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4급 (5)
반쪽짜리.
한국어로는 이종족과 인간의 피가 섞인 종족 간 혼혈을 낮잡아 부르는 말이다.
더 심하게 여겨지는 믹스드(Mixed), 혹은 잡종이라는 단어도 존재한다.
그것들은 모두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차별 용어에 등록하는 걸 고려할 정도로 부정적인 표현으로 취급된다.
그런데 그게 이번 4급 승급 심사를 맡은 면접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철저하게 익명성을 보장하는 인터넷 커뮤니티라면 모를까, 저 단어를 현실에서 쓴다니.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올바른 상식을 가진 인간이라면 지금처럼 서로에게 예의가 요구되는 자리에서 대놓고 저런 말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이런 개새끼가……!’
자신이 속한 길드의 대표를 모욕하는 발언에 무수한 욕지거리가 유지한의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입으로 뱉지는 않고 어떻게든 꿀꺽 삼켰다.
장소가 장소인 만큼 최대한 감정을 다스려야 했다.
그럼에도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느끼는 바는 다른 면접관들도 다르지 않았는지, 모두 크게 당황하며 소리쳤다.
“아니, 동호 씨!”
“사용하시는 표현이 조금……!”
“아차! 저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이동호는 주먹으로 자기 머리에 꿀밤을 먹이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김시후를 향해 손바닥을 펼쳐서 설렁설렁 흔들었다.
“제가 많이 미안합니다?”
“……네.”
“흠흠! 그냥 흘러가는 말로 들어요. 개인적으로 짜증 나는 일 때문에 튀어나온 거니까.”
김시후는 애써 미소 지어 보였다.
유지한의 눈에는 조금 씁쓸하게 보이는 미소였다.
그는 김시후가 익숙한 듯 행동하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당장 크게 화를 내도 영웅부 측에서 할 말이 없을 텐데.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 쉽게 짐작할 수 없었다.
짝짝!
어수선해진 면접장의 분위기.
보다 못한 양지철이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소리 나게 손뼉을 치며 말했다.
“자, 이번 파티는 제가 직접 승급을 요청했던 길드의 파티입니다.”
“오……. 정말이요?”
“네! 제가 담당하던 MA에서 꽤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거든요.”
양지철은 자신이 승급을 요청한 사실을 감추지 않았다.
이건 살짝 반칙에 가까운 것이기도 했다.
그의 말은 다른 면접관의 생각과 심사 결과에도 크게 영향을 미칠 테니까.
주위에서 누군가가 구매한 어떤 물건의 품질이 뛰어나다고 말하면, 다들 그것에 흥미를 드러내고 똑같이 사고 싶어지는 법이다.
그리고 양지철은 꿀잼과의 개인적인 친분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실력을 인정하고 꺼낸 말인 만큼 더욱 그랬다.
“지철 씨가 그렇게까지 하시다니.”
“상당히 마음에 드셨나 봐요.”
실제로 다른 면접관들은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함께 면접을 진행했던 그가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승급을 원했던 파티는 매우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약 1시간 전, 대련 심사를 담당하신 방윤식 영웅의 말에 따르면 꿀잼 길드는 대련에서 완전히 승리했다고 합니다.”
“완전히 승리했다고요?”
“방윤식 씨께서 대련 도중 직접 패배를 선언하셨다고 합니다! 그냥 심사 통과가 아니라 진짜 ‘패배’를 말이죠.”
“오호!”
대련 심사를 통과한 건 알고 있었지만, 심사관이 직접 패배를 선언할 정도였다고?
이 두 사람이 그 정도의 인재인가?
유지한과 김시후를 바라보는 면접관들의 시선이 조금 달라졌다.
“뭐……. 저는 오늘 제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대로만 판단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동호는 달랐다.
거대 길드인 워리어즈에서도 무려 서열 2위 파티의 파티원.
그는 떠도는 소문을 잘 믿지 않고, 자신이 직접 눈으로 보는 것만 믿는 인물.
그리고 2급 영웅인 만큼 4급 승급에 포함된 대련 따위는 크게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하프 엘프라…….’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김시후를 샅샅이 훑었다.
그리고 그 시선은 주로 얼굴 쪽, 귀에 집중되어 있었다.
양지철은 이동호의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걱정되어, 먼저 선수 치듯 질문을 던졌다.
“제가 먼저 김시후 씨에게 묻겠습니다. 길드명 꿀잼, 서류상으로는 약 4달 전에 등록하신 곳이죠?”
