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너리움 광산 -->
“그런데 꼭 들어가야 하나요.......”
레이아라는 여전히 불만이 많았다. 상처 입었다 해도 리치는 리치. 몸이 완전히 박살났다고는 하지만, 때로는 상처 입은 맹수가 더욱 매서운 법이다. 절대 방심하지 않으니까.
“잡으려면 지금이 기회야.”
카르안은 뜻을 꺾지 않았다. 만약 얻을게 금화와 정체모를 마법도구들밖에 없다면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상은 오크대장이 말한 금화와 마법도구가 전부가 아니다.
“어차피 언젠가는 이너리움을 구해야한다.”
지금 미뤄도 결국 싸워야 한다. 그게 끝이 아니다. 만약 시간을 더 줘서 리치가 제 힘을 전부 찾게 되면 누구부터 노리겠는가. 가장 가까운 영지인 알페라츠 백작령이다.
리치는 당장 백작령을 공격하고 세력을 키울 것이다. 신출귀몰한 리치라는 적을 상대하려면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결국 사이프카르가 나서기라도 하면 상황은 종료되겠지만.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피를 볼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카르안은 방어보다 공격을 좋아했다. 일방적으로 수비만 해야 하는 것은 그가 원하는 그림이 아니다.
“뭐, 영지민을 지키는 게 백작으로써의 의무이기도 하고.”
“그러면 저 오크들은 어쩌실 생각이죠?”
뮬리펜이 온 몸이 묶인 오크들을 가리켰다. 그들은 전부 포기한 듯, 세상 전부를 잃은 표정으로 주저앉아있다.
“이너리움을 캐려면 광부들이 있어야 하지 않나. 공짜 인력이지.”
오크의 강인한 체력인 인간을 뛰어넘는다. 단순 노동에서 누구보다 뛰어난 효율을 자랑하기에, 카르안은 그들을 노예로 부릴 생각이었다. 험한 이너리움 광산을 개척할 광부들로.
만약 오크들이 카르안의 말을 알아들었다면, 지금보다 더욱 절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들은 제국어를 알지 못했다. 단지 눈을 부릅뜨고 있는 기사들의 눈치를 보고만 있었다.
“오크들은 그렇다 치고. 지금 광산은 큰 편이 아니다. 우르르 몰려가봐야 서로 걸리적거려.”
넓은 평지였으면 수의 이점을 살리겠지만 상대는 좁은 광산 안에 있다. 안 그래도 비좁고 컴컴한데 단체로 쳐들어 가봐야 오히려 마이너스. 수가 많은 게 없느니만 못할 수가 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섯 명 이상은 오히려 방해만 될 거에요.”
서로 몸을 비비며 들어갔는데, 리치가 파이어볼이라도 한번 날린다면. 그 안은 불지옥이 된다. 공간이 넉넉하면 피해보기라도 하지, 서로 엉켜 있다가 비명도 못 지르고 죽는 셈이다.
“좋아. 아무튼 가 보자고.”
“으음........”
말없이 따라오는 카라나리. 그리고 역시 그녀의 뒤를 따라오는 뮬리펜. 반면 레이아라는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가능하면 위험은 피하는 게 장수의 비결’이 그녀의 신조였으니까.
“오기 싫으면 안 와도 된다. 내가 너에게 부탁한 것은 오크를 처리하는 것 까지였으니까.”
카르안은 레이아라에게 따라올 것을 명령하지 않았다. 오히려 광산 안에 들어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있다. 정말로 카르안이 레이아라에게 부탁한 일은 거기까지였으니까. 레이아라가 긴 머리를 한번 쓸었다.
“하아. 제가 없으면 어디서 개복치마냥 돌연사 할지도 모르니까요. 이번만 따라가 드릴게요.”
“고마워.”
“고, 고마워 할 거 없거든요? 돈은 더 받을 거니까!”
레이아라는 투덜거리며 단궁을 꺼냈다. 아무래도 좁은 곳이다 보니, 평소에 즐겨 사용하던 장궁의 위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단궁은 장궁보다 그 화력이 떨어진다. 하지만 연사가 빠르고, 작기에 걸리적거리지도 않는다. 저런 좁은 곳 안에 어울리는 무기.
“적극적으로 공격하지는 말고, 그냥 뮬리펜만 지켜줘.”
“예에~”
카르안의 말에 레이아라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어쩌다가 이런 호랑이굴에 제 발로 들어가게 됐는지. 다른 사람의 부탁이었으면, 금화고 나발이고 절대 수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카르안은 기사들에게 주변 경계를 명령한 후, 앞장서서 광산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에 기사들은 함께 가겠다고 했지만, 곧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지 깨달았다. 그들도 경험이 있는 베테랑. 좁은 곳에서 많은 수는 독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휴.”
레이아라의 입술에서 안타까운 한숨이 나왔다. 카라나리부터 맨 뒤에 있던 뮬리펜까지 광산 안에 들어가자, 그녀도 일행을 뒤따라갔다.
2.
“여기서부터는 제가 앞에 서겠습니다.”
