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재회
덜커덩!
파란색 음료수 자판기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캔음료 하나가 떨어졌다.
카지미르는 상품 출구에서 콜라를 꺼내 유지한에게 건넸다.
“받아라.”
“잘 마실게.”
유지한은 표면에 물방울이 맺혀 있는 콜라를 받아들고 카지미르가 다른 음료를 고르는 걸 뒤에서 지켜봤다.
‘자판기 쓰는 뱀파이어라니.’
셔츠를 입은 그가 지폐를 넣고, 버튼을 누르고, 무릎과 허리를 숙여서 음료를 꺼내는 모습은 평범한 인간들이 하는 것과 거의 다를 게 없었다.
결코 한 두번 해본 행동이 아닌 것 같았다.
‘이제 거의 인간이나 다름없네.’
MA 안에서 처음 그를 마주쳤던 때만 해도 인간과는 다르다는 걸 곧바로 알아챌 수 있었는데.
이제는 카지미르를 평범한 인간과 구별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창백한 피부와 검으면서도 살짝 붉은기가 도는 눈동자와 머리칼, 말을 할 때 드러나는 입안의 송곳니까지.
그것들은 틀림없는 뱀파이어의 특성들이다.
“역시 이거지.”
“……민트 초코 사이다?”
카지미르의 선택은 민트 초코맛 탄산 음료였다.
유지한은 잔뜩 인상을 썼다.
어째서 저런 끔찍한 물건이 공공기관 음료수 자판기에 들어가 있는 걸까.
“그게 맛있다고?”
“이걸 마시면 마치 신선한 피를 마시는 느낌이 난다.”
“진짜로? 그게?”
“요새 인간들은 평범한 콜라의 대체품으로 설탕이 들어가지 않은 무설탕 콜라를 선호하지 않나? 그거랑 비슷하다.”
“느낌이 전혀 다른 거 같은데…….”
피와 민트초코, 서로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것들이었다.
어쨌건 피를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인간이 아닌 뱀파이어가 맞았다.
유지한은 차가운 콜라의 캔을 따며 말했다.
“나를 어떻게 알아본 거야? 내가 널 만났던 순간에는 얼굴을 다 감추고 있었잖아.”
김현태 파티에서 MA에 갈 때마다 유지한은 항상 자신의 얼굴을 감췄다.
그런 가운데 발견된 카지미르였다.
몇 년이 흐른 뒤에 알아본다는 게 신기할 수 밖에 없었다.
“인간은 저마다 특유의 피냄새, 혈향(血香)을 가지고 있지. 그리고 나는 한번 맡은 피냄새를 절대로 잊지 않아.”
“뱀파이어는 후각이 좋은 건가.”
“어느 정도는.”
뱀파이어는 피를 통해 사람을 구분할 수 있었다.
완전히 같은 색의 피가 담긴 유리병이 여러 개 주어진다면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 그 안에 담긴 것들이 서로 다른 것임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방금 네 옆에 있던 자는 엘프인가?”
“절반은 그렇지.”
“하프 엘프였나. 어쩐지, 냄새가 조금 독특하더군.”
유지한과 함께 있던 김시후는 먼저 영웅부를 떠났다.
오랜만에 마주친 유지한과 카지미르를 배려하는 것임과 동시에, 집에서 보고 싶던 영화를 보겠다는 모양이었다.
“카지미르. 너는 뭘 하길래 영웅부에 있는 거냐?”
“몇 년 전부터 돈을 받고 영웅부의 연구소에서 다른 연구원들을 돕고 있다.”
“무슨 연구?”
“주로 몬스터의 피와 관련된 연구들.”
유지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피를 연구하는 뱀파이어.
상당히 잘 어울려 보였다.
“피를 좋아하는 뱀파이어니까 가능한 일인가.”
“켁! 농담마라. 몬스터처럼 저급한 존재들의 피는 좋아하지 않는다.”
유지한이 잠깐 상상한 것과 달리, 카지미르는 음료수를 잡지 않은 손으로 손사래를 쳤다.
뱀파이어가 피를 마신다고 해서 모든 생명체의 피를 다 좋아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피는 나라에서 제공하는 거지?”
“한국의 뱀파이어들은 일주일 주기로 인간의 피를 320ml 씩 지급받고 있다. 목숨을 연명하기에는 충분해.”
뱀파이어들이 미치지 않고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물의 피가 필요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효과가 좋은 것은 인간의 피였다.
지구에 정착한 이종족 중, 피가 모자라서 광란 상태에 빠진 뱀파이어가 근처에 있던 인간을 덮쳤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사건 중에 하나였다.
“1년 전부터는 선짓국도 먹기 시작했다.”