“네. 맞습니다.”
“시후 씨가 영웅 학원을 졸업한 건 재작년 말로 적혀있는데, 졸업 시기와 길드 설립까지의 공백 기간이 1년 이상으로 꽤 기네요? 보통 졸업 후에 바로 활동을 시작하잖아요?”
“학원을 졸업한 후 여기저기서 영입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공백 기간은 그 여러 제안을 두고서 기존 길드에 들어갈지, 아니면 새로운 길드를 만들지 고민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렇군요.”
김시후는 영웅 학원을 졸업 후 1년 넘게 직업이 없는 채로 보냈다.
그리고 고민 끝에 모든 제안을 거절하고 길드를 설립한 것이 약 4달 전의 일이었다.
영입 거절이 자주 발생하는 일은 아니지만, 그가 수석 졸업이라는 것은 서류에도 적혀 있었기에 면접관들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저건 거짓말이 아니야.’
그리고 영웅부에서 사전에 확인한 바로 더 확실해진 것은, 그가 생각보다 많은 제안을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길드는 아무에게나 먼저 영입을 제안하지 않는다.
그만큼 김시후가 잠재력을 가진 영웅이라는 뜻이었다.
이번에는 이동호가 서류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시후 씨는 마법사시죠?”
“네.”
“잘 싸워요?”
“……네?”
“잘 싸우냐고요.”
돌직구로 들어온 질문에 김시후가 말을 할 듯 말 듯 입술을 달싹였다.
다른 면접관들은 무안한 듯이 잠시 면접장의 벽이나 땅바닥, 서류를 쳐다봤다.
완전히 생판 난리를 치는 게 아닌 이상에야, 그들에게는 막무가내인 이동호를 막을 힘이 없었다.
몇 초 동안 생각을 정리한 김시후가 대답했다.
“나름 잘 싸웁니다.”
“다른 5급 파티의 마법사와 자신을 비교한다면 시후 씨는 냉정하게 자기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세요?”
“솔직하게 말해도 되나요?”
“말해보세요.”
“동급의 마법사 중에서는 제가 가장 낫다고 생각합니다.”
“호오…….”
확신에 찬 김시후의 목소리!
말을 뱉는 것에도 망설임이 하나도 없었다.
그 대답에 이동호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질문에는 보통 자신의 능력을 낮춰서, 혹은 애매하게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자신 있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아까 전 대련에서도 이겼다고 했으니까 그저 허울뿐인 말은 아니겠지.
“저는 유지한 씨에게 묻겠습니다.”
“예.”
“서류를 보니까……. 이전에 케로즈에 계셨다고요.”
“약 7년 정도를 케로즈에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활동 이력이 없네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그러니까요! 저도 그 이유를 듣고 싶네요.”
유지한은 생각했다.
드디어 올 게 왔구나!
비공식 파티원이었던 그의 특이한 이력은 다른 영웅에게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
“…….”
질문을 던진 면접관 외에 다른 면접관도 그 이유가 궁금한지 모두 그를 주시했다.
유지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케로즈에서 특정 파티에 소속되지 않고 근무했습니다. 여러 파티를 돌아가며 서포터 역할로 참여하기도 했죠. 그래서 공식적으로 MA에 입장하거나 이종족 침입자들과의 전투 이력은 남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케로즈의 박중섭 길드장님과 합의가 된 내용입니다.”
그는 계약서에 적힌 내용을 포함해 박중섭과 사전에 미리 말을 맞춰 놓은 대답을 했다.
여기서 면접관들에게 비공식 파티원이라는 제도에 대해 정확히 설명해 주지는 않았다.
‘나까지 처벌받을지도 몰라.’
비공식 파티원이라는 제도가 외부로 드러날 경우 운이 좋으면 그냥 넘어가겠지만.
운이 나쁘면 영웅 보호법이라는 것으로 인해 케로즈는 물론이고 그런 계약에 동의한 자신까지 함께 처벌받을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합의됐으면 문제가 없겠죠.”
“저는 아직 이해가 안 되는데…….”
어느 면접관은 납득했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는 이해하지 못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양지철 또한 그를 이해하지 못한 쪽이었다.
“지한 씨는 왜 그런 계약을 맺은 겁니까? 조금 실례지만 별다른 이유 없이 불리한 계약을 맺을 정도로 둔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데요.”
“중간에 길드를 뛰쳐나올 수도 있지 않았나요?”