카라나리는 한손에 횃불을, 다른 한손에는 장검을 든 채 천천히 걸었다. 단순히 경계를 하는 게 아니다. 그녀의 예민한 감각은, 주변의 모든 위험을 완벽하게 감지하고 있다.
레이아라도 마찬가지. 오히려 감각이 예민한 것은 엘프인 레이아라였다. 그 두 명이 있는 이상, 어지간한 함정은 문젯거리도 되지 않는다.
평범한 함정이라면.
“조금 어둡네요.”
뮬리펜이 준비한 횃불로 주변을 비추었다. 카라나리와 뮬리펜. 두 개의 횃불이 있었지만 주변은 이상하게 어두웠다.
“으, 눅눅해.......”
레이아라가 끈적거리는 피부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동굴 같은 곳 안이라 덥지는 않았지만, 여름 특유의 습기가 문제였다. 눅눅한 공기는 분위기를 무겁게 가라앉히고 있다.
“그래도 시원하잖아요.”
뮬리펜이 애써 긍정적으로 말했다. 만약 이런 습기에 덥기까지 했다면 그것도 끔찍하겠지. 괜히 여름에 불쾌지수가 하늘을 찌르는 게 아니다.
“단순한 한기가 아닙니다. 이건 자연적인 게 아니에요.”
“자연적인 게 아니라니. 원래 이런 곳은 시원하지 않나?”
“그렇기는 하지만, 한여름에 한기가 들 정도는 아닙니다.”
카라나리가 매서운 눈으로 어둠 한구석을 노려보았다. 지독할 정도의 냉기. 모든 온기를 빨아들이는 차가움이 광산 깊숙한 곳에 있다. 다만 아직 거리가 멀리 떨어져있기에, 카라나리를 제외하면 단순한 광산 안의 시원한 공기라고 착각하고 있다.
“이 비석인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기사가 말했던 비석을 볼 수 있었다. 카르안의 키만한 비석. 검고 반들거리는 비석에는, 붉은 색으로 기묘한 무언가가 새겨져 있었다. 카르안이 그 글자를 살펴봤다.
“그림은 아니야. 무슨 언어 같아 보이기는 하는데.”
깔끔하게 각이 진 모양의 글씨. 카르안은 눈을 찌푸렸다. 무슨 이집트의 상형문자 같기도 하고, 한자 같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글자’가 일정한 규칙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알아볼 수 있겠어?”
“이 글자는.......”
뮬리펜이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떴다. 그녀는 횃불을 가까이 대더니, 한자 한자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10분 뒤, 모든 글자를 확인한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마족의 언어도, 엘프의 언어도 아니에요. 4대 신.......”
“알샤인인가?”
“아니요. 그것보다 훨씬 공격적이에요. 이건 자락투스. 자락투스가 직접 사용하는 언어.”
그때, 뮬리펜이 홀린 듯 광산 안쪽으로 들어가려했다. 카라나리가 황급히 그녀의 어깨를 잡았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어둠속으로 걸어가려한다.
“위험해. 기사들도 이 비석을 넘어가자마자 공격을 당했다고 들었다.”
카르안도 뮬리펜을 막았다. 두 사람이 붙잡자 뮬리펜은 더 이상 앞으로 가지 못했다.
“위대한....... 자락투스께서.......”
“상태가 좀 안 좋아 보이는데.”
카르안이 뮬리펜의 눈을 확인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빛을 잃었다. 마치 깊은 최면에 빠진 것처럼. 레이아라는 뮬리펜의 상태를 확인하자마자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심령, 영혼이 제압당한 것 같아요.”
“설마 리치가 여기까지.......”
“그건 아닐 거예요. 문제는 이 비석에 있는 글자.”
레이아라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비석을 째려봤다. 단정한 규칙성을 지닌 글자들. 그 차가운 글자들은, 지식이 없는 자에게는 침묵하고 있었다.
“단순한 언어라 해도 위대한 존재의 편린(片鱗). 잘못하면 이렇게 정신이 제압당해도 이상하지 않아요.”
“우리는 멀쩡하잖아.”
“저희는 그 뜻을 읽지 못했으니까요.”
그렇게 말한 레이아라는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냈다. 그리고 한번 숨을 들이쉬더니, 자신의 팔을 단검으로 그었다.
“뭐하는 거야!”
카르안이 어이가 없어서 소리쳤다. 이 엘프가 뭘 잘못 먹었는지, 갑자기 자해를 하는 것 아닌가. 차라리 웅얼거리는 뮬리펜 쪽이 정상으로 보일 정도다. 적어도 자기 팔을 긋지는 않았으니까.
“으으으........”
레이아라는 상당히 괴로운 표정. 그녀는 앉은 다음 뮬리펜을 무릎 위에 눕히더니, 피가 흐르는 팔을 뮬리펜의 입가에 갖다 대었다. 빨간 핏방울이 뮬리펜의 입가에 흘러 들어간다.
“뮬리펜 성녀는 뱀파이어가 됐다고 했죠? 그렇다면 이렇게 하면 돼요.”
