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리더의 조건
“감사합니다!”
MC의 마지막 인사와 함께 교류회가 마무리되었다.
앉아 있던 영웅들은 무대를 향해 손뼉을 치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자.”
유지한과 김시후도 강당을 떠나려던 순간이었다.
레드홀의 파티 중 하나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길드 이름이 꿀잼이라고 하셨죠?”
“앗, 네.”
“파티 이름은 뭐죠?”
“아직 정해 둔 건 없어요.”
길드명과는 별개로 파티명은 보통 파티장의 이름으로 결정된다.
하지만 아직 파티가 1개뿐인 꿀잼은 따로 이름을 나누지 않았다.
제1파티라고 적혀있는 팻말은 숫자로 구분해 놓은 것뿐이었다.
이런 경우에는 길드 이름을 대신 부르는 게 일반적이었다.
“앞으로 서로 잘해봅시다.”
“동감입니다.”
김시후는 아까 질문을 던졌던 남자와 짧게 악수를 나눴다.
그 뒤 레드홀의 파티 4개가 강당을 우르르 빠져나갔다.
“생각보다 더 대단한 파티셨네요.”
“하하…….”
교류회 시작 전 인사를 나눴던 우정 길드의 신우정도 그들에게 손인사를 했다.
그리고 유지한은 나가는 길목에서도 주변에서 은근한 시선을 느꼈다.
꿀잼은 의도치 않게 이번 교류회의 주인공이 되어 버린 듯했다.
살짝 악의가 담겨 있는 시선도 몇 있었으나, 그런 것들은 무시해 버렸다.
‘나서길 잘했어.’
유지한은 평소 자신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말하는 재능은 따로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나서 보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소속 길드에 대한 단단한 확신이 있었으니까.
그는 옆에서 같이 걷던 민유리에게 말했다.
“유리 씨는 다시 MA로 가시는 건가요?”
“아뇨. 병원에 잠깐 들리려고요.”
“알겠습니다. 오래 걸려도 좋으니 편하실 때 연락 주세요.”
“고마워요.”
병원으로 향하는 민유리가 먼저 자리를 떠났다.
유지한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오늘 교류회에서 보여 준 모습이 그녀의 영입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면 좋겠다고.
*****
다음날, 오전 10시 즈음.
유지한과 김시후는 인천의 한 커다란 골프장에 방문했다.
골프가 하고 싶어서 방문한 것은 아니고, 이 골프장 전체가 4급 MA로 선언된 곳이기 때문이었다.
‘이쪽인가.’
골프장 1층 본관 로비에 도착한 그들은 안내 푯말을 따라 1층의 매장으로 이동했다.
진열된 물건이 없고 비어 있는 매장에 다른 영웅들이 대기하는 것이 보였다.
“와, 저거 좀 봐요.”
김시후가 매장의 벽에 설치된 커다란 TV를 가리켰다.
결계가 펼쳐져 있는 골프장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실시간 영상이었다.
카메라가 달린 드론으로 촬영하는 영상인 듯했다.
“진짜 많네.”
이 골프장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초록색 잔디가 깔린 골프장이 아니었다.
화면의 어딜 봐도 노란색, 저길 봐도 노란색.
색깔로 나누자면 이 골프장은 노란색과 초록색이 각각 7:3 비율 정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저게 다 괴들레라니…….”
김시후가 혀를 내둘렀다.
노란색의 정체는 바로 몬스터로 변한 민들레.
속칭 괴들레의 꽃이었다.
‘영웅을 돈 주고 데려온다는 얘기도 있던데, 그럴 만하네.’
골프장의 소유주가 3달째 사라지지 않는 괴들레 때문에 골머리를 썩인다는 것을 이해한 유지한이었다.
괴들레는 식물계 몬스터 중에서도 사냥 난이도가 꽤 낮은 것으로 분류되지만, 저 정도 숫자라면 영웅들이 질려서 떠나 버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강력한 제초제도 소용없고 총이나 평범한 칼로는 쉽게 죽지도 않는 아주 끈질긴 녀석들이라 계속 영웅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다들 여기 주목해 주세요!”
TV 아래에 서 있는 영웅부 직원들이 주변의 시선을 모았다.
“사전에 입장 예약하신 분들은 제 왼쪽으로 서시고, 나머지는 오른쪽에서 잠시만 대기해 주세요.”
유지한과 김시후는 왼쪽으로 섰다.
사전 예약제로 운영되는 MA를 신청해 둔 덕분이었다.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괴들레 때문에 이곳에는 빠른 퇴치를 위한 시스템까지 갖춰져 있었다.
