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너리움 광산 -->
성녀 뮬리펜. 그녀의 방대한 신성력은 사라졌지만, 지금까지 배워왔던 지식은 그대로 남아있다. 그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언어에 관련된 지식.
신에 대해 공부하며, 뮬리펜은 여러 언어를 공부했다. 고대 기록들을 읽기 위해서다. 비록 아주 깊게 공부한 것은 아니지만. 어지간한 대화나 글 정도는 읽어낼 수 있다.
‘일반적인 언어가 아니라면.’
그 비석에 적힌 게 마족이나 엘프의 언어가 아니라면, 아케르나라의 4대 신. 그들이 사용하는 신성한 언어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뮬리펜은 그 4가지 언어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뮬리펜은 카르안에게 자신의 능력에 대해 말했다. 마족의 언어뿐 아니라, 신들의 ‘신성한 언어’ 까지 읽을 수 있다고.
“그거 대단하군요.”
처음 보는 뮬리펜의 박식한 모습에, 카르안은 조금 놀랐다.
‘맹해 보이는 여자인줄만 알았는데, 모범생 타입이었나.’
아무리 얇다고 하지만, 신성 마법을 공부하며 여러 언어까지 다루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마족의 언어와 인간의 언어. 거기에 4대 신의 신성한 언어까지. 어지간한 외교 전문가 못지않았다.
카르안은 방 한구석, 책상 위에 펼쳐진 마법서로 시선을 돌렸다. 싫다고 툴툴거리면서도 나름대로 마법을 공부하고 있다. 이제 스스로 힘을 키우려는 것이다.
‘카라나리 만큼의 재능은 없지만.’
기대 이상의 전력이 되지 않을까. 그 전에 공부한 것도 신성 마법이니, 일반적인 마법과도 어느 정도 접점이 있을 것이다. 거기에 여러 가지 언어를 알고 있다면, 마법 원서를 읽는 것에도 도움이 된다.
역시 뮬리펜을 뱀파이어로 만든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다만, 여전히 단점도 존재하고 있다. 그녀는 아직 태양에 취약했다.
“그러면 밤에 움직여야겠군요.”
“하아~”
뮬리펜이 늘어지게 한숨을 쉬었다. 태양을 안본지 꽤 오래 되었다. 낮에는 자고, 이 지하실의 방을 나가는 것은 해가 완전히 사라진 밤에만 허락된다.
자신도 지금 태양빛에 노출되면 죽는 목숨이라는 것을 알기에, 순순히 따르고는 있다. 하지만 그런 생활 자체만으로도, 정신적으로 무리가 가는 게 느껴진다.
낮과 밤이 바뀌는 정도가 아니다. 태양을 볼 수 없다. 영원히 밝은 날을 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이 감정은, 심각한 우울증을 불러도 이상하지 않았다.
거기다가 식사는 인간의 혈액. 마치 농담처럼 느껴지는 생활이다. 뮬리펜은, 인간으로써의 무언가가 상실되어 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쩌겠습니까. 낮에 나가면 재밖에 안 남을 텐데.”
“저도 알아요.......”
뮬리펜이 우울하게 자신의 유리잔을 바라봤다. 잔에 반쯤 남은 피. 처음에는 혐오스러웠는데, 이제는 뭔가 달콤하고 저릿한 맛이 난다. 보기만 해도 침이 꼴깍 넘어 갈만큼.
거기에 마셔도 마셔도 질리지가 않는다. 천상의 음료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그러면 내일 밤에 움직이는 걸로 하죠.”
카르안이 단숨에 결정했다. 일반적으로는 밤보다 낮이 유리했지만, 뮬리펜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냥 거기 글자를 적어오면 안 되나요?”
뮬리펜이 중얼거렸다. 언뜻 보면 이기적일 수 있는 말. 하지만 사실은 다르다.
백작가의 병사와 기사는 모두 인간. 반면 광산을 지키는 것은 오크 같은 몬스터. 당연히 낮에 싸우는 편이 인간에게 유리했다. 그것을 어기고 밤에 이동한다면, 그만한 리스크를 감수해야한다.
뮬리펜 한명 때문에 전부 밤에 이동하는 것보다는, 뮬리펜이 말한 대로 낮에 가서 글자만 베껴오는 게 좋을 수도 있다. 하지만 카르안은 반대했다.
“기사들이 그 앞에서 공격을 당했습니다. 여유롭게 글자를 베껴 적고 있을 여유는 없어요.”
그나마 아는 글자면 다행이지만, 난생 처음 보는 언어라면 그림과 다를 바 없다. 실수없이 완벽하게 베껴 적여야 정확한 뜻을 알 수 있다. 혹시라도 잘못 해석했다가는 큰일이니까.
“정 위험하다 싶으면 뮬리펜씨가 확인만 하고, 다음날 아침에 가도 괜찮습니다.”
“그러면 가서 결정하는 걸로 해요.”