비록 강대한 무언가에 압도당했지만 뮬리펜은 뱀파이어. 정신적인 공격에는 인간보다 강하다. 자체적으로 정신 공격에 대한 저항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 저항력을 더욱 강화시키는 방법. 순수한 피를 마시면 된다. 그 피가 깨끗할수록, 많은 마나를 머금고 있을수록 흡혈귀의 힘이 강화된다.
동족의 피를 마실 때처럼 영구적이지는 않지만, 순간적으로 회복력부터 마력까지 전부 증폭된다. 그리고 피 중에서 가장 맑은 피는 엘프의 피였다.
“아아?”
레이아라의 피를 마시자, 뮬리펜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왔다. 그녀는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아직 리치는 구경도 못했는데.”
벌써부터 이렇게 한명이 쓰러지다니. 카르안이 뮬리펜을 일으켜 세워 주었다. 뮬리펜은 잠깐 비틀거렸지만, 이내 중심을 잡았다.
“괜찮아요?”
“예. 오히려 전보다 힘이 나는 것 같은.......”
고개를 돌린 뮬리펜과 레이아라의 눈이 마주쳤다. 엘프의 팔에서는 아직 피가 흐르고 있다. 비록 깊게 베이지는 않았지만. 바로 피가 멈추지는 않는다.
“죄, 죄송해요.”
“이정도 쯤이야 별거 아니에요........ 그리고 그 맛있어 보인다는 표정은 하지 말아주세요.”
뮬리펜은 피를 본 피라냐처럼 몸이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는 지금 하급 뱀파이어는 아니었지만, 아직 흡혈충동을 제어하기는 많이 어리다.
평소에도 피를 최대한 먹지 않는 뮬리펜. 그러다가 갑자기 갓 짜낸 엘프의 피를 맛보았다. 그녀에게는 천상의 음식이 따로 없을 것이다.
“둘이 뜨거운 시선교환은 그만하고, 이거 상처에 뿌려.”
카르안은 A급 회복포션을 건네주었다. 삼키는 게 아닌 뿌리는 유형. 레이아라가 상처에 포션을 뿌리자, 베여졌던 상처는 금세 아물었다.
“뮬리펜씨. 저 비석에는 뭐라고 적힌 겁니까.”
그사이 주변을 경계하던 카라나리가 물었다. 뮬리펜은 잠깐 몸이 경직되었으나, 이내 괜찮다는 듯 말했다.
“간단해요. 현명한 자는 죽지 않을 것이다.”
“.......그게 끝?”
“예. 그게 끝이에요.”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카르안이 비석을 툭툭 건드렸다. 뭔가 의미심장한 뜻이 숨어있을 줄 알았는데, 이건 그냥 동네 꼬맹이들도 할 수 있는 소리였다.
“그 뜻이 단순한건 아니에요. 제 생각에는 ‘이 안에 들어오면 죽는다.’ 쯤 되는 경고 같아요.”
“대체 어떤 사고과정을 거치면, 현명한 자는 죽지않는다가 그런 경고문이 되는 겁니까?”
뮬리펜의 말에, 카르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주변 사람들도 마찬가지. 도저히 대화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현명한 자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똑똑한 사람이 아니에요. 자락투스는 신 중에서도 가장 호전적이고 오만한 신. 아마 현명한 자라고 하면 자신의 추종자를 말하는 거겠죠.”
“그러니까 자신의 신도는 죽지 않는다? 그건 조금 이상한데요.”
레이아라가 팔에 붕대를 둘둘 감았다. 피는 완전히 멎어있다.
“또 다른 의미도 있어요. 이 뒤에는 생략되어있지만, 현명한 자는 죽지 않는다 라는건, 그렇지 않은 자는 전부 죽이겠다는 뜻이거든요. 다른 신은 몰라도 자락투스가 남긴 말은 항상 그렇죠.”
같은 말이라도, 뮤프리드같은 온순한 신과 흉폭한 신이 하는 말은 그 의미가 달라진다. 뮬리펜의 신학에 대한 공부. 그게 빛을 내고 있었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요상한 경고문이군.”
카르안은 별로 두렵지 않았다. 비록 무르짐이 강신한 상태였지만, 거의 완벽히 강신한 알샤인과 직접 싸워보기도 했다.
저 자락투스라는 신이 직접 튀어나올 것도 아닌데, 이정도로 겁먹지는 않는다. 반면 뮬리펜은 암담해 보였다.
“이게 여기 있다는 것은, 이 리치가 자락투스의 신도라는 뜻이기도 해요.”
“근데 그 자락투스는 뭐하는 놈이지?”
“가장 호전적인 신. 파괴와 전투의 신이에요.”
“그러면.......”
레이아라가 흐르는 땀을 닦았다. 생각보다 이번 일이 어려울 것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저 리치는 단순한 마법사가 아니에요. 그러면 모든 전사들의 신을 섬길 리가 없으니까.”
========== 작품 후기 ==========
아니 이더리움을 다 팔았는데 이게 왜오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