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영입 제안
꿀잼의 길드장인 김시후는 인천의 한 아파트에 혼자서 살고 있다.
방 2개에 화장실 1개, 적당한 크기의 거실과 작은 주방이 있는 13평짜리 아파트.
어디서나 흔하게 찾아볼 수 있을 법한 평범한 집이지만, 특이한 점이라면 그곳이 이종족과 그 가족들을 위해 정부에서 특별 공급한 물량이라는 것.
어머니인 에르나 하스가 병으로 죽고 아버지까지 몬스터 연구를 위해 일본으로 떠난 이후, 그는 가족과 함께 살던 큰 집에서 나와 몇 년째 그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길드로 출근하지 않는 자체 휴일이었다.
우웅—
김시후는 밀린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돌렸다.
사냥을 끝낸 뒤의 피곤한 몸으로 집에 돌아와서는 집안일이나 기타 자잘한 일에 신경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처럼 시간이 났을 때 집안일을 몰아서 처리해 둬야 했다.
“지팡이 손질도 해야 하고…….”
빨래가 끝나면 매일 같이 들고 다니는 지팡이를 손질해야 한다.
특수한 오일을 꾸준히 발라 주면 나무 지팡이의 수명이 크게 늘어나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유품이자 마법의 위력을 증폭시키고, 마력 제어도 보조해 주는 귀한 아티팩트인 만큼 혹시라도 관리 부족으로 망가지게 둘 수는 없었다.
그리고 함께 착용하는 나머지 장비들도 꼼꼼하게 점검해야 했다.
“쉬는 게 쉬는 게 아니야.”
자유 시간이라고는 하지만 마냥 노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상 다음을 위한 대비를 하는 것과 같았다.
MA에 들어가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이것들이 김시후의 일상이 되었다.
‘형은 지금쯤 민유리 씨 만났으려나.’
유지한이 민유리와 점심 식사 약속을 잡은 것은 바로 오늘이었다.
김시후는 약속을 다른 날로 옮겨 주겠다는 것을 거절하고 개인 용무를 이유로 그 자리에 불참석했다.
‘영입은 어려울 것 같던데.’
그녀를 영입하고 싶다는 의견에는 김시후도 동의하는 쪽이었지만, 그게 가능한지는 의문이었다.
유지한은 후발 주자인 꿀잼이 그보다 몇 년은 앞서 만들어진 눈송이를 역으로 흡수하길 원했으니까.
‘되면 좋고, 안되면 어쩔 수 없고.’
지금쯤 두 사람이 만나서 뭐라도 이야기를 하고 있겠지.
그녀에게 어떤 조건을 제시할지도 유지한에게 맡겼다.
남은 건 결과가 들려오길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뚜루뚜뚜!
돌아가는 세탁기를 멍하니 바라보던 때.
그의 휴대폰에서 평소와는 조금 다른 벨소리가 울렸다.
일반적인 전화가 아니라 별도의 앱을 통해서 들어온 인터넷 전화였다.
“아버지?”
—아들. 지금 통화되나?
“네. 쉬는 날이라 집에 있어요.”
전화를 건 사람은 일본에 있는 김시후의 아버지, 김건오였다.
—다친 곳은 없지?
“멀쩡해요.”
—4급으로 올랐으니 앞으로는 더 조심해야 해. 5급 MA에서는 마법사가 공격받는 게 드문 일이지만, 4급쯤 되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으니까.
“알아요, 알아. 그 말씀 이전에도 몇 번 하셨잖아요.”
—만에 하나라도 침입자를 만나게 된다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치는 편이…….
과거에 영웅으로 활동했던 김건오는 아들인 김시후와 비슷하게 마법사 포지션에 있던 영웅이었다.
영웅 중에서도 가장 은퇴자가 많은 3급 영웅.
거기까지 올랐던 그는 이따금 아들에게 조언하곤 했다.
—그래도 네가 좋은 사람을 만났다고 하니 걱정이 좀 덜하구나.
“지한이 형 덕을 많이 보고 있죠.”
—이름이 유지한이라고 했었지?
“네. 전 케로즈 소속 영웅이요.”
김건오는 꿀잼의 길드원인 유지한에 대해 알고 있었다.
직접 만나 본 적은 없지만, 김시후가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 덕분이었다.
—처음에는 길드의 지분을 넘겨줬다길래 깜짝 놀랐다.
“25%밖에 안 줬어요.”
—그럴 땐 25%나 줬다고 해야지. 길드의 4분의 1을 그냥 줘 버린 거잖아! 5%만 해도 많다고 생각될 판에…….
김건오는 처음에 길드의 지분을 요구했다던 유지한을 조금 의심했다.