“그건……. 조금 재밌네.”
“인간의 것보다는 맛이 떨어지지만, 익숙해지니까 그리 나쁘지는 않아.”
피를 끓여 만든 선짓국을 먹는 뱀파이어.
친근함마저 느껴질 만큼 아주 재밌는 조합이었다.
“진행하는 연구는 잘 되고?”
“현재 한국에서 진행되는 몬스터의 피와 관련된 모든 연구에 내 이름이 들어간다고 봐도 무방하다.”
“머리가 꽤 좋나봐.”
“지구에 정착한 뱀파이어 중에는 가장 좋다고 생각해라.”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엄청난 자신감을 드러내는 카지미르였다.
이번에는 그가 유지한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너야말로 왜 여기 있는 거지?”
“이전에 방문한 현장에서 사고가 터져서. 그거 해결하려고 잠깐 들렸다.”
“김현태 파티의 일인가?”
그의 입에서 김현태 파티가 언급되자 유지한은 조금 놀랐다.
“김현태 파티를 알고 있어?”
“지구에서 처음 만난 영웅들이었으니까. 게다가 나도 나름 영웅부 소속이니 한국에서 유명한 길드와 파티는 모를 수가 없지.”
“그렇구나.”
“내가 거기서 한 가지 이상하게 여겼던 건……. 네가 케로즈의 김현태 파티 명단에 없었다는 거다.”
“…….”
“뉴스 기사나 인터뷰를 아무리 찾아봐도 너는 보이지 않았지.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유지한은 말없이 콜라를 한 모금 마셨다.
카지미르는 그런 그를 힐끗거리며 말했다.
“전혀 다른 영웅과 함께 있는 걸 보면, 지금은 파티를 나왔나보군.”
“맞아.”
“거기서 나오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나?”
“이유가 궁금해?”
이 뱀파이어가 이렇게 남의 일에 관심이 많은 성격이었나.
카지미르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주 유명한 파티에서 나왔는데, 이유를 궁금해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
“그저 순수한 호기심이다.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마.”
“그…….”
적당히 대답하고 넘어가려던 유지한은 잠시 멈칫했다.
그래도 김현태 파티에서 직접 마주쳤던 카지미르라면…….
어느 정도는 얘기해도 괜찮겠지.
“정확히는 나온 게 아니라 파티에서 추방당했다.”
“추방?”
“그래. 어디가서 이야기하지는 마라. 조금 곤란해지니까.”
“걱정마라. 내 입은 누구보다 무겁다.”
추방이라는 말에 카지미르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의문이 담겨있는 눈빛이었다.
“그런데 네가 추방당했다고? 왜지?”
“짧게만 말하자면, 내가 그 파티에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건 조금 이상하군.”
“뭐?”
이번에는 유지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파티에서 추방당한 것에 카지미르가 이상함을 느낀다는 것이, 그에게는 더 이상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김현태 파티를 직접 본 건 30분 정도에 불과했지만……. MA를 빠져나오는 순간에 봤던 너는 전투에서 꽤 중요한 역할이었을 텐데.”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네.”
“확실히 영웅 김현태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지. 하지만 다른 영웅들에게 도움이 필요했던 순간에는 언제나 네가 옆에 있었다. 그야말로 뒤에서 누군가를 받쳐주는 지원형 영웅, 서포터의 완성형이 아니었을까.”
“…….”
“싸움과는 거리가 먼 내 눈으로 봐도 꽤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그러니까 몇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는 거고.”
아주 짧은 만남이었지만 카지미르는 유지한의 실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화력이 모자란 구역이 있으면 달려가서 그 빈틈을 메꿔주고, 몬스터가 한쪽으로 몰려오는 상황에는 스스로 미끼를 자처하여 적들을 분산시키고.
다른 파티원의 활약에 가려져서 있는 듯 없는 듯하면서도, 매번 적절한 판단으로 파티에 큰 보탬이 되어주었기 때문이었다.
유지한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내가 김현태 파티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 만약 과거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내가 맡았던 역할에서 그 이상으로 무언가를 보여주기는 힘들걸.”
유지한은 김현태 파티에서 김현태의 뜻을 받아들여 언제나 다른 파티원을 보조했다.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순간에는 직접 앞에 나서기도 했지만, 그것도 동료들의 잔소리를 감내하며 행동한 것일 뿐.
평소에는 파티의 균형이 유지되는 것에만 신경 쓰며 결정권자의 뜻대로 오롯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만 충실했다.
“하지만 그게 그 당시 파티원들의 기준에는 모자랐던 모양이지.”
“대체 그 기준이란 게 뭐길래?”
“글쎄.”
