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무기 교체
“오픈 마켓에 가 보자.”
오픈 마켓(Open Market)
온라인 영웅 거래소에서 이미지만 올려놓는 것과 달리, 마치 시장처럼 현실에서 장비를 진열하고 판매하는 공간.
여러 공방이 몰려 있기도 한 그곳은 대장장이들이 근처에 거주하며 제작과 판매를 병행하는 곳이기도 하다.
“요즘 길드는 인터넷 구매를 더 선호하지 않아요? 인터넷에는 소규모 길드 전용 할인 쿠폰도 많잖아요.”
김시후는 휴대폰을 조작하여 언젠가 받아 놓은 장비 할인 쿠폰을 보여 주었다.
영웅부에서 중소 길드를 지원한다는 정책으로 공방에 협조를 부탁해서 뿌려진 것들이었다.
이름 있는 공방에서도 사용할 수 있고 할인율도 금액 제한 없이 20%, 30%로 꽤 높았다.
30%를 기준으로 보면 1억짜리 무기를 살 때 3천만 원 가까이 할인해 준다는 소리다.
하지만 유지한은 고개를 저었다.
“할인 쿠폰은 평소에 잘 안 팔리는 장비에나 적용되는 거지. 난 내가 쓰는 장비만큼은 직접 가서 보고 사.”
워낙 인기가 없어서 재고가 남아도는 장비들.
할인 쿠폰은 대체로 그런 장비에나 적용할 수 있다.
반대로 인기 있는 장비는 쿠폰 사용을 완전히 막아 둔다.
공방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지역은 서울?”
“아니. 인천.”
한국의 오픈 마켓은 특별시인 서울을 포함해 광역시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울산까지 총 7개의 행정 구역에 존재한다.
유지한은 사무실이 있는 인천의 오픈 마켓에 방문할 예정이었다.
김시후는 궁금한 듯 물었다.
“서울 지점이 더 낫지 않아요?”
“보통은 그렇겠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장인이 모인 곳은 서울이다.
동시에 가장 많은 사람이 방문하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거긴 사람도 많고, 땅값도 비싸고, 파는 장비도 비싸다.
작은 길드가 그런 곳에서 장비를 구하려는 건 무모한 일이었다.
“내가 예전에 가 봤는데, 다른 지역도 그리 나쁘지 않아.”
유지한은 광주와 대전, 울산을 제외하고 나머지 4개 지역에 있는 오픈 마켓에는 개인적으로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름 쓸 만한 장비를 구할 수 있었다.
현재 그가 착용한 장비는 한 번에 세트로 구입한 것이 아니라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드는 부위를 하나씩 구매한 것이었다.
만든 공방에 따라 모양도 제각각이고 미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장비의 품질이나 효율을 생각해 보면 썩 나쁘지 않았다.
*****
김시후와 유지한은 인천의 오픈 마켓으로 이동했다.
이곳도 MA와 마찬가지로 입구에서 영웅 신분 조회가 있었다.
영웅이 아닌 일반인은 특수 장비를 구매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랜만이다.”
유지한이 오픈 마켓을 쭉 둘러보았다.
일자로 쭉 뻗은 차로 옆으로 도보와 함께 크고 작은 건물들이 주르륵 나열되어 있었다.
일본에서 수련한 장인들이 모여 있다는 공방.
한국 영웅 만족도 1위라며 홍보하는 공방.
오직 마법사 전용 장비만을 제작한다는 공방.
가지각색의 공방과 영웅들을 위한 여러 소모품 상점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인천 쪽은 처음 와 봤어요.”
“서울보다는 작아.”
“그래도 유명한 업체는 다 보이네요.”
오픈 마켓의 정문 입구 앞.
접근성이 가장 좋은 자리에는 김시후도 이름을 한 번쯤 들어본 업체들이 줄지어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유지한이 찾는 건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좀 걷자.”
그들은 앞으로 쭉 걸으며 오픈 마켓을 훑었다.
앞서 이곳에 방문한 사람들이 여럿 보였다.
대부분 여기서 새로운 장비를 구매한 사람들이었다.
김시후는 새 무기를 들고서 기뻐하는 누군가를 보며 말했다.
“저희도 여기서 구매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너무 비싸.”
“뭣하면 길드 전용 대출이라도…….”
길드에는 전용 대출 서비스가 존재한다.
은행들은 길드가 짧은 기간에 큰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기에 작은 규모의 길드더라도 억 단위로 돈을 빌려주곤 한다.