악한 마음을 갖고 내부에서부터 길드를 망치려고 들어온 게 아닐까 걱정한 것이다.
그의 아들인 김시후는 하프 엘프고, 종족 차별은 여전히 한국을 비롯해 전세계에 존재하기에 충분히 가능성 있는 가설이었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단순히 걱정으로 그쳤지만 말이다.
“지한이 형은 충분히 지분을 나눌 가치가 있는 사람이에요.”
—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실프의 계약자예요. 지팡이에서 나오지 않던 실프가 갑자기 계약을 건 것도 분명 뭔가 이유가 있겠죠.”
유지한을 높게 평가하는 김시후는 확신에 차 있는 목소리였다.
김건오가 기억하기로 지금껏 아들이 저렇게까지 평가했던 영웅은 없었다.
‘기회가 되면 나중에 한 번 만나 봐야겠어.’
지팡이에 들어가 있던 아내의 정령과 계약했다는 영웅.
김건오는 유지한이라는 사람이 대체 어떤 영웅일지 궁금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아내의 실프도 다시 만나 보고 싶었다.
“일본 쪽 상황은 어때요?”
—돌연변이 때문에 말썽이야. 우리 연구소 쪽으로도 날마다 1마리 이상은 들어오고 있고.
“발생 원인은 밝혀졌어요?”
—아직은 몰라. 그래서 열심히 연구 중이지. 이번에 영웅부에서 발표한 자료를 봤는데, 너희가 잡았다던 닭도 크게 특별한 건 없더구나.
돌연변이 개체의 증가는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도 똑같았다.
김건오는 그것들을 담당하는 연구원 중의 한 명이었다.
—바쁘긴 해도 엄마 기일에는 한국에 들어갈 거니까 그때는 MA에 들어가지 말아라.
“알겠어요.”
*****
“지한 씨! 여기요!”
오후 12시 50분.
유지한은 오후 1시에 약속한 장소에서 민유리와 만났다.
그녀는 10분 일찍 온 그보다 먼저 약속 장소에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만났을 때랑 많이 달라 보이네.’
슬림한 청바지에 검은색 티셔츠.
밖에서 사복을 입은 그녀는 MA에서 장비를 둘렀을 때와는 또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많이 기다리셨어요?”
“얼마 안 기다렸어요. 예약해둔 식당은 저쪽이에요.”
“바로 가시죠.”
그들은 정해 둔 식당으로 이동했다.
민유리가 유지한에게 대접한다며 직접 예약한 곳이었다.
그녀는 아쉽다는듯 말했다.
“시후 씨도 오셨으면 좋았을걸.”
“칠라는 어디 갔어요?”
“MA에 가는 날이 아니면 집에만 있어요. 너무 크고 눈에 띄어서요.”
“조금 서럽겠어요.”
“실외 산책을 즐기는 편은 아니라서요.”
아무리 테이밍이 인증된 펫이라고 해도 커다란 덩치로 밖을 걸어 다니면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다.
때로는 펫을 알아보지 못하는 일반인들이 경찰에 신고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
그 때문에 평소에는 천장이 높은 집에서만 생활하는 칠라였다.
다행히 밖을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집을 더 선호하기에 녀석이 불만을 갖는 경우는 없었다.
“어서 오세요!”
식당 입구로 들어서자 직원이 두 사람에게 밝게 인사했다.
“1시에 예약한 민유리입니다.”
“아, 프라이빗 룸으로 모시겠습니다!”
직원은 예약자 명단을 읽지도 않고 민유리의 이름을 바로 알아들었다.
이 식당에서 프라이빗 룸을 이 시간대에 예약하는 경우는 잘 없기 때문이었다.
“음식 바로 준비해드릴까요?”
“물 먼저 주세요.”
“알겠습니다. 필요하시면 바로 벨 눌러 주세요.”
차가운 물병을 식탁에 올려놓은 직원이 프라이빗 룸의 문을 닫고 나갔다.
유지한은 2개의 컵에 천천히 물을 따르며 생각했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까.’
좋은 식당에 왔지만, 오늘의 목적은 절대 식사가 아니다.
‘그때 조합이 아주 잘 맞았었는데.’
얼마 전, 아파트 단지에서 수많은 괴냥이와 싸우던 때.
꿀잼과 눈송이는 전혀 예정에도 없던 합공을 펼쳤다.
다소 갑작스러운 합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 호흡이 잘 맞았다.
합을 맞춰 본 적도 없는 2개 파티가 마치 오랫동안 함께한 파티처럼 싸운 것이다.
유지한의 경험상 그것은 좀처럼 쉽게 발생하는 일은 아니었다.
