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계약
길드 케로즈의 빌딩.
검은 정장을 입은 남성이 건물 1층 복도를 가로지르며 달렸다.
“허억, 허억…….”
거친 숨까지 몰아쉬며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그가 향하는 곳은 건물의 최상층.
뛰어오느라 단추가 풀린 재킷을 엘리베이터 안에서 단정하게 정리했다.
잠시 후 최상층에 도착한 그가 사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길드장님!”
“무슨 일이야?”
“유지한 씨가 길드를 나갔다는 게 사실입니까?!”
“그래. 지한이는 어제부로 우리 케로즈를 떠났다.”
“허…….”
길드장 박중섭의 답변에 남자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하루 만에 모든 절차가 끝나 버릴 줄이야.
소식을 듣자마자 나름 급하게 달려왔는데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그는 품속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고는 말했다.
“결국, 내보내신 건가요?”
“어허!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난 제안을 했을 뿐이고 최종 결정은 지한이가 내린 거야.”
“이건……. 이건 정말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습니다.”
“뭐?”
박중섭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미 다 끝난 일에 지적을 받는 것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지한 씨가 우리 길드를 위해 헌신한 것이 자그마치 7년입니다.”
“그래서?”
“절대 이렇게 허무하게 내칠 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아니기는. 현태를 비롯한 다른 파티원의 평가는 너도 꾸준히 전달받았을 거 아니야?”
“단순히 성적을 얘기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비공식 파티원이었던 지한 씨가 길드를 위해 크게 희생했던 것도 생각해 주셔야죠. 차라리 저한테 말씀해 주셨다면 다른 보직이라도 마련했을 겁니다.”
“현역 영웅으로 활동하던 지한이가 그걸 과연 받아들였을까?”
“물어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이죠. 이제는 물어볼 수조차 없겠지만…….”
위험한 전투가 잦은 영웅들의 컨디션이나 멘탈 등을 관리하는 부서.
지금 박중섭 앞에서 아쉬움을 드러내는 남자 이현재는 그 매니지먼트 부서의 총괄팀장이었다.
튼튼한 신체를 믿고 자기 관리에 소홀한 영웅들과 달리 매니지먼트 부서와 자주 소통하며 항상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고자 했던 유지한은 길드에서 이현재와 가장 많이 마주쳤던 영웅이었다.
“지한 씨는 다른 길드로 간 겁니까?”
“모르지.”
“…….”
이현재는 박중섭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그래도 유지한은 1위 파티의 멤버가 아니었던가.
비록 어제 나갔다고는 하지만, 저렇게나 관심 없는 태도라니.
최소한 그를 다른 협력 길드에라도 보내 줄 수 있었다.
“저는……. 이번 선택이 길드의 역사를 통틀어 정말 큰 실수였다고 생각합니다.”
“현재야. 그건 선을 조금 넘는 발언이 아닐까?”
“케로즈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 정도는 말할 수 있어야죠. 그게 아니라면 길드장님은 길드를 제 마음대로 주무르는 독재자가 되시렵니까?”
“아까부터 단어 선택이 자꾸 거슬리는데, 서로 말조심 좀 하자.”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하고 약간의 신경전이 벌어졌다.
이현재는 길드장인 박중섭에게서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부하 직급이지만, 그도 길드의 시작을 함께한 사람으로서 길드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 책임이 있었다.
“무엇보다 이번 결정으로 소속 길드원 처분에 대해서 좋지 못한 말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제가 지한 씨에게 개인적으로라도 도움을 주려는데, 그건 문제없겠죠?”
“그 정도는 괜찮겠지. 하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적이어야 해. 길드의 자원을 맘대로 끌어다가 쓰지는 말라고.”
“……예.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
꿀잼의 사무실에서 김시후와 대화를 나누던 유지한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방금 보인 초록색 덩어리가 정령이라고요?”
“네!”
“제가 그 정령과 계약을 맺었다고요?”
“아, 그렇다니까요!”
김시후는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그만큼 답답하다는 의미였다.
“이 지팡이는 바람의 정령 실프가 깃들어 있는……. 아니, 깃들어 있던 아티팩트였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 정령이 유지한 님과 계약하고 지팡이를 떠났어요!”
“…….”
유지한은 그저 플로른이라는 귀한 소재로 만든 아티팩트를 구경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대가로 너무 큰 일이 벌어졌다.