자금이 딸리는 초기 길드가 장비 구매로 빚더미에 오르는 건 종종 발생하는 일이다.
“아서라, 대출은 함부로 받는 거 아니야.”
“금방 갚으면 되잖아요.”
대출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필요할 때만 이용하겠다.
그렇게 대답한 유지한은 방향을 틀어 어느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깨끗한 바깥 거리와는 달리 여기저기 쓰레기가 굴러다니고 약한 담배 냄새가 풍기는 골목길이었다.
깡! 깡! 깡!
골목을 깊숙이 들어갈수록 방음이 되지 않는 공방의 망치 소리가 커졌다.
비릿한 쇠 냄새와 매캐한 담배 냄새가 심해지자 김시후가 코앞에서 손바닥을 휘저었다.
“콜록! 여기에 뭐가 있어요?”
“이런 곳에 가끔 숨겨진 보석들이 있지.”
“형이 예전에 장비 샀던 곳이요?”
“거긴……. 지금도 있으려나 몰라.”
“네?”
“자주 바뀌거든.”
유지한은 과거에 오픈 마켓에 방문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땐 주로 작은 공방에서 이름을 알리기 위해 저렴하게 판매하는 장비들을 구경했었다.
아쉽게도 그런 곳은 재방문하면 오픈 마켓에서 버티지 못하고 사라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이쪽도 살아남기가 꽤 어려운 시장이었다.
“아마 이쯤이었을 텐데…….”
지형 자체는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골목길.
유지한은 어렴풋이 기억하는 지점에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분명 가성비 좋은 갑옷을 구했던 공방이 근처에 있었다.
‘검색해도 안 나오고.’
인터넷에 검색해서 나올만한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직접 걸어 다니며 찾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주변에 있던 다른 잡화점에 들어가서 길을 물었다.
“거기? 진작에 망했지.”
“아…….”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망했다는 소식이었다.
잡화점을 빠져나온 김시후가 진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역시 대출을 받는 게…….”
“며, 몇 군데 더 있어.”
유지한은 기억에 의존하며 과거에 인천 오픈 마켓에서 방문한 곳들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하나같이 다 장사를 접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거리는 예전 그대로지만 공방의 월세는 높아져서 대부분 버티지 못했다는 모양이었다.
‘조금 씁쓸하네.’
가장 낮은 등급인 5급 영웅조차도 유명 공방에서 제작한 장비를 착용할 정도니, 영세업자가 망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일까.
하지만 오늘 이곳에서 적어도 무기만큼은 구해야 한다.
‘어쩔 수 없나.’
결국, 유지한조차 대출을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
그가 문득 고개를 올려보니 작은 간판이 보였다.
글자 대신 X 모양으로 교차한 칼과 방패가 그려진 간판이었다.
그것이 눈에 매우 낯익었다.
“아!”
그는 지금 들고 있는 검을 그곳에서 구매했다는 걸 기억해냈다.
적어도 한 곳은 살아 있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낡은 문을 열어 재꼈다.
안에서 은색 갑옷을 천으로 닦고 있던 누군가가 그를 바라봤다.
“안녕하세요.”
“……손님이신가요?”
“네.”
“어서 들어오세요!!”
손님이라는 말에 긴 턱수염을 가진 중년 남자의 얼굴이 밝아졌다.
가게에 방문객이 얼마나 적었으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손님인지 물어봐야 할 정도일까.
안으로 들어온 유지한은 진열된 장비를 구경했다.
‘크게 달라진 건 없나.’
큰 길가에 있는 공방보다 대체로 저렴한 가격대의 장비들.
크기가 작은 단검은 30만 원에 파는 것도 보였다.
하나같이 몬스터의 소재가 섞였다는 걸 고려하면 매우 저렴한 가격이었다.
‘아, 맞다.’
유지한은 챙겨온 검을 들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여기 사장님이시죠?”
“맞습니다.”
“장비 수리도 받으세요?”
“받긴 합니다만……. 먼저 상태를 확인해야 합니다.”
“이것 좀 봐주세요.”
유지한이 검을 검집 채로 그에게 건넸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검을 뽑아서 커다란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어디선가 돋보기를 꺼내어 검을 살펴보는데…….
“음?”
검자루의 바닥 면을 살피던 그가 눈을 아주 크게 떴다.
“이 익숙한 마감, 설마 저희 가게에서 구매하신 건가요?”