보통 그런 상황에는 실수로 서로를 공격하지 않으면 다행인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질질 끌 필요 없겠지.’
이것은 모 아니면 도.
민유리를 영입하는 것에 성공하거나 아니면 실패하거나, 였다.
솔직히 유지한은 그녀가 제안에 응할 확률은 낮다고 보고 있었다.
샘플링조차도 영입 성공 확률을 알려 주지 않았다.
‘그래도 시도는 해볼 수 있으니까…….’
그는 민유리에게 물컵을 건네며 말했다.
“사실 제가 유리 씨에게 고백할 게 있습니다.”
“고백이요?”
“예.”
다짜고짜 고백할 게 있다니.
민유리는 손으로 잡았던 물컵을 다시 식탁에 내려놓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오늘 밥을 먹자는 건 핑계였어요.”
“핑계라는 건…….”
“유리 씨를 직접 만나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었거든요.”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그녀는 양쪽 귀를 활짝 열고 유지한의 말을 기다렸다.
“서로 알게 된 지 며칠 안 돼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죄송하기도 한데…….”
“말씀하세요.”
“듣고 나서 건방지다거나 화를 내지는 말아 주세요.”
“……괜찮으니까 말씀하세요.”
“진짜죠?”
“얼른, 말씀하세요.”
자신도 모르게 그를 조금 재촉하고 있는 민유리였다.
유지한은 헛기침으로 목을 한 번 가다듬고는 말했다.
“저는 말이죠. 유리 씨를.”
“저를?”
“꿀잼으로 영입하고 싶습니다.”
“……?”
민유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입이라는 게……. 제가 꿀잼에 들어가길 원하신다는 건가요?”
“맞아요. 아주 정확히 이해하셨습니다.”
그녀는 매우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의 영입 제안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기에.
“괴냥이와 함께 맞서 싸울 때, 서로 조합이 굉장히 잘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건……. 저도 그렇게 느꼈지만.”
“처음 합을 맞춰 보는 파티가 그렇게 능숙하게 전투를 벌이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죠.”
민유리는 유지한의 말에 동의했다.
그 전투에 직접 참여했던 사람으로서 부정할 수 없었다.
요 몇 년간 칠라와 수없이 전투를 벌였던 때보다, 꿀잼과 협력했던 그 1번의 전투가 훨씬 더 안정적이었다는 것을.
‘곧바로 거절은 안 하네.’
유지한은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모르긴 몰라도 민유리는 여러 길드에서 지금과 비슷한 제안을 받았을 터.
따라서 이번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듣자마자 거절을 할 수도 있었다.
주위에서 지겹게 들어온 말 중 하나였을 테니까.
“…….”
하지만 그녀는 대답을 못 하고 망설이는 분위기였다.
제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조금은 보인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1인 길드를 고집하시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저희와 함께하는 게 어떠신가요?”
“음…….”
“아직 부족한 길드이지만, 가능한 유리 씨가 원하는 만큼의 대우는 해드리겠습니다.”
이번에 경매를 통해 얻은 수익으로 당장 민유리에게 줄 급여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유지한은 그녀에게 자기 몫의 지분을 나눠 줄 생각도 갖고 있었다.
‘날 데려가고 싶다고.’
민유리는 생각에 잠겼다.
유지한의 예상대로 그녀는 지금까지 많은 길드에서 러브콜을 받았다.
그리고 러브콜을 보내는 길드의 패턴은 매번 비슷했다.
말로는 그녀가 길드에 꼭 필요한 인재라고 말하되 실상은 테이머라는 것이 신기해서, 길드를 홍보하는 홍보용 파티를 꾸리기 위해서였다.
게임으로 비유하자면 칠라는 일반 아이템보다 조금 더 희귀한 레어 아이템 취급이었다.
‘저긴 그런 곳이 아니야.’
그러나 꿀잼은 입에 발린 말로 민유리를 설득하려는 길드와는 결이 조금 달랐다.
유지한과 김시후를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지만, MA에서의 일로 확신할 수 있었다.
“물론 거절하셔도 괜찮습니다. 유리 씨에게 부담을 드리고 싶지는 않아요.”
꿀꺽—
민유리가 물컵에 담긴 차가운 물을 한 번에 들이켰다.
많은 생각으로 인해 과열된 머리가 식혀지는 느낌이었다.
잠시 후, 그녀는 심사숙고 끝에 입을 열었다.
“오늘.”
“예?”
“오늘 식사가 끝나면 잠시만 저를 따라와 주세요.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답변은 그 뒤에 할게요.”
식사 뒤에 보여 줄 게 있다는 민유리.
그렇게 대답하는 그녀는 마치 MA에서 몬스터와 대치하던 순간처럼 아주 진지한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