파티마다 활동 구역을 미리 지정하고 투입되는 방식으로, 여기라면 괴냥이 출몰지에서 벌어졌던 것처럼 자리싸움에 휘말릴 걱정이 없었다.
“꿀잼에서 온 파티 계십니까!”
“여기 있습니다.”
차례를 기다리던 두 사람은 자신들을 호출한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는 들고 있던 커다란 태블릿PC를 보며 말했다.
“두 분이시죠?”
“예.”
“여러분은 14번 홀로 가시면 됩니다.”
*****
골프를 즐길 수 있는 총 18개의 홀(Hole).
꿀잼은 그중에서도 14번 홀로 배정되었다.
유지한과 김시후는 골프장에서 제공한 골프 카트에 탑승했다.
‘몬스터 사체를 담기에도 좋고, 걸을 필요도 없지.’
카트는 전투 도중 망가져도 좋으니 골프장을 차지한 괴들레만 잘 처리해 달라는 게 골프장 소유주의 입장이었다.
김시후는 운전대를 잡은 유지한에게 말했다.
“형, 운전 괜찮아요?”
“아마도. 옆에서 다가오는 것들 보조나 해 줘.”
장롱면허도 엄연한 면허다.
브레이크와 악셀의 위치 정도는 알고 있었다.
‘위치는 조금 아쉽네.’
파티마다 활동 가능한 구역이 정해지는 MA에서는 비상시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입구나 결계와 가까운 외곽이 선호된다.
그리고 이 골프장에서 14번 홀은 가장 중심에 있는 곳이다.
밖으로 나가는 곳과는 꽤 거리가 있기에 유지한은 아쉬움을 느꼈다.
“보인다.”
골프 카트를 운전하면서 지나가는 길.
다른 홀에 있는 괴들레들이 뿌리를 이용해 땅을 걸어 다니는 게 보였다.
개체마다 뿌리의 길이가 달라서 놈들 중에는 인간처럼 키가 큰 놈도 있고 괴아리에 비교해도 될 만큼 작은 놈도 있었다.
공통점이라면 꽃대라고 불리는 초록색 줄기가 매우 두껍고, 노란 꽃잎이 마치 축구공만큼 크다는 것이다.
“시시시—”
“시시시시—”
구조상 소리를 내는 기관이 없을 텐데, 신기하게도 꽃잎 쪽에서 묘한 소리를 내는 괴들레였다.
하나의 뿌리에 여러 개의 꽃이 달린 개체도 있어서 조금 시끄럽게 들리기도 했다.
“막아!”
“흐아아앗—!”
다른 파티의 영웅들은 이동 중인 골프 카트에 괴들레가 접근하는 걸 막았다.
이곳에서 먼저 사냥하는 파티는 그들보다 뒤에 들어오는 파티가 지나가는 걸 도와주게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한 마리씩 빠져나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파이어 애로우]
김시후는 타오르는 불의 화살을 생성했다.
그리고 그것을 앞에서 골프 카트로 접근하는 괴들레의 노란 꽃잎에 박아 넣었다.
화르륵!
꽃잎은 화살이 닿은 부위를 중심으로 빠르게 타들어 갔다.
몸이 타들어 가는 와중에도 괴들레는 죽지 않고 서서 버텼다.
통증을 느끼지 않는 몬스터라 가능한 일이었다.
가까이 접근한 다른 영웅은 녀석의 질긴 줄기를 잘라서 마무리했다.
유지한은 몬스터를 놓친 것에 미안함을 전하는 영웅에게 괜찮다는 사인을 보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그들은 카트를 타고 더 이동한 끝에 골프장 중앙에 있는 14번 홀에 도착했다.
같은 홀에는 이미 자리를 잡고 사냥을 진행하는 파티가 여럿 있었다.
그런데도 수가 크게 줄지 않는 걸 보니 어지간히 많은 녀석이 이곳에 자리 잡은 듯했다.
“시작하자.”
“네!”
골프 카트를 적당한 곳에 주차한 유지한이 운전석에서 뛰어내렸다.
이미 카트 주변에도 적들이 가득한 상황.
족히 6마리가 넘는 괴들레가 기다란 뿌리를 꼬물거리며 두 사람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다만 그 속도가 느린 탓에 그리 위협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오랜만이네.’
유지한이 마지막으로 괴들레를 사냥한 것은 최소 3년은 더 지난 일.
3급 MA에서 다른 몬스터와 함께 출현한 놈을 검으로 썰어 버린 게 괴들레와의 마지막 추억이었다.