“맞습니다.”
“호오, 이것 참……!”
그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과거의 작품을 만난 게 무척 반가운 것이다.
“부끄럽지만 이건 아마도 3, 4년 전쯤 제가 만들었던 검 중에 하나입니다.”
“제가 딱 그때 구매했습니다.”
“설마 여지껏 사용하는 분이 계실 줄 몰랐습니다! 보아하니 열심히 관리하신 것 같은데…….”
그가 칼등을 손가락 하나로 천천히 훑었다.
그러다 칼등의 중간, 약하게 금이 간 부분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애석하게도 검의 수명이 다했군요.”
“수리는 어렵나요?”
“여기서 살릴 수 있는 건 손잡이 하나뿐입니다. 만약 수리한다면……. 새로 만드는 거니까 이전과 완전히 다른 물건이라고 봐야죠.”
유지한이 예상하던 대로 검의 수리는 불가능했다.
애초에 수리하고 싶을 정도로 비싼 물건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마침 이것과 비슷한 검이 하나 있는데, 보여드릴까요?”
“한번 보여 주세요.”
남자는 가게 안쪽으로 들어가서 보라색 보자기로 싸인 검을 가져왔다.
보자기를 벗기자 안에서 나온 것은 유지한이 사용하던 것과 비슷한 형태의 검.
유지한은 그 검을 들어 올렸다.
‘좋은데?’
소재는 모르겠으나 이전에 사용하던 검보다 조금 더 가벼운 무게, 그런데도 익숙한 그립감이었다.
새것이라 그런지 날에서 날카로운 예기가 느껴지는 것이 상당히 쓸 만해 보이는 물건이었다.
당장 정해진 예산 내에서 살 수 있을까 의문이 생길 정도로 말이다.
“몽골에서 발생한 몬스터, 앵그리 야크(Angry Yak)의 단단한 뿔을 갈아 넣은 물건입니다. 손잡이 장식에도 녀석의 가죽을 사용했고, 얇긴 하지만 검날에 마력 코팅도 들어가 있죠.”
“그……. 되게 비싸 보이네요.”
“사용된 뿔이 딱 내구도가 상승하는 정도로만 소량이기 때문에, 가격대가 그리 높지는 않습니다.”
“얼마에요?”
“지금 구입하시면 5천만 원에 드리겠습니다.”
5천만 원.
물건의 품질치고는 꽤 낮은 가격이었다.
<—오늘 오픈 마켓에서 5천만 원으로 눈앞의 검보다 비슷하거나 더 좋은 검을 구매할 확률>
<2% 미만>
샘플링으로 확인한 결과 다른 공방에서 같은 가격대로 비슷한 무기를 구할 확률은 아주 낮았다.
좋은 가성비의 물건이 틀림없다.
잠시 고민하던 유지한은 김시후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건 그냥 내 개인 돈으로 살게.”
“네?”
“마음에 들었거든.”
유지한은 케로즈에서 지급한 급여를 꾸준히 저금해 왔다.
현재 그의 계좌에 남아 있는 돈은 약 2억 남짓.
사치를 부리는 편은 아니었기에 집을 구매했을 때를 제외하면 큰돈을 쓴 적은 없었다.
본래 영웅 활동에 필요한 기본 장비는 길드에서 사주는 게 관례이지만.
무기에 투자하는 돈 정도는 개인적으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싫어요.”
김시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형! 이러면 제가 사람 뽑아 놓고 장비 하나 못 사주는 무능한 대표 같잖아요.”
“아니, 돈이야 어떻게든 버니까…….”
“아무튼 싫어요. 제 돈으로 사던지, 아니면 당장 길드 이름으로 대출 신청할 테니까 잠깐 기다려 봐요.”
김시후가 대출을 받겠다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유지한이 그것을 말리던 순간이었다.
두 사람을 유심히 지켜보던 공방의 주인이 입을 열었다.
“두 분은 같은 파티원이신가요?”
“아, 예.”
“그러면, 저기……. 제가 드리고 싶은 제안이 있는데.”
“예?”
남자는 손가락으로 턱수염을 꼬아 대며 머뭇머뭇 망설였다.
그러다가 몇 초 후, 결심한 듯 말했다.
“이 검을 무료로 넘겨드릴 테니, 언젠가 파티에서 저희 브랜드를 언급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
한두 푼도 아니고 5천만 원짜리 검을 공짜로 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