저 지팡이는 그 자체로 엄청난 가치가 매겨질 수 있는 물건.
그런데 김시후의 말처럼 보기 힘든 정령이 깃들어 있었다면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내가 정령사라고?’
영웅 중에는 자기 본연의 힘 외에 정령과 계약하여 특별한 힘을 사용하는 부류가 존재한다.
사람들은 그들을 정령의 계약자, 혹은 정령사라고 부른다.
정령사가 보여 주는 힘은 영웅마다 천차만별이지만, 단순히 정령과 계약을 맺었다는 되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한국을 벗어나 해외까지 널리 알려질 뉴스 거리가 될 만하다.
“정령은 어떻게 소환하는 거죠?”
“당장은 어려울 텐데……. 속으로 정령에게 한 번 부탁해 보세요.”
속으로 부탁해 보라니…….
유지한은 김시후의 짧은 조언에 따라 마음속으로 실프를 떠올렸다.
그리고 내 앞에 나타나달라고 부탁했다.
뾰롱!
그러자 진짜로 눈앞에 초록색 빛덩이가 등장했다.
감탄하는 유지한의 옆에서 김시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정령을 한 번에 소환했어?!’
정령과의 계약을 마쳤다고 해도 정령을 자유롭게 소환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정령과의 친밀도를 꾸준하게 쌓은 뒤에야 가능한 일이다.
예를 들어 불의 정령의 경우, 라이터나 가스레인지처럼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불에 겁먹지 않고 익숙해지는 훈련이 필요하고, 물의 정령의 경우 강이나 바다처럼 물이 많은 곳에 몸을 오랫동안 담그는 훈련이 필요하다.
정령의 특성과 계약자의 상황에 따라 친밀도를 올리는 방법도 가지각색이다.
그런데 유지한은 계약을 마치자마자 실프를 소환했다.
해외의 정령사중에 바람의 정령과 친해지기 위해서 강력한 태풍 속에 자기 몸을 던진 사람이 있는 것을 생각하면 아주 놀라운 장면이었다.
“이게 정령…….”
공중에 둥둥 떠오른 실프가 유지한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깃털처럼 가벼운 무게였다.
눈을 위로 치켜뜨며 정령을 바라보던 유지한이 중얼거렸다.
“제가 들었던 정보에 따르면 정령과의 계약도 파기할 수 있다고 하죠.”
“네?”
“원하시면 실프와의 계약은 파기하겠습니다.”
“네에?!”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의 김시후.
사람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유지한의 머리 위 실프도 몸을 흠칫하고 떨었다.
유지한은 그에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부모님의 유품에 있던 정령이잖아요. 제3자인 제가 함부로 사용할 수는 없는 힘이죠.”
그냥 아티팩트도 아니고 돌아가신 부모님의 유품 속에 깃들어 있던 정령이다.
예상치 못한 기연에 욕심이 난다고 한들, 유지한은 그것이 자기 마음대로 다룰 수 없는 힘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김시후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말했다.
“그건 안 돼요.”
“왜요?”
“정령은 무척 까다로운 존재예요. 여기서 계약을 강제로 파기한다고 한들, 한 번 떠난 집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정령이 계약자를 선택하는 기준은 음식을 평가하는 미식가보다도 훨씬 까다롭다고 알려진다.
그 기준은 영웅이 강한 정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그들은 심지어 영웅의 힘을 각성하지 않은 일반인과 계약하는 경우도 있었다.
워낙 자유분방한 존재들인 탓에 계약을 파기하는 순간 지팡이로 돌아가기는커녕,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정령계로 떠나 버릴 게 분명했다.
“그리고 제가 말했잖아요. 지한 님 면접 합격이라니까요? 꿀잼에 들어와서 길드의 전력이 되면 크게 문제없는 일이죠. 설마 다른 길드로 가시려는 건 아니겠죠?”
“저야 물론 길드에 들어가기만 하면 좋습니다만, 길드장님은 그걸로 괜찮으세요?”
“어차피 실프가 워낙 까다로운 놈이라 다시 지팡이로 돌아와도 저랑은 계약을 안 할걸요. 오늘 이렇게 실프를 직접 보는 건 정말 몇 년 만이에요.”
김시후가 손을 앞으로 뻗자 실프가 자연스럽게 그의 손바닥 위로 올라탔다.
“날 아직 기억하고 있구나…….”