“전 세계에서 서포터라는 롤(Role)로 활동하는 영웅들을 여럿 봤지만, 냉정하게 따져서 너만 한 영웅은 없었다.”
“과찬이야. 애초에 서포터로 활동하는 영웅은 그리 많지 않아. 크게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니까. 그리고 어쩌면 김현태 파티에서 그 역할 자체가 필요 없어졌을 수도 있고.”
“뭐, 그럴지도.”
다시 한 번 어깨를 으쓱이는 카지미르였다.
“듣기로는 거기에 새로운 파티원이 들어갔다던데, 과연 그 높은 기준에 충족되는 영웅이 들어갔을지 의문이군…….”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지.”
“그쪽에 남은 미련은 없나?”
“전혀. 나는 지금이 훨씬 편하거든.”
유지한의 담담한 태도에 카지미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 번뜩 무언가를 떠올린 유지한이 그에게 물었다.
“그보다 연구라고 하니까 생각났는데, 혹시 마력 변색 증후군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
“기절한 환자들의 몸에 마력이 닿으면 검게 변하는 현상. 혈관의 손상으로 흘러나온 피가 피부 아래에 뭉쳐서 푸르거나 검게 보이는 피멍이라는 것과도 비슷하지. 내 연구 주제 중 하나라서 알고 있다.”
“지인의 가족이 그 병에 걸려서 몇 년째 병상에 누워있거든. 그건 아직도 치료하기 어렵나?”
여기서 지인은 민유리.
지인의 가족은 그의 여동생인 민소연이었다.
“치료법을 찾았다면 진작에 공개했을 거다.”
“역시 어려운 건가…….”
“하지만 그것도 피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으니까 연구는 계속 진행할 예정이다. 참고로, 내 덕분에 이미 인간에게 발생할 수 있는 11가지 혈액암의 완벽한 치료법이 등장했지.”
“그건 좀 대단하네.”
“대단? 내 업적을 그걸로 표현하기에는 조금 부족해.”
“…….”
“완치 판정을 받은 환자들이 단체로 연구실에 찾아와서 몇 번이고 절을 하는 건, 아주 보기 좋은 광경이었어.”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는 카지미르의 태도는 살짝 거만하기까지 했다.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말이었다.
‘어쩌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이런 연구자와 안면을 트는 건 자주 있는 기회가 아니겠지.
유지한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네 휴대폰 번호 좀 주라. 나중에 너한테 연락할 일이 생길 것 같다.”
“문제 없다.”
두 사람은 서로의 휴대폰 번호를 교환했다.
‘좋은 거 쓰는구나.’
유지한은 그 과정에서 카지미르의 휴대폰이 자신의 것보다 훨씬 최신 기종임을 알게 되었다.
설마 뱀파이어보다 유행에 뒤처진 사람이 될 줄이야.
“아,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게 있어.”
“말해.”
“너는 왜 지구로 온 거냐?”
지구에 정착한 이세계인들은 저마다 출신도, 지구에 온 방법도, 목적도 모두 달랐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가 이종족으로 아직 이세계의 인간이 지구로 넘어온 경우는 없었다.
“그 당시 내가 있던 세계는 당장이라도 멸망하기 직전이었다. 나와 함께 빠져나오려고 시도했던 동료들은 100명을 넘겼지만, 3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죽어 버렸지.”
“대체 그 세계에서 무슨 일이…….”
뚜루루!
카지미르의 휴대폰에 전화가 걸려온 것은 그때였다.
휴대폰에 떠오른 이름을 본 그가 말했다.
“동료의 전화다. 미안하지만 대화는 여기까지 해야겠군.”
“음……. 그래. 간만에 봐서 즐거웠다.”
“다음에 연락하지.”
가볍게 악수를 나눈 유지한이 다음을 기약하며 자리를 떠났다.
카지미르는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카지미르! 바빠 죽겠는데 너 지금 어디야?
“연구소로 돌아가는 중이다.”
—뭐하다가?
“오랜만에 본 인간과 대화를 했다.”
—네가 오랜만에 본 인간? 그게 누구야?
“보기 드물게 제법 뛰어난 인간.”
—……!
휴대폰 너머의 동료 연구원은 헉하고 숨을 삼켰다.
—세상에, 네가 뛰어나다고 말할 정도의 인간이라니……. 어디서 1급 영웅이라도 찾아왔었어?
“내가 직접 보고 느낀 걸 말했을 뿐이다.”
—그럼 나는 어떤데? 나도 뛰어난 인간 축에 들어가나?
“너는 놀라울 정도로 멍청한 인간.”
—야!
“내 도움이 없으면 제대로 된 결과 하나 내놓지 못하는 둔한 인간.”
—이 나쁜 놈아! 치사하게 팩트로 때리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