그까짓 비석, 그냥 무시하고 가도 그만. 하지만 카르안은 다르게 생각했다. 그냥 종이에 적힌 경고문도 아니고, 거대한 비석에 새겨 넣을 정도라면 분명 의미 있는 내용.
쉽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그 비석에 ‘골드드래곤의 레어, 들어오면 목숨 보장 못함’ 같은 게 적혀 있을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마법 함정까지 설치해 놓았는데, 분명 만만한 뭔가가 들어있지는 않을 것이다.
철저하게 준비해서 나쁠 게 없다. 그리고 카르안은 또 다른 문제가 있음을 떠올렸다.
기사단을 환영하던 오크들.
기사와 병사들을 공격하지 않은 것은 이해가 간다. 잘못 이빨을 들이댔다가는, 그 자리에서 기사와 병사들에게 도륙 당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일부로 도와줄 것은 없지 않은가.
‘가만, 근데 왜 거기 그놈들이 몰려있는 거지?’
카르안은 이너리움 광산 주변의 지도를 떠올렸다. 기사들에게 지시하기 위해 미리 알아봐야 했다. 그리고 주변의 지형도 대충 파악했다.
광산 주변은 딱히 오크가 살기 좋은 곳이 아니다. 강도 멀리 떨어져있고, 인간들의 발길도 끊어진지 오래. 납치할 사람을 찾을 수가 없다. 대체 왜 거기 오크들이 몰려있을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중 한명이 제국어 사용자라는 것. 정 안되면 직접 물어볼 수도 있다. 그것까지 순순히 말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면 내일 저녁까지 준비해 주세요. 시간은 넉넉할 겁니다.”
“예.”
뮬리펜의 쓸쓸한 대답. 이제 카르안이 방을 나가면, 또다시 혼자다. 카라나리와 다르게 고독에 익숙지 않은 소녀. 그녀에게는 견디기 힘든 상황이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심장에 구멍이 난 것처럼 허전했다. 지금까지의 인연들은 전부 사라지고, 유일한 혈육, 치프까지 죽었다. 마음에 상처가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리라.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뮬리펜이 말했다.
“그런데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응?”
카르안은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손에 뭔가 푹신한 감촉이 느껴지는데. 카르안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뮬리펜의 고운 은발에, 카르안의 손이 올라가 있다.
“아차.”
평소 카라나리에게 하던 행동을 그대로 해버렸다. 카라나리가 가끔 우울한 표정을 지을 때마다 카르안은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면 카라나리의 우울한 분위기가 조금 풀어졌다. 그래서 요즘 사람이 안 볼 때, 카르안은 카라나리를 자주 쓰다듬고 있었다.
“아하하........”
손에 익은 행동이 자기도 모르게 나와 버렸다. 당연히 뮬리펜은 카라나리와 그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항상 호의적이었던 카라나리와 다르게, 뮬리펜의 반응은 격렬했다. 그녀가 분한 듯 몸을 떨었다.
“으으읏!”
“잠깐!”
꽈악-
뮬리펜은 카르안의 손을 낚아채서 입으로 물어버렸다. 찌릿 하는 고통이 손등에서 느껴진다.
“아악, 이것 좀 놔요!”
“머저사가하세여!”
“대체 뭐라는 거야!”
뮬리펜은 손바닥을 문 채 뭐라고 소리쳤다. 변역하자면 먼저 사과하세요. 가 되겠지만, 카르안에게는 그저 외계어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말 안 듣는 고양이 같아.’
카르안은 뮬리펜을 손바닥에서 떼어내며 생각했다. 쓸데없이 자존심은 세고, 몰래 숨어서 뭐 먹다 걸리면 바닥에 쏟고....... 마음에 안 들면 물어뜯지를 않나. 착하기만 한 성녀에게 이런 모습이 있는지는 몰랐다.
“하아, 하아.”
한바탕 싸움이 끝나고, 두 사람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물리펜도 진심으로 화나지는 않았고, 카르안도 손바닥 좀 물린 걸로 뭐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마치 불꽃놀이가 끝난 것 같은 정적이 느껴졌다. 오직 거친 숨소리만 두 사람 사이에서 들려왔다.
“뮬리펜씨.”
고개를 살짝 숙인 뮬리펜. 카르안은 그런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뮬리펜에게 말했다.
“살아있는거, 후회하지 않죠?”
“........네.”
뮬리펜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자신이 행복하냐, 불행하냐를 따지면, 아무래도 후자에 속했다. 그래도 이것 한가지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알샤인의 배신에서 살아남은 것. 그것만큼은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아니, 후회할 수 없었다. 그녀를 위해 죽은 한 노인을 위해서라도. 행복하게 사는 것. 그게 소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추모방법이었으니까. 카르안이 말했다.
“나중에 같이 산책이라도 가요. 물론 낮에.”
“지금 놀리시는 거예요?”
“그럴 리가요. 지금은 아니지만, 힘을 키운 뱀파이어는 태양빛도 이겨내니까.”