“저는 케로즈의 숨겨진 가능성을 보았고 그것에 기대하며 길드에 남았습니다. 실제로 케로즈는 7년 전의 약소 길드에서 현재 중견 길드까지 훌륭하게 성장했죠.”
“그렇다면 왜 케로즈를 나온 겁니까?”
“…….”
왜 길드를 나왔냐는 질문에 유지한은 잠시 멈칫했다.
설립 초기에 합류해 최근까지 함께 했던 길드.
그리고 샘플링의 사용 결과로 거대 길드로 성장할 가능성이 60%에 달하는 유망한 길드!
그가 왜 그 가능성 높은 케로즈에서 나왔을까.
정확한 이유를 말하자면 그것은 김현태 파티의 파티원들과 케로즈 길드장 박중섭의 뜻이었다.
유지한 본인은 그들에게서 이야기를 전해 듣기 전까지는 길드를 나올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그게 그러니까…….”
하지만 그걸 이 면접 자리에서 곧이곧대로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그는 별수 없이 다른 핑계를 떠올렸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급여 문제입니다.”
“돈 문제요?”
“예.”
유지한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돈 문제였다.
“길드와 연봉 협상을 진행하던 중에 서로 일치하지 않는 지점이 생겼습니다. 그게 끝까지 합의가 되지 않았죠. 그래서 아쉽지만, 길드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계신 꿀잼의 연봉은 만족해하시는 건가요?”
“그야 물론입니다. 지금 제 옆에 있는 김시후 길드장이 저를 많이 배려해 주셔서 아주 만족하고 있습니다.”
이전 길드인 케로즈를 크게 탓하지 않고, 현재 소속된 길드의 길드장을 치켜세우기까지!
그것이 유지한이 생각해 낸 최선의 답변이었다.
면접관들은 영웅의 연봉에 대해 구체적으로 물어볼 수 없는 만큼 남은 관련 질문은 쉽게 넘겨 버릴 수 있었다.
역시 금전적인 부분은 핑계로 써먹기 참 좋은 수단이었다.
“……그러면 다시 김시후 길드장에게 돌아가서.”
“네.”
이동호가 손으로 잡고 있던 서류를 놓으며 말했다.
“저는 한 10년 정도 영웅으로 활동을 했지만, 하프 엘프가 한국에서 길드를 만들었다는 건 처음 듣습니다. 아마 꿀잼이 세계 최초일 수도 있겠죠.”
“…….”
또다시 그의 입으로 김시후의 종족과 관련된 것이 언급되었다.
유지한은 이동호를 바라보며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시후 씨는 앞으로도 지금처럼 모자를 착용하실 겁니까?”
“당분간은 그럴 것 같습니다.”
“당분간이라면 언제까지입니까?”
“그……. 정확한 기간은 모르겠습니다. 제 기분에 따라서 쓰지 않을 수도 있고.”
“현장에서 마주치는 다른 파티에게도 자신의 종족을 감출 생각입니까?”
김시후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제 종족을 굳이 주변 파티에게 알릴 필요가 있나요?”
“저는 그저 오늘 면접에 참여한 면접관으로서 궁금해서 묻는 겁니다.”
“면접관님도 아시다시피 침입자가 아니라 지구에 정착한 이종족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인식이 남아 있는 게 현실이니까요. 누군가 제게 직접 물어보지 않는 이상에야 굳이 종족을 알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언젠가 제가 유명해지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알게 될 테니까요.”
“그러면 한 가지 더 질문드리겠습니다. 만약 소속 파티가 한국에 침입한 엘프 무리와 마주쳤다고 가정하죠.”
“……?”
“그때 시후 씨는 인간과 엘프 중 어느 쪽을 도울 겁니까?”
인간과 침입자 중에 어느 편을 들 거냐는 질문.
4급 승급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질문이었다.
그리고 처음에 그가 뱉은 ‘반쪽짜리’라는 말과 다를 바 없었다.
인류를 보호한다는 기본 목표를 가진 영웅에게 묻기에는 아주 부적절했다.
‘저게 대체 무슨 말이야?’
어이가 없어진 김시후가 허탈하게 웃으며 말을 잇지 못하는 가운데.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유지한이 이동호 앞에 놓인 명패를 바라보며 말했다.
“요새 워리어즈에서는 길드원 교육을 이딴 식으로 하나 보죠?”
“……너 방금 뭐라고 했어.”
면접장에 소리 없는 폭탄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