.”
옷가게 앞에서 인사를 건넨 유지한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
이미아는 종이 쇼핑백을 들고서 그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봤다.
바스락—
자리에 남은 그녀가 손에 든 쇼핑백을 열었다.
투명한 비닐에 쌓인 셔츠가 그 안에 들어있었다.
“선물…….”
쇼핑백 안을 들여다보는 그녀가 작게 미소 지었다.
가족이나 팬을 자칭하는 사람들이 케로즈로 보내 준 옷을 제외하고 다른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직접 선물 받은 옷이었다.
아까의 일이 답례를 바라고 나선 것은 아니었지만.
타인의 감사가 담긴 선물을 받는다는 건 꽤 기쁜 일이었다.
그리고 그 대상이 바로 옆에서 장기간 함께했던 동료라면 더욱 그랬다.
*****
남호열이 유지한과 김시후의 장비를 완성한 날.
두 사람은 물건을 퀵서비스로 보내 주겠다는 그의 말을 거부하고 직접 그의 공방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
유지한과 김시후가 공방으로 들어섰다.
공방의 계산대에 앉아있는 남호열은 인사에 대답하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그는 고개를 앞으로 숙인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김시후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어……. 호열 씨?”
“아! 어서 오세요!”
우당탕!
남호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그가 앉아있던 나무 의자가 뒤로 넘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런데 두 사람의 눈에 비친 그의 상태는 조금 이상했다.
기름기로 번들거리는 머리칼, 붉게 충혈된 눈.
그리고 눈 밑에 짙게 깔린 다크서클까지.
불과 며칠 사이에 몸 상태가 꽤 나빠진 듯한 모습이었다.
“어디 몸이라도 안 좋아요?”
“아하하……. 그게 티가 나나 보네요.”
손으로 눈가를 비비는 남호열이 멋쩍게 웃었다.
유지한은 설마 하며 물었다.
“늦게까지 철야 작업했어요?”
“예. 조금.”
“……저희 장비 때문에요?”
“계속 새로운 게 떠올라서 이것저것 시도해 보느라 그랬어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제가 하고 싶어서 했어요. 며칠 정도 푹 자면 회복되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피곤을 조금이라도 날려 버리기 위해 기지개를 쫙 켠 남호열이 유지한과 김시후를 바라봤다.
“물건부터 확인해 보시죠.”
“예.”
남호열은 작업대가 있는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커다란 상자를 양손으로 들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이겁니다.”
그가 자신 있게 상자의 덮개를 열었다.
그 안에는 완성된 두 사람의 장비가 들어 있었다.
“오…….”
유지한은 그중에서 자신의 장비를 살폈다.
어두운 색감의 가죽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상의와 하의.
살에 닿는 촉감이 보들보들해서 기분이 좋으면서도, 아주 탄탄함이 느껴지는 게 적의 공격으로도 쉽게 찢어질 것 같지 않았다.
“가슴팍의 이게 부리인가요?”
“네. 부리를 얇게 펼쳐서 심장과 복부를 가리는 용도로 사용했습니다.”
펼쳐진 괴물 닭의 부리는 가죽 위에 급소를 가리는 용도로 덧대어져 있었다.
가죽과 거의 비슷한 색으로 염색을 했는지 눈으로 보기에는 별로 티가 나지 않았다.
손으로 그 부위를 두들겨 본 유지한은 처음 괴물 닭을 마주쳤던 때를 떠올렸다.
녀석에게서 느꼈던 부리의 단단함이 그 갑옷에 그대로 담겨 있었다.
심지어 갑옷의 전체 무게도 그리 무겁지 않았다.
“가죽과 가죽을 잇는 데에는 방수 기능과 일부 독에도 내성을 가진 샤크 스파이더의 거미줄을 사용했습니다. 가죽의 틈 사이로 물이 스며드는 일은 거의 없을 겁니다.”
“훌륭하네요.”
“그리고 시후 씨의 갑옷도 비슷한 방식으로 제작하되, 위에 걸치는 로브는 주 소재로 레드 실크웜의 실을 사용했습니다.”
“와! 저 그거 입어 보고 싶었어요.”
새로운 장비를 만지는 김시후가 눈을 반짝였다.
레드 실크웜은 몬스터로 변한 누에의 종류 중 하나다.
그것들의 실은 색깔마다 등급이 다르며 마력의 흐름을 돕는 효과가 있는 덕분에 마법사 타입의 영웅들이 크게 선호하는 소재였다.
“위에 반짝거리는 건……?”
“부리 일부를 갈아서 뿌렸습니다.”
김시후의 로브 위에는 눈으로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입자가 고운 가루 같은 것이 골고루 뿌려져 있었다.
괴물 닭의 부리를 곱게 갈아서 특수한 처리로 천에 달라붙게 한 것이었다.
일종의 코팅이라고 부를 수 있는 방법으로 활동의 불편함은 최대한 줄이고 전체적인 내구도도 상승시킬 수 있지만, 작업이 매우 까다롭기로 알려진 방법이었다.
“어려운 작업도 무리 없이 해내시네요.”
“예전부터 연습을 많이 했었죠.”
“디자인도 꽤 멋져요.”
“제가 전에 그쪽에서 일을 하다 보니 욕심을 좀…….”