그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검을 잡았다.
“시시시…….”
어느 괴들레의 꽃잎이 마치 밝게 웃는 것처럼 진동했다.
노란 잎새가 흔들리는 모습은 조금 예쁘다는 느낌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저 톱니 모양의 민들레 꽃잎은 마치 진짜 톱니처럼 단단하고 날카로운 흉기다.
“시시시시—!”
괴들레 하나가 줄기를 아래로 구부려서 유지한에게 자신의 꽃잎을 들이댔다.
그는 녀석이 팔처럼 휘두르기도 하는 초록색 잎을 조심하며, 가까워지는 꽃잎을 검으로 쳐냈다.
카앙!
괴들레의 꽃잎은 괴냥이의 발톱과 맞먹을 정도의 강도였다.
단단하면서도 매우 날카로워서 연약한 인간의 살이 저것에 닿았다가는, 피부가 순식간에 넝마로 변해 버릴 것이었다.
‘어디 보자…….’
옆에서 김시후가 다른 민들레를 저지하는 사이, 유지한은 침착하게 괴들레의 몸을 살폈다.
바닥을 딛고 있는 황색의 뿌리부터 그 위의 초록색 잎.
위로 쭈욱 이어진 줄기와 꼭대기에 달려 있는 노란 꽃까지.
‘아마 저기쯤이었을 텐데.’
그가 주목한 곳은 괴들레의 꽃과 줄기의 연결 부위였다.
꽃을 받치는 밑동, 그걸 감싸고 있는 작은 비늘 모양의 잎.
정확하게는 총포(總苞)라고 불리는 부위.
인간과 비교하자면 목과 비슷한 위치로 그 부근은 괴들레의 대표적인 약점이었다.
보통은 녀석의 커다란 꽃잎이 그 아래의 작은 잎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노리기가 까다롭지만.
‘어렵지 않지.’
유지한은 과거에 괴들레를 비롯한 식물계 몬스터와 여러 번 싸웠던 경험이 있었다.
그가 자신의 몸을 노리는 꽃잎을 피하고, 키가 큰 괴들레의 바로 앞에서 자세를 낮게 숙였다.
위를 올려다보자 노란색 잎에 가려진 총포가 보였다.
서걱!
대각선으로 검을 휘두르자 검날은 꽃 아래의 총포를 가르며 지나갔다.
키가 워낙 큰 놈이었기에 공격하기는 아주 수월했다.
검에 베인 괴들레는 줄기와 잎을 파르르 떨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유지한은 바닥에서 떨고 있는 괴들레를 보며 조금 아쉬운 듯 말했다.
“살짝 빗나갔나.”
약점을 공격했음에도 꽃과 줄기가 완전히 분리되지 않았다.
검날에 뭔가 걸리는 느낌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단단한 꽃잎에 살짝 스친듯했다.
한 번에 즉사하지도 않았으니 더 아래쪽을 노리는 편이 나았으리라.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네.’
오랜만에 괴들레를 사냥하는 것치고는 감이 나쁘지 않았다.
그의 몸은 아직 괴들레와 맞섰던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김현태처럼 높은 근력과 위력이 좋은 스킬의 소유자라면 그냥 무식하게 힘으로 몰아붙여도 문제가 없겠지만.
유지한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상대의 약점을 정확하게 노리는 전투를 선호했다.
화륵!
김시후는 불마법을 이용해 골프장에 불이 번지지 않는 선에서 주변 괴들레를 공격했다.
불에 약한 괴들레들은 가만히 서서 천천히 타 죽어 갔다.
그걸 본 유지한은 김시후에게 외쳤다.
“불마법 금지!”
“어? 왜요!”
“꽃을 살려 둬야 잘 팔리니까.”
식물계 몬스터의 뿌리, 줄기, 꽃잎 등 모든 것은 좋은 약초처럼 사용된다.
괴들레는 개체 수가 많아서 그다지 비싼 값을 받지는 못해도 최대한 상처 없이 사냥하면 가장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었다.
“식물계 몬스터는 불이 제일 효과적인데…….”
“너 마력 제어는 곧잘 하잖아. 저 꽃이랑 줄기의 연결 부위를 공격해 봐.”
샥!
“이렇게요?”
“아니, 거기 말고.”
유지한은 직접 약점을 공격하는 시범을 보여 주며 김시후를 가르쳤다.
몬스터로 가득한 구역에서 파티원에게 공략법을 알려 줄 정도로 여유가 있는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