카르안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다른 뱀파이어들의 피를 흡수하며 강해진 뱀파이어는, 일정 수준이 넘어가면 태양도 견딜 수 있는 힘을 가진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뮬리펜이 카르안과의 사투로 엉망이 된 머리를 정리했다. 아름다운 은발. 자기도 모르게 쓰다듬을 정도로 멋진. 자리에서 일어난 카르안은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은발의 소녀에게 말했다.
“희망을 가지세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만 있어도 살 수 있으니까.”
2.
다음날 저녁. 카르안은 자신에게 가장 충성스러운 기사 10명을 선별했다. 그리고 저택에 있던 카라나리, 뮬리펜도 자리에 불렀다.
“밤눈 좋은 병사들로 뽑은 것 맞겠지?”
카르안은 기사들 뒤쪽을 바라봤다. 100명의 병사들. 전원이 갑옷으로 단단히 몸을 감싸고 있었다.
기사들과 병사들 모두 중무장한 상태. 카르안도 가벼운 가죽갑옷을 입었다.
이 정도라면 어지간한 공격에는 당하지 않을 것이다. 카르안은 거기에 마차까지 한 대 대동했는데, 그 안에는 필요한 장비가 전부 들어있었다.
병사들은 구보로, 카르안과 기사들은 말을 타고 이동한다. 카라나리는 용병 자격으로 참가했는데, 그녀에게도 말이 지급되었다.
덕분에 카라나리 뒤에는 뮬리펜이 타고 있다. 두 미녀의 등장에, 병사들의 사기가 조금 올라가는 게 느껴질 정도.
“이동한다.”
별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카르안. 총 사령관인 그가 말하자, 지휘를 맡은 기사들이 병사들을 이끌었다. 백작가의 깃발을 든 병력이 영지 밖으로 나섰다.
저녁이라 해도 이제 막 해가 진 초저녁이다. 아직 거리에는 사람들로 가득. 전쟁이라도 치를 것 같은 병력이 지나가자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런데 너무 많은 병사를 보내는 거 아닙니까.”
카르안의 옆에 서 있던 기사가 말했다. 기사 10명과 사병 100명. 거기에 카르안까지 빠져나가는 것은, 백작가를 다 비워두는 거나 마찬가지.
하지만 카르안은 걱정하지 않았다. 지금 카르안을 공격할 세력이라고 해봐야 사이프카르의 흑룡회가 전부. 하지만 카르안과 사이프카르는 서로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서로가 서로를 공격할 수 없게끔.
계약에도 허점은 있다. 사이프카르가 카르안을 제외한 모두를 쑥대밭으로 만들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반대로 카르안이 알페라츠 백작령 내 흑룡회를 전부 박살낼 수도 있다. 그것을 알기에 사이프카르도 공격을 하지 못한다.
카르안은 뒤따라오는 병사들에게 말했다.
“멀리 떨어진 곳도 아니다. 조금만 힘내라.”
“예!”
“돌아가면 내가 맛있는 술이라도 한잔 사지.”
도보로 약 1시간 반 정도 거리. 그다지 멀지도 가깝지도 않다. 병사들은 카르안의 격려에 다리에 힘을 주었다.
백작이 직접 그들에게 힘내라고 해 준 것이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런 말이라도 해주는 귀족이 몇이나 있던가.
특히 전대 백작은 사병들을 그저 도구로밖에 보지 않았다. 사실 지금의 카르안도 그다지 다르지는 않았지만, 친근한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는 점이 중요했다. 카르안은 말 몇 마디로, 병사들의 사기를 약간이나마 증폭시켰다.
“허허.”
옆에 서 있던 기사들이 감탄했다. 카르안이 백작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느새 많은 병사들은 그를 따르고 있다. 카르안이 잘했다기보다는, 전대 백작이 더럽게 못한 것도 있지만 말이다.
카르안이 뭘 해도 전 백작보다는 나아보였다. 모룬 백작은 절대 원하지 않았지만, 죽어서도 카르안에게 도움이 되고 있었다.
그들이 백작가를 떠난 지 한 시간. 병사들도 슬슬 지치고 있었다. 한 기사가 카르안에게 속삭였다.
“백작님. 지금쯤 한번 쉬게 해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카르안은 뒤를 한번 돌아봤다. 확실히 병사들이 지쳐 보이기는 한다. 이럴 때는 경험 많은 기사의 말을 듣는 게 정답이다. 카르안은 손을 올렸다.
“10분간 휴식.......”
“백작님! 고블린들 입니다!”
앞서가며 선발대 역할을 하던 기사가 소리쳤다. 카르안은 눈썹을 찌푸렸다.
“......조금 있다가 쉬자.”
잠시 후, 고블린들을 앞세운 오크들이 등장했다. 그중 가장 앞에 선 오크. 덩치는 작았지만, 다른 오크들에 비해 좋은 무기로 무장하고 있다. 마치 무리의 우두머리처럼.
그 오크가 소리쳤다. 인간의 언어, 제국어로.
“인간들이여! 우리는 그대를 환영한다!”