게임 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했던 그는 장비의 기능뿐만 아니라 미적인 요소도 놓치지 않았다.
두 갑옷 모두 다 이름있는 공방에서 만든 것과 비교해도 멋들어진 디자인이었다.
“뭐지?”
그때, 완성된 갑옷을 이리저리 살피던 유지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왠지 촉감이 익숙한데요.”
“…….”
제대로 된 질문이 아니라서일까.
남호열은 따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유지한이 그에게 물었다.
“설마 앵그리 야크의 가죽인가요?”
“맞습니다.”
“재료값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유지한은 몇 번의 검색을 통해서 앵그리 야크의 가격을 대충이나마 알고 있었다.
그리고 녀석의 가죽은 이번에 제작하는 장비에서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는 재료로 사용되기에는 조금 과한 면이 있었다.
“레드 실크웜의 실도 장비에 사용되는 것 중 가장 낮은 등급은 아닌 거로 압니다만.”
“…….”
또다시 침묵하는 남호열.
작게 한숨을 내쉰 유지한은 갑옷을 계산대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호열 씨. 조금 무리하셨군요.”
“제가 가져가는 비율을 줄였을 뿐. 적자는 아닙니다.”
“그게 그거죠.”
앵그리 야크의 가죽에 이어서 레드 실크웜의 실까지.
유지한은 남호열이 제작비보다 더 비싼 장비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3억도 되지 않는 돈으로 이런 품질을 보여 주는 게 쉽지 않았으니까.
이름난 공방에서 이런 장비를 구하려면 대장장이의 인건비를 포함해 적어도 6억 이상을 지불해야 할 것이었다.
유지한은 손으로 검의 손잡이를 툭툭 치며 말했다.
“저희가 받은 건 이 검 하나로도 충분합니다. 가게도 유지하기 쉽지 않으실 텐데 이러실 필요까지는 없어요.”
“…….”
“기존 주문 제작 비용보다 돈을 더 내겠습니다.”
“아니요.”
추가금을 제안하자 남호열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제 욕심으로 인한 것이니 추가금은 받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 두 분이 인터뷰하신 거 봤습니다.”
영웅일보에서 꿀잼을 인터뷰한 기사는 인터넷에 게시되었다.
그리고 남호열은 그 기사의 끝에서 유지한과 김시후가 자신의 이름과 공방을 홍보하는 문구를 볼 수 있었다.
처음에 검을 선물 받으면서 약속했던 내용을 그들이 정말로 지켜 준 것이었다.
‘기사가 그렇게 관심을 받지는 못할 텐데.’
유지한은 머리를 긁적였다.
영상이 첨부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4급 파티의 인터뷰인 만큼 그 기사는 인기 기사로 오를 만큼의 조회수는 얻지 못했다.
홍보를 했다고 하지만 체감되는 효과는 거의 없을 터.
하지만 남호열은 구두로 맺은 약속이 실제로 지켜졌다는 사실에 더 주목했다.
“더 좋은 걸 입어서 나쁠 건 없잖아요?”
“그건 그렇지만요.”
“여러분을 선택한 제 눈이 틀리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그러니까 이것도 일종의 투자라고 생각해 주세요.”
“하하……. 저희한테 대체 얼마나 투자를 하시려고.”
“직접 투자할 현금이 없으면 이렇게라도 해야죠.”
기분 좋게 미소 짓는 남호열.
유지한과 김시후는 그에게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감정을 느꼈다.
첫 만남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그들은 남호열에게서 무언가를 받기만 하고 있었다.
“얼른 몸에 걸쳐 보세요. 치수가 잘못됐으면 고쳐야 하니까요.”
유지한과 김시후는 각자의 장비를 몸에 걸쳤다.
걱정과 달리 갑옷은 두 사람의 몸에 딱 맞았다.
‘생각보다 더 편하다.’
새가죽 냄새가 나는 걸 제외하면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김시후의 것도 마찬가지였다.
안쪽에 겹쳐 입은 사복을 벗는다면 훨씬 더 편하게 입을 수 있을 것이었다.
“이렇게 보니까 되게 뿌듯하네요.”
남호열은 두 사람이 장비를 착용한 걸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가 대장장이로서 가장 뿌듯한 순간이 바로 이럴 때였다.
유지한과 김시후는 새로운 장비를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쓸며 말했다.
“딱 이번까지만 호의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다음부터는 추가금 필요하시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저희가 그렇게까지 궁핍한 길드는 아니니까요.”
“알겠습니다.”
“조만간 다른 것도 만들러 올게요.”
길드 카드로 남은 잔금을 치른 두 사람은 공방을 떠났다.
홀로 남은 남호열은 넘어진 의자를 다시 가져와 앉았다.
“오늘 장사는 이걸로 끝났나…….”
이후에 방문하는 손님은 없겠지.
철야 작업 때문에 최근에 집에 너무 늦게 들어갔으니,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퇴근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그런데 약 20분이 흐른 뒤.
어느 젊은 여성이 가게 문을 열면서 말했다.
“저기요! 여기가 칼방 맞나요?”
“아, 네! 맞습니다.”
“무슨 인터넷 기사 보고 찾아왔는데요.”
“……네?”
새로운 손님의 등장에 남호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