그는 잠시 감상에 젖었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적에 이와 비슷한 행동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유지한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 바로 계약서 작성할까요?”
“아! 그렇죠. 잠시만요.”
자기 책상 앞으로 이동한 김시후가 서랍을 뒤적거렸다.
그가 곧 꺼내 든 것은 작은 볼펜과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빈 A4용지였다.
“자, 지금부터 적어 볼까요?”
“……?”
지금부터 적어 볼까요, 라니.
진심으로 말하는 걸까.
조금 어이가 없어진 유지한은 눈을 가늘게 뜨고 김시후를 바라봤다.
“계약서 기본 양식은 없나요?”
“……꼭 있어야 하나요?”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당장 영웅부 홈페이지만 들어가도 쓸 만한 양식은 있죠.”
“아!”
“그리고 앞으로 길드가 커질 것을 생각하면 이런 종이보다 영웅부에서 제공하는 시스템을 이용한 전자 계약이 더 편할 거예요.”
“그런 것도 있었군요!”
“…….”
“이렇게 갑작스럽게 길드원을 뽑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 해서…….”
영웅 학원에서 수석 졸업했다던 김시후는 무언가 허점이 많이 보였다.
유지한은 현업에서 자주 사용하는 프로그램 따위를 그에게 알려 주며 계약서를 준비하도록 했다.
다행히 나이가 어린 김시후가 최신 프로그램 사용법을 익히는 것은 큰 어려움이 없었다.
“어느 정도 준비가 됐네요.”
“네! 이제 연봉을 협상할 차례죠?”
연봉 협상.
길드에 합류하는 것이 거의 확정 시 된 유지한이 돈을 얼마나 받아야 할지 결정하는 것은 아주 민감하고도 중요한 문제다.
김시후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했다.
“원하시는 금액이 있으신지…….”
“흠.”
7년 차 영웅 유지한.
그는 자신의 가치를 어느 정도로 잡아야 할지 고민했다.
외부로 드러나는 이력은 없지만, 실제 경험만 따지자면 상당히 높은 수준의 보수를 요구해야 하는 것이 맞다.
하물며 정령과의 계약으로 유지한이 아니라 길드가 더 아쉬운 입장이 되었다.
하지만……. 22살의 어린 나이인 길드장과 이 허름한 사무실로 보아, 꿀잼 길드가 많은 돈을 가졌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 큰돈을 요구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돈은 딱 최저임금만 받겠습니다.”
“겨우 최저임금이요? 아르바이트를 해도 그것보단 잘 벌 텐데…….”
“그 대신 길드의 지분 일부를 제게 넘겨주십시오.”
유지한이 요구한 것은 길드의 지분.
요컨대 길드의 소유권을 일부 가져가겠다는 것이다.
‘다시는 전과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겠어.’
그는 이전 길드인 케로즈에서 오랫동안 헌신한 끝에 버려졌다.
몸담은 길드에게 버려지는 경험을 두 번 다시 겪지 않기 위해서는, 길드의 지분을 소유한 주인이 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집에서 집주인을 내쫓을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휴, 다행이다.’
한편, 김시후는 그가 돈을 요구하지 않고 지분을 달라고 한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길드가 가진 돈이 실제로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을 뽑거든 처음부터 돈 대신 지분을 넘길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얼마만큼의 지분을 원하시죠?”
“가능한 한 많이요.”
“그럼 50%는 어떤가요? 딱 절반 드릴게요!”
“……절반? 미쳤어요?!”
“네?”
“아니, 지분을 절반이나……!”
유지한은 무척 황당해하며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학원 수석 졸업이라며, 진짜 똑똑한 거 맞아?’
오늘 처음 만난 사람한테 길드를 절반 잘라서 넘겨주겠다니!
김시후는 그게 얼마나 위험한 행동인지 모르고 있었다.
요즘 영웅 학원은 기본 지식도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일까?
“그냥 25%만 주세요. 이것도 한 명이 갖기에는 상당히 많은 양이지만…….”
“네! 그렇게 해요.”
협상은 그렇게 서로가 만족하는 선에서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준비된 계약서에 사인을 적는 유지한은 생각했다.
‘반드시 이 길드를 크게 키운다.’
비록 첫 직장에서는 추방됐지만.
두 번은 실패하지 않겠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도요!”
이 작은 사무실에서 맺은 계약이 미래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그들은 아직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